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은 왜 다양성을 선택했는가?

공감의 다양성

by kamaitsra

우주는 질서 있는 다양성을 유지한다.


나는 요즘 유튜브를 보다가 이상한 느낌에 자주 빠진다. 한 영상을 보면 비슷한 영상이 계속 추천된다. 처음에는 편리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콘텐츠를 알고리즘이 척척 찾아주니까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고 믿었다. 주식 투자 영상을 하나 보면 또 다른 투자 영상이 뜨고, 등산 영상을 보면 또 다른 등산 영상이 추천된다. 알고리즘은 내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면 묘하게 답답해진다. 세상이 점점 좁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내 생각과 비슷한 의견만 계속 들리고, 다른 목소리는 점점 사라진다. 어느 순간 나는 같은 논리, 같은 주장, 같은 감정만을 반복해서 소비하고 있었다. 마치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 갇힌 것처럼, 내 얼굴만 무한히 반복되어 보이는 그런 기분이었다.




이것이 공감의 방향성이다. 공감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방향성을 가진다. 존재하려는 의지가 향하는 곳으로 감정은 흐르고, 그 감정은 점점 더 획일화되고 극단적이 된다. 오늘날 유튜브나 SNS의 좋아요 시스템은 이러한 공감의 작용을 명확히 보여준다. 공감을 받은 콘텐츠는 반복적으로 노출되며 비슷한 정보와 편향된 자극만을 강화한다. 1000명이 좋아요를 누른 게시물은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되고, 그러면 또 1만 명이 좋아요를 누르고, 그러면 또 더 많은 사람에게 노출된다. 공감의 증폭, 그리고 방향의 고착화.


나는 이 현상을 보면서 불안해진다. 이게 과연 건강한 공감일까. 공감이 한쪽으로만 쏠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결과는 분명하다. 공감은 더욱 한쪽으로 쏠리고, 다양성은 줄어들며, 감정은 획일화된다. 그리고 우리는 앞서 보았듯이 결국 공감 블랙홀로 빠져든다.




공감은 존재하기 위한 훌륭한 기본 원리다. 의지와 반응이 만나 실체를 만들어내는 이 메커니즘은 우주의 모든 존재를 탄생시킨 근원이다. 하지만 이처럼 획일화되는 구조적 단점 또한 함께 지닌다. 존재감이 비대해지고, 공감의 형태가 반복되고 편향될수록 존재는 점점 더 단단해지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무게로 붕괴된다. 마치 너무 무거워진 별이 자신의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블랙홀로 붕괴하듯이.


획일화는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자멸의 구조로 이어진다. 같은 방식, 같은 생각, 같은 감정만을 반복하면 처음에는 안정적으로 보이지만 환경이 변할 때 적응할 수 없다. 공룡이 멸종한 이유도 이것 아니었을까. 거대하고 강력했지만 환경 변화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공감 우주론은 무엇을 선택했을까. 단순한 성장이나 증폭이 아니라 순환과 회복, 진화와 확장, 견제와 균형이 작동하는 복합적 공감 순환시스템을 택했다. 속도는 느릴지 몰라도 그 시스템은 더욱 안정된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다. 다양한 선택지, 다양한 가능성을 수용할 수 있는 유연한 구조를 바탕으로 존재는 스스로를 자정하고 지속시킬 수 있다.




나는 등산을 할 때 이것을 자주 느낀다. 관악산을 오를 때면 여러 코스가 있다. 서울대입구 코스, 사당역 코스, 과천 코스. 각각 난이도가 다르고 풍경이 다르다. 어떤 날은 완만한 길로 천천히 오르고 싶고, 어떤 날은 가파른 바위길로 도전하고 싶다. 사람들도 각자의 체력과 선호에 따라 다른 길을 선택한다. 젊은 사람들은 험한 길을 좋아하고, 나이 드신 분들은 완만한 길을 선택한다. 그리고 모두 정상에 도착한다.


만약 정상으로 가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어떻게 될까. 그 길이 태풍으로 무너지면 아무도 정상에 갈 수 없다. 하지만 여러 길이 있으면 하나가 막혀도 다른 길로 갈 수 있다. 이것이 다양성의 실용적 가치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다양한 길이 있기 때문에 각자의 경험이 풍부해진다. 어떤 사람은 계곡의 아름다움을 보고, 어떤 사람은 바위의 웅장함을 느끼고, 어떤 사람은 숲의 고요함을 경험한다. 같은 산이지만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내려온다.


