기억을 복사하는 주사위
목소리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강인은 경찰서에 출두해야 했다. 그는 여전히 장유경 살해사건의 피의자로 지목되고 있었고, 날짜가 엇갈린 민효의 진술은 그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강인은 자신이 무혐의라는 사실을 애써 주장하려 하지 않았다. 사건 자체에 완전히 무관심한 그의 태도는 사건을 조사중인 형사들의 의견이 분분히 엇갈리도록 만들었다. 자신의 범행이 아니기에 그와 같은 평정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는 견해와 그 같은 평정을 가장함으로서 자신의 혐의를 애써 부인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서로 엇갈렸던 것이다. 그러나 강인과 마주앉은 피의자 심문 담당자인 권대현 형사는 어느 쪽 의견에도 동의하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강인은 장유경의 집에서 맨 마지막으로 나온 사람임을 CCTV가 명백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범인은 뻔했다. 문제는 강인으로 하여금 혐의를 솔직히 시인하게끔 하는 것, 그뿐이라고 권 형사는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젊은이는 좀 이상해’라고 권 형사는 머릿속으로 뇌까렸다.
‘너무나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을 다뤄 온 나로서는, 웬만한 사람이라면 인상 두 번에 말 몇 마디만 나눠 봐도 어떤 사람인지 90퍼센트는 검증되어 나온단 말이야.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젊은이는 얄팍한 핑계나 술수로 자신의 범죄를 감출 정도로 뻔뻔스러운 타입의 청년과는 질적으로 달라. 게다가 살인을 저지른 젊은이답지 않게 자기 범행에 진심으로 무심한 태도가 아닌가. 여느 살인범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태도야. 정말 범인일까?.......아니지. 움직일 수 없는 증거 앞에 회의를 품어서는 안 돼. 이 젊은이는 범인이야. 하지만......범행에는 무심하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절망하고 있는 것 같은 저 표정은 대체 뭘까?
내가 지금까지 본 젊은 살인범들의 모습은 대체적으로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기 행동에 대한 후회와 자신의 앞날에 대한 불안으로 평정을 잃고 일그러진 모습, 또 하나는 자신의 행동이 정당했다는 확신에서 오는 안정된 모습. 그런데 이 젊은이는 어느 쪽도 아니다. 저 저 젊은이에게서 엿보이는 깊고 어둡고 조용한 절망을 요 근래 몇 년간 다른 젊은이들에게서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애매하고 수상하지만 인간적인 매력이 있는 젊은이다.‘
“장유경 씨, 왜 죽였나?”
“전 안 죽였습니다.”
아까부터 똑같은 말만 되풀이되고 있는 상황에서 권 형사는 얘기의 방향을 약간 다른 쪽으로 돌려 보았다.
“장유경 씨랑 내연관계였던 건 맞지?”
‘내연관계’라는 말이 우스웠는지 강인은 픽 웃었다. 권 형사는 강인이 웃는 이유를 알아채고 얼른 말을 바꾸었다.
“장유경 씨하고 연인관계......아니지, 이것도 이상하군. 좌우지간 서로 가까운 사이였던 건 맞잖아?”
“.......네.”
그러나 한 번도 유경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확립한 적이 없던 강인으로서는 예라는 대답도 아니오라는 대답도 그다지 정확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좀 실례되는 질문을 하나 하지. 같이 관계도 했던 사이였나?”
“무슨 관계 말입니까?”
“몰라서 묻나? 그러니까.....”
“성 관계요? 예. 맞습니다.”
“같이 자던 사이였다고?”
“네.”
“애인은 아니었고?”
“애인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같이 잤단 말이야?”
“애인이라야만 같이 잡니까?”
강인은 웃지 않고 반문했으나 권 형사는 이상하게도 낯을 붉히는 자신을 느꼈다.
“장유경 씨 집에는 자주 드나들었나?”
“네.”
“자네는 자네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데 말야......그 말은 자네에게는 그녀를 죽일 이유가 없었다, 이런 뜻도 되는군. 그렇지?”
“그렇습니다. ”
“그렇다면 두 사람, 사이가 좋았다는 뜻이지?”
“네. ”
“그러면 그 마지막 날, 자네가 마지막으로 그 여자 집에서 나온 날까지도 서로 전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헤어졌다는 뜻이지?”
강인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를 보이다가 대답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조금은......화가 났을 겁니다.”
