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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칼리아예프 Jan 16. 2024

한국 사회에서 길 잃은 한국 사람

자기계발서를 혐오하는 자의 자기계발 분투기

그래 솔직히 나는 자기계발서를 혐오한다. 여러분이 자기계발서를 혐오하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혐오한다. 자기계발서는 20세기에 발명된 새로운 인민의 아편인지도 모른다. 말이 책이지, 그저 잘 팔리면 그만인, 철저한 기획 상품인지도 모른다. 우리를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의 노예로 만들지만, 우리가 노예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는 눈감게 만드는 기획 상품. 열심히 무언가를 하게 만들고, 꿈에 한 발짝 다가가기 위해 최선을 다 하도록 만들지만, 사실은 독자가 그렇게 되든 안 되든 별 관심 없는 기획 상품. 사실은 그저 팔아먹으면 그만인 기획 상품. 물론 자기계발서란 것에 효용과 기능은 있을 수 있다. 자기계발서를 통해 희망을 얻고,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계발서는 동시대 인간들을 기만하고 있다. 철저하고 무자비하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자기계발서를 쓴 사람 한 명 한 명을 혐오하는 건 아니다. 나는 어떤 인간도 미워하거나 싫어할 생각이 없다. 아니 오히려 나는 그들을 존경한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을 알려주는 그들을! 긍정의 힘으로 모든 일들을 극복하게 만드는 그들을! 빈자의 방식이 아니라 부자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말하게 해주는 그들을! 끌어당김의 법칙을 이해하게 만들어준 그들을! 순리에 따르게 하지 않고 역행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들을! 스티븐 코비, 데일 카네기, 조엘 오스틴, 로버트 기요사키, 론다 번, 공병호, 구본형, 김미경, 세이노, 자청 만세!


그래, 진지하게 만세를 외친 건 아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인데, 나는 인간이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 하는 것, 성실하게 살아가는 것, 이른바 노오력을 하는 것이 기본적으론 아름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미의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인지도 모르지만, 신자유주의에 가장 비판적이었던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도 늘 최선을 다했다. 그는 로제 사르티에와의 대담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를 반박하려는 사람이라면 아침 일찍 이른 시간에 일어나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조금 오만하게 들릴지 몰라도, 어쨌거나 사실은 사실입니다……” 부르디외도 만세….


카피라이터, 나는 그런 직함으로 일해왔다. 마케터로 일한 것까지 포함해서 총 4년. 나는 늘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퇴사를 결정했다. 그리고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장르는 자기계발. 놀라운 일이다. 자기계발서를 혐오하는 내가 자기계발을 주제로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으니.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그대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윽박지르는(?) 글을 써보겠다. 내가 쓴 글에 누가 관심은 가질지, 내가 쓴 글이 한 글자라도 읽히긴 할지, 아무런 확신도 없지만, 그래도 쓰겠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자기계발서를 혐오하는 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자기계발이 필요한다는 이유. 그리고 자기계발서를 혐오하는 많은 이들이, 세상의 고통과 슬픔을 생각하느라 자기 자신을 챙기지 못한다는 이유.


나는 광고 카피를 쓰는 일이 재밌었다. 짜릿한 순간도 꽤 많았다. 하지만 동시에 그 일은 지긋지긋했다. 그럼에도 늘 최선을 다 했다. 물론 누구나 최선을 다 한다. 부산 엑스포 유치를 위한 PT 영상에 강남스타일을 넣은 자도, 잼버리 대회를 준비한 자들도. 최선을 다한 자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파들은 이를 아름답게 여긴다. 좌파들은 이를 슬프게 여긴다. 왜 슬플까. 그건 우리가 최선을 다 해 살아도 우리의 성취, 성과, 능력, 쓸모를 증명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존에 늘 불안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최선을 다 하는 자’가 되길 선택한 동시에 강요받았다. 카피라이터로 일하기 전부터 그랬다. 고등학교 시절, 입시 미술학원을 다녔을 때에도. 성남에 있는 한 4년제 대학교에 입학해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때에도. 대학에 입학한 후 문학과 철학과 예술에 빠져 살았던 때에도, 등단은 전혀 못 할 것 같은 소설을 쓰던 때에도. 대학을 졸업하고 기자가 되려고 준비했던 때에도. 나는 나다운 삶을 추구했고, 그와 정반대로 안정을 추구하기도 했다. 다정함과 사랑과 우정을 추구했지만 동시에 내가 그 누구보다도 뛰어나기를 추구하기도 했다. 나의 그 모든 추구는 한국 사회에서 길을 잃게 만들었다. 물론 이런 말을 하면서 나는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낀다. 서울에서 자란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이 세상살이에 무슨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이렇게 비장한 언어를 쓰는가 하는 부끄러움. <난치의 상상력>, <장애학의 도전>,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같은 거 봐봐. 넌 진짜 속 편하게 살아온 거야라고 누군가 내게 말해도 할 말 없다. 하긴 내가 무슨 민주화 투쟁을 한 것도 아니고. 시민운동에 뛰어든 것도 아니고. 삼시세끼 밥 잘 먹고 꼬박꼬박 잘 잤으면서, 무슨 온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나를 지키려 피, 땀, 눈물을 흘린 척 하나. 하지만 비주류나 소수자의 정체성을 갖지 않더라도, 더 큰 가치에 삶을 투신하지 않았더라도 삶은 얼마든지 고통스러울 수 있다. 이 말이 투정처럼 들린다면 미안하게 됐다.


어쨌거나 나는 삶에 주어지는 여러 고통으로부터 삶을 지켜왔다. 거기에 최선을 다했다. 이에 필요했던 12가지 기술들을 글로 쓴다. 이 기술들은 앞으로 살아갈 나를 지켜줄 기술이기도 하다. 한국 사회에서 길 잃은 한국 사람인 나를 지켜줄 기술. 물론 한국 사회에서 길 잃은 한국 사람은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땅에 태어나 길을 잃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한다. 최선을 다해 키보드를 두드려보겠다. 당신이 자기계발서를 얼마나 혐오하든, 당신이 삶을 지킬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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