계절에 따라서도 산은 완전히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봄에는 새싹과 진달래가 피어나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이 그늘을 만들어준다. 가을에는 단풍이 불타오르고, 겨울에는 눈 덮인 설경이 펼�쳐진다. 같은 길을 걷지만 계절마다 전혀 다른 감동을 준다.


날씨에 따라서도 그렇다. 맑은 날에는 서울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흐린 날에는 안개 속을 걷는 신비로운 경험을 한다. 비 온 뒤에는 공기가 맑아지고 계곡물이 힘차게 흐른다. 눈 내린 날에는 세상이 하얗게 변해 발자국 소리조차 달라진다.


시간대에 따라서도 산은 다르다. 일출 등산을 하면 어둠 속에서 출발해 해가 떠오르는 장엄한 순간을 맞이한다. 아침 등산은 상쾌하고 가볍다. 새소리가 들리고 이슬이 반짝인다. 한낮 등산은 뜨겁고 땀이 많이 나지만,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아름다움이 있다. 저녁 등산은 노을을 보며 하산하는 여유가 있고, 일몰을 보기 위해 정상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설렘이 있다. 야간 등산은 헤드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오르는 긴장감과, 정상에서 보는 도시의 야경이 주는 감동이 있다.


같은 산이지만 — 이렇게 다르다. 코스에 따라, 계절에 따라, 날씨에 따라, 시간에 따라. 수백 가지의 다른 경험이 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같은 산을 수십 번, 수백 번 오른다. 지루하지 않다. 매번 — 새롭다.


이것이 다양성의 본질적 가치다. 공감은 다양성을 선택한다. 다양성만이 존재를 유지하고 질서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주도, 자연도, 생명도, 인간도 그 어느 하나 획일적이지 않고 독점적이지 않다. 별들은 각기 다른 크기와 밝기를 가지고, 나무들은 각기 다른 모양과 색을 띠고, 동물들은 각기 다른 습성과 생김새를 가진다. 이 모든 것이 공감, 그리고 존재하려는 의지가 다양성을 선택했다는 강력한 반증이다.




그렇다면 다양성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나는 최초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존재하려는 의지가 처음 반응과 만나는 그 순간으로. 빅뱅의 순간으로. 아니, 그보다 더 이전, 무(無)에서 유(有)가 생겨나려는 바로 그 찰나로.


최초의 의지, 존재하려는 의지로부터 다양한 반응이 있었다. 양자 요동, 양자 중첩, 양자 얽힘, 대칭 파괴, 우주의 4대 힘, 관성. 이 반응들이 의지와 만나 무수히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것이 다양성의 출발점이다. 처음부터 다양성은 구조 안에 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다양한 반응들은 그 조합과 강도에 따라 통계적 정규 분포를 따른다. 마치 종 모양의 곡선처럼, 중간은 많고 양 극단은 적다. 우리는 이것을 다섯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강한 긍정적 반응 (즉각적 수용, 열광)

약한 긍정 (따뜻한 수용, 호감)

중립적 반응 (관망, 그저 그런 느낌)

약한 부정 (조심스러운 반감, 거리두기)

강한 부정 (즉각적인 거부, 저항)


이렇게 다섯 가지로 단순화했지만 실제로는 그 사이의 무수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강한 긍정과 약한 긍정 사이에도 수십 가지 단계가 있을 것이고, 약한 부정과 강한 부정 사이에도 무수한 gradation이 존재한다. 그리고 이 반응들은 시간에 따라 변하기도 한다. 처음엔 중립적이었다가 점차 긍정으로 변하거나, 처음엔 긍정적이었다가 부정으로 바뀌기도 한다.


이렇게 다양한 반응의 강도와 방향은 공감의 결과를 달라지게 만들고, 그 결과 형성되는 존재 또한 모두 다르게 나타난다. 즉, 존재는 처음부터 다양한 의지-반응 조합의 산물이며, 다양성은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인 필연이다. 우주가 다양성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공감의 메커니즘 자체가 본질적으로 다양성을 생산하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생각하면서 동양의 음양오행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교양 수업에서 배웠던 내용인데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음양? 오행? 무슨 미신 같은 소리인가 싶었다. 하지만 40대가 되어 공감이론을 체계화하면서 다시 보니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음양은 의지와 반응의 이원 구조가 아닐까. 양(陽)은 존재하려는 의지, 밝게 드러나려는 능동적 에너지. 음(陰)은 그 의지를 받아들이는 반응, 수용하고 품는 수동적 에너지. 의지만 있고 반응이 없으면 존재는 실체화되지 못한다. 반응만 있고 의지가 없으면 공감할 대상이 없다. 음과 양, 의지와 반응이 만나야 비로소 존재가 탄생한다.


