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TI
책을 덮을 준비가 된 순간이 있다.
정보는 충분하다. 설명은 충분히 받았다. 나는 어떤 유형인지, 왜 그렇게 살아왔는지, 무엇이 나를 반복하게 만들었는지, 어디서 상처받았고 어디서 굳어졌는지. 이 모든 것이 글자로 정리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용해진다.
알게 된 것들이 머릿속에 가라앉는 그 순간, 어딘가에서 하나의 질문이 올라온다. 그래서 나는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이해는 끝났지만, 선택은 아직 남아 있다.
한 사람을 떠올려보자.
나를 오랫동안 힘들게 했던 사람이다. 이해되지 않았던 사람이다. 결국 멀어진 사람이다. 그 사람의 목소리, 그 사람이 자주 짓던 표정, 함께 있을 때 방 안에 떠돌던 공기의 무게. 오래됐는데도 선명하다.
예전에는 그 사람을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저 사람은 저럴까. 왜 저렇게 반응하지. 왜 이해가 안 되지.
지금은 다르다.
저 사람도 저 구조로 살아가고 있구나.
이 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을 나는 오래 기억한다. 분노가 있던 자리에 뭔가 다른 것이 들어왔다. 슬픔도 아니고 용서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힘이 빠지는 감각이었다. 내가 오래 쥐고 있던 것이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가는 감각.
이해하는 순간, 분노는 힘을 잃는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
이것이 도덕의 이야기는 아니다. 착해지자는 말이 아니다. 참고 넘기자는 말도 아니다. 상대방이 옳다는 말은 더더욱 아니다. 구조를 보게 된다는 것은 그것과 다르다.
저 사람의 반응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결과였다. 그 구조는 그 사람이 선택한 것이 아닐 수 있다. 상처가 만든 것이고, 생존이 만든 것이고, 반복이 굳어낸 것이다. 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 특정 구조로 살아남아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그 사람을 설득하려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바꾸려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이해받으려는 것도 멈출 수 있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놓아주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시선이 방향을 바꾼다.
그 사람을 보다가 문득 자신을 보게 된다.
그럼 나는? 나는 왜 이렇게 살아왔지? 왜 같은 관계를 반복했지. 왜 같은 방식으로 무너졌지. 왜 같은 선택을 했지. 반복된 관계들이 스쳐 지나간다. 반복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간다. 이 반복들의 뿌리에 무언가 하나가 있었다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 무언가가 내 공감 엔진의 구조였다.
나는 틀린 것이 아니라, 그 구조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이 문장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너무 쉽게 자기를 용인하는 것처럼 들릴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것은 자기합리화가 아니다. 이것은 자기 이해의 시작이다. 내가 왜 이 방식으로 살아왔는지를 구조로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구조를 다루는 것이 가능해진다. 자책 속에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해 위에서만 방향이 생긴다.
항상 맞춰주던 사람이 있다.
관계를 유지하려고 늘 먼저 연락하고, 먼저 배려하고, 먼저 맞춰줬다. 갈등이 생기면 자신이 먼저 물러섰다. 상대가 기분이 안 좋으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먼저 점검했다. 사람들은 이 사람을 착하다고 불렀다. 희생적이라고 불렀다. 좋은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느 날 지쳐 무너진다.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내가 좋아서 한 것인데 왜 이렇게 소진됐지. 내가 원해서 맞춰준 것인데 왜 이렇게 억울하지. 이 혼란이 오래 간다.
EETI로 보면 이 구조가 보인다. 과잉 공감 구조다. 버림받지 않기 위해 공감한다. 상대가 멀어지면 자신의 존재가 위협받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끊임없이 먼저 열린다. 이것은 따뜻한 성품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생존 방식이다. 오래 반복되면서 선택처럼 느껴지게 된 생존 방식이다.
이 사람이 처음으로 말한다.
이건 내 선택이 아니었구나.
자책이 사라진다. 내가 나빠서 소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약해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구조가 그렇게 작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구조는 이해할 수 있다. 이해할 수 있으면 조율할 수 있다.