이제서야 조금 단서를 내놓는가 싶었다.
“그래? 그러면 왜?”
대부분 피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이 피의자 심문 과정에서 보이게 마련인 난폭한 태도가 이 젊은이에게는 없다. 유도심문에 말려든다고 생각하면 대개는 화를 내게 마련인데도 이 젊은이는 미련한 것인지 교활한 것인지, 태평스럽기 짝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권 형사는 강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다 알았으니까요.”
“뭘 다 알았단 말이야?”
진작부터 이렇게 우회도로를 타고 유도심문으로 전환했어야 했다고 흐뭇해하며 권 형사는 반문했다. 강인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엷게 웃었다. 그 모습이 무척 거만해 보여서 권 형사는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가 그 여자를 사랑한 적이 없다는 사실요.....물론 그 누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제가 조금이라도 그 누나를 생각하는 마음을 갖길 원했죠. 그 누나가 만들어내는 그 멋진 노래들 말고, 그 누나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져주길 원했죠.”
대답이 길어지자 강인의 쉰 목소리가 기침으로 변했다. 그의 목소리는 폐렴이나 기관지염을 앓는 늙은이의 목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그렇지만, 그 주사위가 그 누나 손에 들어간 게 잘못이었어요. 쓸데없는 사람들의 기억을 너무 많이 받아들인 데다가 제가 누굴 위해서 노래를 불렀는지도 다 알았으니까. 아시겠어요? 저는 언젠가는 그 애를 위해서 노래를 불렀는데, 그때 끔찍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다시는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노래를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 만약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해서 노래를 부르면 제 목소리가 그 사람을 해친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누군가를 위해서도 아닌 오로지 저 자신만을 위해서 노래했어요. 그런데 그 누나는 헤어지기 전에 제게 부탁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노래해 달라고.”
강인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탁했고 너무나도 자주 끊어졌다 다시 이어졌기 때문에 권 형사는 그가 하는 말의 반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주사위? 기억? 노래? 끔찍한 사실? 그게 살인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이지?
“그래서 전 그 누나를 위해서 노래를 불렀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노래한다는 것은, 잠깐이지만 그 사람을 미칠 듯이 사랑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되죠. 말씀해 보세요. 제가 그 누나를 위해 노래했던 날이 그 누나가 죽은 날입니까? 그런가요? 듣자니 민효가 그 누나를 만난 날이 그 누나가 죽고 난 다음 날이라는데 그 날이 제가 그 노래를 부른 날입니까? 대답 좀 해보시죠?”
강인의 목소리가 쥐어짜이듯 울려퍼졌다가 일시에 멈추었다. 강인은 숨을 헐떡거리며 한껏 빛냈던 눈동자의 광채를 끄고는 고개를 숙이고 기침을 했다. 권 형사는 별 미친 놈을 다 보겠다고 생각하며 고함쳤다.
“네깟것들이 짜고 우릴 속이려는 걸 모를 줄 알아? 세상에 죽은 사람하고 얘기를 나눴다는 가당챦은 헛소리를 나보고 믿으라는 거야 뭐야? ”
물론 장유경이 죽은 것은, 강인이 K클럽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희’를 부르기 훨씬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권 형사는 당연히 장유경이 죽은 날짜를 강인이 정확히 알고 있으리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기로는 강인이 범인이었으니까. 범행일자를 모르는 범인이라니, 그게 말이 되나? 만약 능청스레 딴청을 피우는 거라면, 이 젊은이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호칭이지만, 이 놈은 한갓 잔머리 굴리기에 바쁜 날라리 능구렁이에 불과하다.
강인은 눈살을 찌푸리며 권 형사를 올려다보았다.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불쌍한 누나였습니다. 그런데 왜 제가 그 누나를 죽였다는 겁니까? 전 누가 돈 주고 그 누나를 죽이라고 한대도 그 누나는 못 죽일 것 같은데요.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전 안 죽였습니다.”
술주정뱅이의 푸념에 가까운 어조였다.
피의자 심문조서실에서 나온 권 형사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지독한 고집불통이군. 증거가 명백한 데도 저렇게 태연자약하게 시치미를 떼다니, 그러면서도 불안해하지도 않다니. 정말 이상하군. 그러나 이렇게 된 이상 본인의 거부는 중요하지 않아. 남은 건 구속밖에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