그렇다면 오행은 무엇일까. 동양철학에서 오행은 음양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하나가 둘로 나뉘고, 둘이 다섯으로 분화된다. 태양(太陽), 소양(少陽), 중화(中和), 소음(少陰), 태음(太陰). 이 다섯 가지 상태로 순환한다.

나는 이것을 정리하면서 놀랐다. 공감이론과 정확히 일치했다.


의지와 반응의 조합이 다섯 가지로 분류된다는 것. 강한 긍정, 약한 긍정, 중립, 약한 부정, 강한 부정. 그 조합의 방향성과 강도에 따라 파생되는 다섯 가지 공감 패턴. 다섯 가지 존재의 특성.


동양 철학자들은 이것을 수천 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태양(太陽)은 강한 긍정이다. 가장 밝고, 가장 뜨겁고, 가장 활발하다. 여름의 한낮처럼. 모든 것이 극에 달한 상태.

소양(少陽)은 약한 긍정이다. 조금 밝고, 조금 따뜻하고, 조금 활발하다. 봄의 오전처럼. 점차 커져가는 상태.

중화(中和)는 중립이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다. 가을의 정오처럼. 균형 잡힌 상태.

소음(少陰)은 약한 부정이다. 조금 어둡고, 조금 차갑고, 조금 정적이다. 가을의 저녁처럼. 점차 작아지는 상태.

태음(太陰)은 강한 부정이다. 가장 어둡고, 가장 차갑고, 가장 고요하다. 겨울의 한밤처럼. 모든 것이 최소로 줄어든 상태.




이 다섯 가지를 동양 철학자들은 자연의 특성과 연결했다. 나무(木), 불(火), 흙(土), 쇠(金), 물(水). 오행이다.


나무(木)는 소양이다. 봄. 성장. 확장. 위로 뻗어나가는 힘. 약한 긍정의 에너지. 씨앗이 싹을 틀 때, 가지가 자랄 때, 잎이 펼쳐질 때. 조용하지만 — 멈추지 않는 성장.

불(火)은 태양이다. 여름. 극성. 폭발. 사방으로 타오르는 힘. 강한 긍정의 에너지. 모닥불이 활활 탈 때, 태양이 작열할 때, 열정이 불탈 때. 강렬하고 — 거칠 것 없는 확장.

흙(土)은 중화다. 환절기. 전환. 안정.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힘. 중립의 에너지. 씨앗을 품을 때, 뿌리를 지탱할 때, 물을 머금을 때. 드러나지 않지만 — 모든 것의 기반.

쇠(金)는 소음이다. 가을. 수렴. 응축. 안으로 모으는 힘. 약한 부정의 에너지. 곡식이 익을 때, 열매가 단단해질 때, 낙엽이 떨어질 때. 조용히 — 불필요한 것을 정리하는 수축.

물(水)은 태음이다. 겨울. 극음. 잠복. 아래로 스며드는 힘. 강한 부정의 에너지. 강물이 얼 때, 생명이 땅속으로 숨을 때, 만물이 고요해질 때. 깊고 — 완전한 휴식.


이것들은 단순한 물질의 이름이 아니다. 의지와 반응이 만나 형성되는 다섯 가지 기본 패턴의 은유다.

동양 철학자들은 현미경도 없었고, 입자가속기도 없었고, 양자역학도 몰랐다. 하지만 관찰했다. 자연을. 사람을. 우주를. 깊이. 그리고 발견했다. 모든 것이 다섯 가지 패턴으로 순환한다는 것을.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겨울에서 다시 봄으로. 끊임없이.


나무가 불을 낳고(木生火), 불이 흙을 낳고(火生土), 흙이 쇠를 낳고(土生金), 쇠가 물을 낳고(金生水), 물이 나무를 낳는다(水生木). 상생(相生)의 순환.

