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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한용 Feb 10. 2024

쓰지 않으면 못 견뎌서 쓰는 글쓰기

그냥 써라

나는 미대를 나왔는데순수예술도 아니고디자인 전공이었다스무살 때 카뮈를 읽지 않았으면디자이너가 됐을지도 모른다하지만 당시 나는 카뮈를 읽었고주변에 카뮈를 읽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기에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겼다만약 문창과나 국문과불문과를 갔으면 어땠을까그래도 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겼을까그랬어도 지금처럼 책에 약간 미친(…) 사람이 되었을까잘 모르겠지만, <엄마를 부탁해말곤 문학 따위 아무도 읽지 않던 2008년 말에 카뮈를 읽고스스로를 특별하게 여기기 시작하면자기만의 글을 써보고 싶어하는 법이다약간의 허영심과외로움과예술가병이 혼재된 상태로볼라뇨는 말했다. “문학+=”….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한 이후에도 그 병은 고쳐지지 않았다. 나는 병든 채로, 방학이 되면, 좀 이상하고, 수준이 높지 못하며, 성숙지 못한 자의식이 반영된 소설들을 몇 편 썼다. 그리고 아무 부끄럼 없이 그 원고들을, 출판사들의 문학상 공모전에 투고했다. 뭔가 재밌는 생각이 떠오르면,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에세이를 올리기도 했다. 그런 글쓰기 훈련 덕분이었는지, 대학 졸업 전에 나는 등단을 했고… 라고 쓰고 싶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국문학에 다행스러운 일이다…. 사실 그 땐 딱히 배운 것도 없이, 혼자 쓰기만 했다. 글쓰기를 어디서 배워야 하는지도 몰랐으니까.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디자이너가 될 생각은 없었다. 대학을 졸업한 나는 다른 진로를 생각해야 했다. 기자를 떠올렸다. 내가 존경하고 좋아했던 리영희도, 카뮈도, 조지 오웰도 다 저널리스트였으니까. 언론사 시험을 준비했다. 떨어지고 떨어지고 또 떨어졌다. 그러다 광고 회사에 취직했고, (중간에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도 했지만) 도합 4년을 카피라이터로 일했다. 소설가도, 기자도, 카피라이터도 다 글과 관련된 직업이다보니, 글을 잘 쓰고 싶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수많은 글쓰기 지침들을 접했다.


짧게 써라” 이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글쓰기 지침이다유시민도움베르토 에코도 단문을 쓰라고 한다뉴욕 타임즈의 편집 위원인 벌린 클링켄보그도 <짧게 잘 쓰는 법>에서 같은 주장을 한다. “좋은 글은 종종 마치 작가가 눈 앞에서 말하는 듯 들립니다얼마나 자연스럽게 들리든 간에 입말처럼 들리는 문장은 절대 자연스럽게 구축되지 않습니다그런 문장의 특성은 무엇일까요일단 짧습니다실제로 말하는 것처럼 리드미컬합니다어휘는 간단해서 다음절어가 매우 적습니다문장도 간단해서 늘어지는 구절이나 종속절이 거의 없습니다이런 단순함이 문장에 리듬감을 더합니다.” 하지만 다른 주장도 있다불문학자 황현산은 긴 문장에는 긴 문장만이 담을 수 있는 사유가 있다고 했다소설가 정지돈도 비슷한 얘기를 한다. “긴 문장에는 긴 문장만이 갖는 호흡과 리듬이 있다”.


