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ETI
중년의 제 각각 어느 시점에는 우울이 한 번씩 찾아온다. 본인은 미처 알지 못하고 지나가는 경우도 많다. 그렇게 나도 같은 하루를 시작하는 어느 날 눈을 떴는데 몸이 무거웠다.
큰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해야 할 일도 알고 있었다. 답장해야 할 사람도 있었고, 처리해야 할 것들도 있었다.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억지로 일어나도 마음이 따라오지 않았다. 예전엔 좋아하던 것들도 이상하게 손이 가지 않았다. 혼자 있고 싶은데, 혼자 있으면 또 내가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사람은 이렇게 점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상태로 무너지는가. 정말 의지가 없어서인가. 정말 게을러서인가. 정말 마음이 약해서인가.
지금 돌이켜 그 우울한 날들을 생각해보면 많은 것이 보인다. 우울은 의지 부족이 아니었다. 우울은 내 존재감이 떨어져서였다. 내 의지에서 비롯된 세상과의 공감의 결과가 자꾸 없어지기 때문이었다. 지속적인 공감의 실패, 존재의 소멸. 그 결과 의지가 다시 약해지는 구조적 상태로 돌아갔다. 이것이 우울이 아닐까.
우울증에 대해 우리는 익숙한 설명을 많이 들어왔다.
기분이 가라앉은 상태. 의욕이 없는 상태. 부정적 사고가 많아진 상태. 무기력한 상태. 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 설명만으로는 이상한 점이 남는다.
왜 어떤 사람은 우울하면 아무 말도 못 하게 될까. 왜 어떤 사람은 우울할수록 생각이 오히려 더 많아질까. 왜 어떤 사람은 겉으로 멀쩡한데 안에서만 계속 무너질까. 왜 어떤 사람은 크게 꿈꾸다가 갑자기 완전히 꺼져버릴까.
같은 이름을 붙여도 모양이 너무 다르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는 그 시절 단순히 슬펐던 것이 아니었다. 내 의지가 세상과 연결되지 못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우울을 단지 감정 문제로만 보기보다, 존재의 구조가 어떻게 무너지는가라는 관점에서 다시 보게 되었다.
우울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공감이론에서 존재는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의지에 반응하여 공감할 때 드러난다. 나는 무언가를 원하고, 느끼고, 말하고, 움직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 의지가 세상과 관계 속에서 반응을 만나 공감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나는 존재감을 느낀다.
그런데 이 흐름이 반복적으로 막히면 어떻게 되는가. 내 의지에 반응이 없다. 내 감정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내 말은 공감되지 않는다. 내 노력이 연결되지 않는다. 내 존재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 순간 사람은 단순히 슬퍼지는 것이 아니다. 존재감이 약해지기 시작한다.
우울은 공감이 되지 못해 존재감이 떨어지고, 그 결과 의지가 약해지는 상태다.
우울은 하나의 성격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정해진 한 유형도 아니다. 우울은 여러 길을 거쳐 도달하는 결과 상태다.
누군가는 너무 많이 느껴서 우울해진다. 누군가는 말하지 못해서 우울해진다. 누군가는 생각이 너무 많아져서 우울해진다. 누군가는 계속 대응만 하다가 우울해진다. 누군가는 반복된 실패 학습 끝에 우울해진다. 누군가는 큰 꿈이 꺾여서 우울해진다.
겉은 달라도 중심은 같다. 공감이 충분히 일어나지 못했다. 존재감이 떨어졌다. 그 결과 의지가 약해졌다.
우울은 내가 원래 약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내 의지가 세상과 충분히 연결되지 못한 시간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나 자신을 덜 미워할 수 있었다.
공감이론 유형인 EETI 에는 8개의 요소가 있다.
의지, 반응, 이성OS, 공감OS, 출력, 대응, 학습, 진화. 우울은 이 8개 요소 어디에서든 시작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몸으로 겪어봤기 때문에 안다.
의지가 먼저 줄어드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는 의지가 있었다. 살고 싶었고, 좋아하고 싶었고, 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반복된 좌절과 무반응 속에서 의지가 조금씩 줄어든다. 계속 말을 해도 안 통할 때. 노력해도 돌아오는 것이 없을 때. 기대할수록 실망만 쌓일 때. 의지가 약해서 우울해질 수도 있지만, 반대로 공감 실패가 누적되어 의지가 약해질 수도 있다. 이 방향이 중요하다.