나무가 흙을 이기고(木克土), 흙이 물을 이기고(土克水), 물이 불을 이기고(水克火), 불이 쇠를 이기고(火克金), 쇠가 나무를 이긴다(金克木). 상극(相剋)의 균형.


우주의 작동 원리다. 존재의 메커니즘이다. 공감의 구조다.

서양 과학이 분석을 통해 발견한 것을, 동양 철학은 직관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표현 방식만 달랐을 뿐이다.




공감이론은 음양오행을 의지와 반응의 다양성 표현 체계로 새롭게 해석한다. 하지만 이것은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삶 속에서 느껴온 뜨거운 경험의 축적이다. 우리 조상들은 의지와 반응, 공감과 존재의 메커니즘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음양오행이라는 아름다운 체계로 정리했던 것이다.


모든 존재는 이 다섯 가지 패턴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어떤 사람은 나무의 기운이 강하고, 어떤 사람은 불의 기운이 강하고, 어떤 사람은 물의 기운이 강하다. 그리고 그 조합은 무한하다. 나무 70%, 불 20%, 흙 10%인 사람이 있고, 물 50%, 쇠 30%, 나무 20%인 사람이 있다. 이 무한한 조합이 인간의 다양성을 만든다.


나 자신을 돌아보면 나무와 쇠의 기운이 강한 것 같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확장하려는 나무의 기운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정리하려는 쇠의 기운. 이 두 가지가 내 성격의 기본 골격을 이룬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물의 기운도 조금씩 강해지는 것을 느낀다. 예전처럼 모든 것을 통제하려 하지 않고, 흐름에 따라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생긴다. 다양성이 생존의 조건이라면 단순히 무질서하게 다양한 것만으로 충분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회사에서도, 가정에서도, 사회에서도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이 있다. 다양하기만 한 구조는 견제와 균형을 잃고 결국 또 다른 혼란을 낳게 된다.


회사에서 한때 "다양성"을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 적이 있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채용했고, 다양한 의견을 존중한다고 강조했다. 좋은 의도였다. 하지만 실제로는 혼란만 가중되었다.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른 방향으로 가려고 했다. 회의를 해도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프로젝트는 제시간에 완료되지 못했다. 다양성은 있었지만 조화가 없었다.


그래서 존재하려는 의지는 다양성 자체보다 그 다양성을 어떻게 조화롭게 유지할 것인가를 더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야지 더욱 잘 존재할 수 있으니까. 이것이 핵심이다. 단순히 다양한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다양한 것. 무질서한 다양성이 아니라 질서 있는 다양성. 그렇지 않다면 편향된 성질이 우주를 지배하고 극도로 강해진 존재는 곧 공감 블래홀로 자멸한다. 이것은 존재하려는 의지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질서 있는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그것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어떻게 하면 공감 순환시스템을 통해 자동을 운영할 수 있을까?




자연은 하나의 해법을 선택했다. 강력한 공감에너지장을 바탕으로 다양성을 균일한 패턴으로 주기화시키는 것이다.


태양, 달, 태양계의 행성들, 별자리. 이것들은 강력한 공감에너지장을 공유하고 있다. 그리고 주기를 가진다. 반복한다. 순환한다.


이들의 주기적 공감 에너지 순환 구조를 통해, 우주는 질서 있는 다양성을 유지한다.




나는 별자리 운세를 믿지 않았다. 사주팔자도 믿지 않았다. 40대 남자가, 그것도 논리적이고 과학적 사고를 중시하는 사람이 비과학적 운세론을 믿는다니 말이 되는가.


하지만 살다 보니 이상한 패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우연이 반복되면 패턴이 된다. 특정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은 비슷한 성향을 가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예외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경향성은 분명히 존재했다.


공감이론은 이렇게 설명한다. 존재는 우연한 조합이 아니다. 에너지의 비중과 타이밍까지 고려된 우주적 패턴 위에서 태어난다.




순환 시스템은 무작위한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 구조는 태양의 생명력, 달의 감수성, 태양계 행성들의 인력, 별자리의 공간 배치. 이 모든 것의 공감에너지장 영향을 받는다.


우리는 그 의지에 반응하여 공감하며 태어난다.