‘문장의 길이가 어때야 하는지’는 수많은 글쓰기 지침과 관련된 주제들 중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이미 이 주제 하나만으로 이견들이 쏟아져 나온다. 다른 지침들까지 살펴보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참여정부 연설비서관이었던 작가 강원국은 “말하는 것처럼 써야 한다”고 했다. 교육자이자 문학가였던 이오덕은 “일본식 한자어는 가능한 한 순우리말로 고쳐 써야 한다”고 했다. 이 지침들은 바로 반박된다. 인문학자 강창래는 <위반하는 글쓰기>에서 “글은 말과 달라서, 결코 입말처럼 쓰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근대 이후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어는 대부분 일본식 한자어라 이를 우리 글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한다. 자유(自由), 평등(平等), 권리(權利) 같은 단어들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그는 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한다. “어디에서나 통하는 절대 법칙은 (글쓰기에) 없다” 나는 우리가 글을 쓸 때, 위의 지침들을 잘 새겨듣고,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적용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움베르토 에코가 덧붙인 이 조언은 무조건 기억할 만하다. “짧게 써라. 당신은 프루스트가 아니다.” 문장을 짧게 쓰든, 길게 쓰든, 내가 프루스트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내가 프루스트가 아닌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이 하나 더 있다. 나는 이것이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지침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만 기억한다면, 내가 위에서 소개한 지침들은 모두 잊어도 좋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문창과를 나왔든, 국문과를 나왔든, 불문과를 나왔든, 나처럼 시각디자인과를 나왔든, 상관 없다. 바로 “그냥 쓰는 것”이다. 리투아니아 출신의 미국 시인이자 영화감독 요나스 매카스는 <수동타자기를 위한 레퀴엠>에서 이렇게 썼다. “어쨌거나, 여기 나는 다시 쓰고 있다. 쓰고 있다니! 나는 다시 타이핑을 하고 있다. 아, 단지 타이핑을 하는 건, 얼마나 기분 좋은 일인지. 그냥 타이핑하고 타이핑하고 타이핑하면 되는데, 왜 작가들은 늘 무엇에 관해 쓰고 싶어 안달인지 모르겠다. 작가들이라. 그들은 너무 많은 밤을 새우고 근심에 빠져 배회하고 뭐라도 쓸 거리를 찾아 죽도록 술을 퍼마시지만, 솔직히, 지금 나에게는 너무나도 명백한 일인데, 어떤 주제라는 게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 만약 당신이 작가라면, 그냥 써라, 내가 지금 그렇게 하는 것처럼. 그냥 쓰거나 혹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냥 타이핑해라. 거기 당신, 당신은 정말로 작가가 되고 싶은가? 그럼 그냥 앉아서 써라! (중략) 나는 그보다 더 현명한 말을 알지 못한다. 그냥 쓰는 것의 황홀함! 순수한 글쓰기, 순수한 노래 부르기, 둘 다 똑같다. 당신은 그냥 노래한다. 혹은 그냥 쓴다.”


글을 쓰려면 그냥 “글을 써야” 한다. 안다. 동어 반복이다. 하지만 진리다. 손에 펜을 꼭 쥐고 종이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든, 모니터 속 워드프로세서의 깜빡이는 커서를 보며 키보드를 두드리든, 아니면 스마트폰 위에 엄지 손가락을 얹어 놓고 터치스크린을 두드리든, 그 모든 행위를 좋아해야 한다. 육체가 그런 방식으로 움직이는 것에 희열을 느껴야 한다. 그 감각에 기뻐해야 한다. 글을 다 쓰고 나서 소리내서 읽어보기, 철저한 취재로 핍진성을 높이기, 튼튼한 논거로 설득력을 강화하기, 단문으로 쓰기, 치열하게 퇴고하기, 색다른 관점과 통찰을 담기. 이런 건 ‘그냥 쓰는 것’에 비하면 다 부차적인 문제다. 그냥 써야 한다. 그런데 어떻게? 글감도 있고, 소재도 있어야 하지 않나. 글이 될 만한 생각도 필요할 거 같은데? 맞다. 우리는 프루스트도 아니지만, 요나스 매카스도 아니다. 쓸 거리가 있어야 쓸 수 있다. 그런데 소재, 글감, 생각이 있다고 다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이 상태에 있어야 한다. ‘쓰지 않으면 못 견디는 상태’, ‘뭐라도 써야 직성이 풀리는 상태’.