차갑다고 불리던 사람이 있다.
감정 표현이 적다. 거리감이 있다. 냉정하다는 평가를 오래 받아왔다. 이기적이라는 말도 들었다. 공감 능력이 없다는 말도 들었다. 이 사람은 그 말들을 오랫동안 그냥 받아들였다.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인가 보다.
EETI로 보면 다르다. 공감 차단 구조다. 너무 많이 느꼈다가 너무 많이 다쳤던 경험이 쌓인 것이다. 더 이상 무너지지 않기 위해 공감 엔진의 문을 닫은 것이다. 이것은 차가움이 아니다. 오래된 방어다.
이 사람이 처음으로 인정한다.
나는 원래 차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혐오가 멈춘다. 내가 결함이 있어서 차갑게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공감OS가 약한 것이 아니라, 특정 경험 이후 공감 문을 닫은 구조를 갖게 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이해가 생기면 조금씩 다시 열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여기서 대부분 실수한다.
구조를 이해하고 나면 이렇게 생각한다. 그럼 바꿔야겠다. 고쳐야겠다. 이 반응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이 첫 번째 움직임이 되면, 다시 같은 자리로 돌아오게 된다.
EETI는 고치는 도구가 아니다. 보는 도구다.
이 차이가 전부다. 고치려고 하면 자기 자신과 싸우게 된다. 보려고 하면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고치려는 힘은 저항을 만든다. 보는 힘은 방향을 만든다.
보는 순간, 이미 절반은 바뀐다.
이것이 이 모든 체계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이다. 나를 더 나은 유형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를 더 정확하게 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정확하게 본 것은 이미 다르게 작동하기 시작한다.
유형은 설명일 뿐, 존재가 아니다.
11형, 24형, 33형, 44형. MBTI의 열여섯 가지. EETI의 열여섯 가지 대표유형과 이백오십육 가지 세부유형. 이 숫자들이 많은 것을 설명해준다. 나를 설명해주고, 타인을 설명해주고, 관계의 충돌을 설명해주고, 상처의 패턴을 설명해준다.
그런데 한 가지를 해주지 못한다.
숫자는 당신을 설명하지만, 당신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는다.
이것이 이 모든 이해의 끝에서 남는 것이다. 모든 설명이 다 이루어진 후에도, 그 설명을 들고 어떻게 살아갈지는 오직 그 사람만 결정할 수 있다. 어떤 공감을 선택할지, 어떤 반응을 허용할지, 어디에 열리고 어디에 닫힐지. 이 선택들이 매 순간 존재를 만들어간다.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다.
모든 것을 이해한 후에 남는 것은 질문 하나다.
당신은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
공감에 끌려다닐 것인가, 공감을 선택할 것인가. 반응할 것인가, 존재할 것인가. 구조대로 반복할 것인가, 구조를 알고 나서 조금씩 다른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
의지는 존재하려는 힘이다. 반응은 세상과의 접촉이다. 공감은 그 둘이 연결되어 존재가 실현되는 힘이다. 존재는 선택된 공감의 결과다. 나는 이것을 믿는다.
이것이 이 책이 시작부터 말하려 했던 것이다. 성격을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공감하며 존재하는지를 읽으려는 것. 분류가 끝이 아니라, 분류 너머에서 진짜 선택이 시작된다는 것.
다시 사람들을 본다.
여전히 각자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순간도 있다. 여전히 충돌이 있고 오해가 있고 상처가 있다. 그것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것이 있다.
더 이상 저 사람이 나쁘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저 구조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보인다. 더 이상 나를 함부로 미워하지 않는다. 이 구조로 살아온 것이라는 것이 보인다. 이 보임이 생겼을 때, 관계도 조금 달라지고 자기 이해도 조금 달라지고 선택도 조금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달라짐이 쌓이면, 삶이 달라진다.
이제 당신을 설명하는 것은 끝났다. 이제 당신이 당신을 선택할 차례다.
당신은 어떤 존재로 살아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