태양은 1년 주기로 지구를 비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네 계절은 각각 다른 에너지를 가진다. 봄은 생명의 시작, 여름은 성장의 절정, 가을은 수확과 정리, 겨울은 휴식과 재충전. 봄에 태어난 사람은 시작의 의지를 많이 받고, 겨울에 태어난 사람은 휴식의 의지를 많이 받는다.


달은 한 달 주기로 차고 기운다.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달의 위상에 따라 조수가 변하고, 여성의 생리 주기가 영향을 받고, 동물들의 행동이 달라진다. 보름달에 태어난 사람과 그믐달에 태어난 사람은 다른 감수성의 의지에 반응한다.


태양계 행성들을 생각한다.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각각 다른 주기를 가진다.


이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태양의 주기, 달의 주기, 행성들의 주기. 모두 다르다. 그래서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나도 장소가 다르면 다른 영향을 받는다.


별자리를 생각한다. 황도 12궁. 양자리, 황소자리, 쌍둥이자리... 물병자리, 물고기자리.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면서 배경이 되는 별자리가 바뀐다. 한 달에 하나씩. 12개월에 12개..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패턴은 있다.

수천 년 동안 반복된 패턴. 특정 시기에 태어난 사람들이 특정 성향을 보인다는 관찰. 동서양을 막론하고.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까




이러한 주기적 패턴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적자생존에 따라 힘센 사람만 살아남을 것이다. 공격적인 성향, 경쟁적인 성향, 지배적인 성향. 이것들이 유리할 것이다. 세대가 거듭될수록 그 성향이 강화될 것이다. 온순한 사람, 사색적인 사람, 예술적인 사람. 이들은 도태될 것이다. 결국 인류 전체가 특정 성향으로 쏠릴 것이다. 획일화. 다양성의 상실. 그리고 멸종. 환경이 변할 때 적응하지 못할 것이다. 단 하나의 성향만으로는 모든 상황에 대처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류는 놀라울 만큼 다양하다. 회복력이 있다. 성격도, 재능도, 선호도, 가치관도. 모두 다르다.


왜? 태양과 달과 행성들과 별자리의 주기적 변화 덕분이다. 1년 내내, 한 달 내내, 하루 종일 다양한 조건에서 사람들이 태어난다.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겨울에도. 초승달에도, 보름달에도, 그믐달에도. 수성이 가까울 때도, 멀 때도. 목성이 상승할 때도, 하강할 때도. 그 결과 자연스럽게 다양한 성향의 사람들이 주기적으로, 질서 있게 분포하게 된다.


사주팔자의 60년 주기를 고려하면 A라는 성향의 사람들이 전멸한다 해도 다시 60년 뒤엔 다시 태어난다.


사주와 별자리는 단순한 운세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가 생명과 존재를 다양하면서도 균형 있게 분배하기 위해 설계한 공감 에너지의 주파수 조정 시스템이다. 마치 라디오가 다양한 주파수의 방송을 송출하듯이, 우주는 다양한 주파수의 생명을 탄생시킨다. 그리고 그 주파수들이 모여 하나의 아름다운 교향곡을 만든다. 인류라는 이름의. 생명이라는 이름의. 우주라는 이름의 교향곡을.


그것이 내 미래를 결정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자유의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성향은 있다. 경향성은 있고 믿는다. 태어날 때 받은 우주의 주파수가 기본 음색을 결정한다.

그 음색을 어떻게 연주할지는 나에게 달려 있다. 아름다운 선율을 만들 수도 있고, 불협화음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음색 자체는 주어진 것이다. 우주가 선물한 것이다.




스킨스쿠버를 할 때 나는 바다의 다양성을 매번 경탄한다. 수심 5미터에서는 작은 열대어들이 무리 지어 헤엄치고, 수심 15미터에서는 거북이가 느긋하게 이동하고, 수심 25미터에서는 가오리가 모래 위를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각자 다른 깊이에서, 다른 속도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간다.


물고기들은 모두 다르다. 크기도, 색깔도, 움직이는 방식도, 먹이도 다르다. 어떤 물고기는 산호 사이를 빠르게 헤엄치고, 어떤 물고기는 바닥에 붙어서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어떤 물고기는 무리를 지어 다니고, 어떤 물고기는 혼자 다닌다. 하지만 모두 조화롭다.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각자의 역할을 한다. 각자의 리듬을 가지고 있다.