반응이 너무 강한 경우가 있다. 반응이 강한 사람은 세상을 예민하게 받는다. 사람의 표정, 분위기, 한마디 말을 빠르게 감지한다. 별말 아닌데 하루 종일 신경이 쓰인다. 상대의 작은 표정 변화에 마음이 무너진다. 사람들 사이에만 갔다 오면 완전히 지친다. 반응은 공감의 힘이지만, 과열되면 의지를 움직일 에너지를 다 빼앗아간다.
이성OS가 의지를 갉아먹는 경우가 있다. 시작도 전에 머릿속 검토만 수십 번 한다. 말하고 나서도 계속 복기한다. 선택보다 분석이 먼저여서 움직이지 못한다. 생각이 많아서 우울한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의지를 출력 전에 계속 소모시키기 때문에 우울해진다.
공감OS가 자기 존재를 희미하게 만드는 경우가 있다. 상대 기분이 안 좋으면 내 마음도 무너진다. 누군가 불편해 보이면 내가 더 불편해진다. 내 감정보다 남의 감정이 먼저 보인다. 자기 존재보다 외부 정서를 먼저 수신할 때, 우울은 시작된다.
출력이 막히는 경우가 있다. 말하고 싶지만 말이 안 나온다. 움직이고 싶지만 몸이 안 간다. 싫다는 말조차 못 하는 순간이 있다. 분명 불편한데 괜찮다고 말하는 순간이 있다. 하고 싶은 말이 목구멍에서 막히는 순간이 있다. 출력이 약해지면 존재감도 약해진다. 존재는 출력되어야 공감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대응만 하다가 닳는 경우가 있다. 내 감정보다 분위기를 먼저 챙긴다. 내 욕구보다 상대 반응을 먼저 고려한다. 화가 나도 일단 참으며 관계를 봉합한다. 대응은 공감의 기술이지만, 과도한 대응은 자기 존재를 희생시키는 방식이 된다.
학습이 의지를 꺼뜨리는 경우가 있다. 말해도 안 통한다는 경험이 쌓인다. 표현해도 무시당하는 경험이 반복된다. 부정적 학습은 의지를 꺼뜨린다. 어차피 안 된다는 체념. 그것이 우울을 깊게 만든다.
창발이 좌절되는 경우가 있다. 크게 결심했는데 매번 오래 못 간다. 번뜩이는 확신이 있었는데 현실에서 꺼진다. 내가 더 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계속 무너진다. 진화형 사람의 우울은 단순 실패가 아니다. 창발하지 못한 존재의 허무다.
지금 돌이켜보면 우울은 이렇게 진행됐다.
내 안에 의지가 생겼다. 그런데 세상이 충분히 반응하지 않았다. 반응해도 공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내 출력은 무시되거나 왜곡됐다. 내 존재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 경험이 반복 학습됐다. 결국 내 의지는 점차 줄어들었다.
우울은 처음부터 의지가 없어서 오는 것이 아니다. 내 의지가 오랫동안 존재로 연결되지 못해 점점 약해지는 과정이다.
이것을 알게 되면 우울을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진다. 내가 게으른 것이 아니다. 내가 약한 것이 아니다. 내 의지의 출력이 공감으로 연결되지 못한 시간이 길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회복은 무엇을 되살리는 일인가.
지금 돌이켜보면 회복은 기분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회복은 존재의 회복이었다. 내 의지가 조금이라도 살아나고, 그 의지가 출력되고, 그 출력이 누군가의 반응을 만나고, 그 반응이 공감으로 이어지고, 그 공감이 다시 존재감을 회복시키는 것. 이 흐름이 조금씩 다시 돌아가는 것이었다.
의지를 거대하게 키우려 하지 말아야 한다. 작은 출력부터 회복하는 것이 먼저다. 공감되지 않는 관계를 줄여야 한다. 대응보다 내 출력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부정적 학습을 끊고 작은 회복 경험을 쌓아야 한다.
회복은 갑자기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회복은 내 의지가 다시 세상과 공감할 수 있다는 경험을 조금씩 되찾는 일이다.
우울은 내가 망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우울은 내가 약하다는 뜻도 아니다. 내 의지와 세상 사이의 공감 회로가 오래 막혀 있었다는 뜻이다. 공감의 흐름이 다시 살아나면, 존재감도 다시 올라올 수 있다. 의지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오래 눌려 있었을 뿐이다.
우울의 회복은 다시 살아내는 일이 아니다. 다시 존재하게 되는 일이다.
당신의 의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