여성학자이자 평화연구자인 정희진은 이제껏, 정치인 이준석의 글을 읽고 잘 썼다고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가 국민의힘을 탈당할 때 쓴 글에 대한 평가는 달랐던 모양이다. 그 글만은 잘 썼단 얘길 했다는 것이다. 그가 쓴 글의 글감과 소재는 자신이 당한 일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 아니었을까. 부조리를 직격하는 글, 약자가 되어 쓰는 글. 이런 글은 ‘쓰지 않으면 못 견디는 상태’에서 쓰인다. 학창 시절의 글쓰기 숙제, 그 가장 반대편에 있는 글이다. 그런 글을 쓸 때 우리는 기쁨을 만끽한다. 역설적이게도 그 기쁨은 자기 고통에 비례한다.


이 기쁨을 우리가 꼭 알아야 할까? 인터넷이 전 지구에 깔린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는 이른바, ‘재밌는 것들’이 넘쳐난다.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등 숏폼 플랫폼들은 무한하게 스크롤된다. 이 숏폼 플랫폼들 안에는 기상천외한 행동을 하는 사람들과 헐벗고 춤을 추는 사람들, 화려한 호텔과 여행지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 포르노 사이트들은 24시간 열려있다. 그들은 무한한 성적 자극과 오르가즘을 약속한다. 넷플릭스나 디즈니 플러스로 밤새 드라마 시리즈들을 정주행할 수도 있다. 삶이 고통스러운 자들에게 이 ‘재밌는 것들’은 위안을 준다. 이 ‘재밌는 것들’과 함께라면 글쓰기 따윈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다. 하지만 정말로 삶에서 깊은 고통을 겪는 자들에게, 이런 ‘재밌는 것들’은 뒤늦게 찾아올 고통을 유예시키는 마취제일 뿐이다. 그리고 마취가 풀리면 더 큰 고통이 찾아올 뿐이다. 그런데 성공을 했든, 실패를 했든, 부유하든, 빈곤하든 삶에 깊은 고통이 없는 자도 있나?


삶에서 마주하는 깊은 고통들은 분노와 슬픔을 일으킨다. 그 분노와 슬픔들은 타인에게 공감 받고, 위로 받으며 치유될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의 온전한 이해가 불가능한 고통, 혼자 직면해야 하는 고통도 분명 있다. 그런 고통은 글쓰기로 해소된다. 쓰지 않으면 못 견뎌서 글을 써본 사람들은 안다. ‘그냥 쓰기’의 기쁨은 그런 글을 쓸 때 비로소 만날 수 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쓰고 싶어서 쓰는 글, 키보드 위에 손을 얹고 싶어 안달이 나 쓰는 글. 그런데 이런 글이 반드시 남들이 보기에도 좋은 글일까? 또한 나에게 이른바 ‘성장’과 ‘발전’이란 걸 선물해줄까? 나아가 사회에, 현실에 의미는 있을까? 이 질문에 요나스 매카스는 이렇게 답해줄 것이다. “글쓰기는 다른 무엇과도 별 관계가 없다. 종이와 타자기가 전부다. 그래요, 데리다 선생님. 여기, 아마도 제가 궁극의 해체주의자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더라도요. 실로 의미 있는 어떤 것도 없다. 단어들, 단지 단어들. 혹은, 좀 더 정확하게는, 문자들. 당신은 그냥 앉아서 타자기를 두드린다. 그게 전부다. 문자에 이어지는 문자, 단어에 이어지는 단어. 어떤 단어일 수도 있고, 다른 단어일 수도 있다-별 차이는 없다. 그저 타이핑일 뿐. 문학은, 친구여, 저기 바깥의, 현실 세계와는 아무 상관도 없다네, 현실 세계 같은 게 있다면 말이지만. 있는 건 전부, 타이핑이다. 단어들, 단어들을 타이핑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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