만약 바다에 한 종류의 물고기만 있다면 어떻게 될까. 같은 먹이를 먹는 물고기만 있다면 그 먹이는 금방 고갈될 것이다. 같은 깊이에서만 사는 물고기만 있다면 그 공간은 과밀해질 것이다. 생태계는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다양성이 있기 때문에 생태계가 유지된다. 각각의 생물종이 다른 생태적 지위(niche)를 점유하고, 그 결과 전체 시스템이 안정적으로 돌아간다.




인간 사회도 정확히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방식으로 산다면 사회는 무너질 것이다. 모든 사람이 의사가 되려고 한다면 누가 농사를 짓고 누가 집을 짓겠는가. 모든 사람이 외향적이라면 누가 조용히 연구를 하고 책을 쓰겠는가.


조용한 사람이 있고 시끄러운 사람이 있다. 빠른 사람이 있고 느린 사람이 있다. 논리적인 사람이 있고 감성적인 사람이 있다. 이 모든 다양성이 필요하다. 각각의 역할이 있고, 각각의 가치가 있다.


나는 예전에 모든 사람이 나처럼 논리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감성적인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걸까. 왜 감정에 휘둘리는 걸까. 답답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깨달았다. 감성적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세상이 따뜻하다는 것을. 그들이 보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한다는 것을. 그들이 있기 때문에 집단을 유지하고 사회가 돌아간다는 것을


친구 중에 매우 느린 사람이 있다. 결정을 내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예전에는 답답했다. 빨리 결정하면 되는데 왜 그렇게 고민하는 걸까. 하지만 그 친구가 내린 결정은 항상 신중하고 깊이가 있었다. 나는 빠르게 결정하고 때로는 실수한다. 그 친구는 느리지만 실수가 적다. 우리가 함께 있을 때 균형이 잡힌다.


다양성은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준다. 서로의 강점을 더한다.





그런데 왜 유튜브 알고리즘은 다양성을 줄이는가. 왜 SNS는 우리를 특정 방향으로만 몰아가는가. 효율성 때문이다. 알고리즘의 목표는 사용자를 가능한 한 오래 플랫폼에 머물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달성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은 사용자가 좋아할 만한 것만 계속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보수적인 뉴스를 클릭하면 알고리즘은 더 많은 보수적인 뉴스를 추천한다. 내가 진보적인 뉴스를 클릭하면 더 많은 진보적인 뉴스를 추천한다. 알고리즘은 내 클릭률을 최대화하고, 내 체류 시간을 늘리고, 광고 수익을 증가시킨다. 단기적으로는 효율적이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독이다. 다양성을 잃으면 우리는 공감 블랙홀로 빠진다. 한쪽 방향으로만 쏠린 공감은 결국 과잉이 되고, 과잉은 붕괴로 이어진다. 알고리즘은 단기적 효율성을 최적화하지만 장기적 건강성을 해친다.




나는 이것을 의식하고 의도적으로 다양한 콘텐츠를 찾아본다. 내 의견과 다른 글을 읽는다. 불편하다. 때로는 화가 난다. 내 생각과 정반대되는 주장을 보면 본능적으로 반발심이 든다. 하지만 억지로 끝까지 읽는다. 그리고 생각한다. 왜 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 걸까. 무슨 근거가 있는 걸까. 내가 놓친 부분은 없을까.


항상 설득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여전히 내 의견을 유지한다. 하지만 상대방의 관점을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가끔은 내 의견을 수정하기도 한다. "아, 이 부분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구나." 이것이 다양성의 힘이다. 나를 교정해준다. 나를 성장시킨다.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일부러 회의에 초대한다. 불편하다. 의견 충돌이 생긴다. 회의 시간이 길어진다. 하지만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 다양한 관점이 모이면 더 완전한 그림이 그려진다. 내가 보지 못한 위험을 누군가가 지적해준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기회를 누군가가 제안해준다.


한번은 신제품 출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이 제품은 성공할 것이다. 제품은 혁신적이었고 반응도 괜찮았다. 이전에 없었던 완전한 새로운 제품이었다. 하지만 한 팀원이 반대했다. "가격이 너무 비싸요. 일반 소비자들은 이 가격에 구매하지 않을 거예요." 나는 반박했다. "프리미엄 시장을 타깃으로 하는 거니까 괜찮아요. 더 비싸게 팔아도 될 것 같아요" 하지만 그 팀원은 계속 우려를 표현했다. 결국 우리는 두 가지 버전을 준비했다. 프리미엄 버전과 스탠다드 버전.


출시 후 결과는 놀라웠다. 스탠다드 버전이 프리미엄 버전보다 10배나 더 많이 팔렸다. 만약 그 팀원의 반대 의견을 무시했다면 우리는 큰 기회를 놓쳤을 것이다. 다양성이 우리를 구했다.




공감은 왜 다양성을 선택했는가. 이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이제 나는 답을 안다. 단순한 답은 생존이다. 다양성이 있어야 살아남는다. 환경이 변할 때, 위기가 닥칠 때,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때 다양성이 우리를 구한다.


하지만 더 깊은 답은 완전성이다. 다양성이 있어야 완전해진다. 하나의 색으로는 그림을 그릴 수 없다. 하나의 음으로는 음악을 만들 수 없다. 하나의 재료로는 요리를 만들 수 없다. 다양한 색이 모여 그림이 되고, 다양한 음이 모여 음악이 되고, 다양한 재료가 모여 요리가 된다.


존재도 마찬가지다. 다양한 의지와 다양한 반응이 모여 우주가 된다. 만약 우주에 한 가지 종류의 원자만 있었다면 지금 우리가 보는 이 풍요로운 세계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소, 산소, 탄소, 질소, 철, 금 등등 다양한 원소들이 있기 때문에 별도 있고, 행성도 있고, 생명도 있고, 우리도 있다.




나는 40대가 되어서야 이것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20대에는 모든 사람이 나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믿었다. 내 방식이 옳고 다른 방식은 틀렸다고 확신했다. 세상을 흑백으로 나누었다. 옳거나 틀리거나.


30대에는 조금 나아졌다. 다른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이해는 했지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 "네 생각은 이해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아"라는 태도였다.


40대가 되어서야 진정으로 다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들을 때 배운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문화를 접할 때 성장한다는 것을 느꼈다. 다른 방식을 시도할 때 진화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다양성은 불편하다. 혼란스럽다. 때로는 충돌을 일으킨다. 하지만 바로 그 불편함, 혼란, 충돌이 우리를 살아있게 만든다. 획일화된 세상은 편하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방식으로 산다. 갈등이 없고 마찰이 없다. 하지만 죽어있다. 변화가 없고, 진화가 없고, 생명력이 없다.


다양한 세상은 불편하다.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하고 다른 방식으로 산다. 갈등이 있고 마찰이 있다. 하지만 살아있다. 변화가 있고, 진화가 있고, 생명력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생명력이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당신의 삶에는 다양성이 있는가. 이것이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같은 사람들만 만나고 있지는 않은가. 같은 콘텐츠만 소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같은 생각만 반복하고 있지는 않은가.


다양성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알고리즘은 우리를 획일화로 몰아간다. 우리는 의식적으로, 의도적으로 다양성을 선택해야 한다. 불편한 의견을 읽어야 한다. 다른 문화를 경험해야 한다.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


나는 매달 한 권씩 내 생각과 정반대되는 관점의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보수적인 책도 읽고, 진보적인 책도 읽는다.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책도 읽고, 비판하는 책도 읽는다. 쉽지 않다. 때로는 몇 페이지 읽다가 책을 집어던지고 싶을 때도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읽는다. 그리고 매번 무언가를 배운다.




여행을 갈 때도 의도적으로 낯선 곳을 선택한다. 관광지가 아닌 곳, 한국 사람이 별로 없는 곳을 찾아간다. 불편하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음식도 낯설다. 하지만 그 불편함 속에서 성장한다. 다른 방식의 삶을 목격한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회사에서도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과 일하려고 노력한다. 나와 전공이 다른 사람, 나이가 많이 다른 사람, 성격이 정반대인 사람. 처음에는 소통이 어렵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너지가 생긴다. 내가 약한 부분을 상대가 채워주고, 상대가 약한 부분을 내가 채워준다.


공감이 다양성을 선택한 이유를 당신의 삶에서 확인하라. 다양성이 당신을 살게 할 것이다. 다양성이 당신을 완전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다양성이 당신을 진화시킬 것이다.


우주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획일화를 거부하고 다양성을 포용하라고. 하나의 목소리만 듣지 말고 수많은 목소리를 들으라고. 하나의 길만 가지 말고 여러 길을 탐험하라고.


그 메시지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비로소 공감의 진정한 힘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