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세상, 다른 공감

선택적 공감

by kamaitsra

나는 오래 의심해왔다. 공감이 덕목이라는 말을. 공감하라는 말이 넘쳐날수록 오히려 공감의 불평등함이 더 또렷하게 보였다. 같은 뉴스를 보고도 누군가는 눈물을 흘리고, 누군가는 채널을 돌린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가 같은 식탁에 앉아 전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다. 그것이 교육의 차이인지, 경험의 차이인지, 아니면 애초에 다르게 설계된 존재들이 우연히 같은 성씨를 공유하는 것인지. 나는 그 질문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공감이 무차별적이라면, 우리는 왜 이토록 다르게 반응하는가.




어떤 사람은 불평등한 장면에서 심장이 빨라진다. 누군가 억울하게 짓밟히는 것을 보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손이 떨리거나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그런데 그 옆에 서 있는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것을 본다. 그는 그 장면에서 무질서를 읽는다. 규칙이 흔들리고 있다는 신호를. 그래서 그는 강한 통제력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더 강한 권위를 지지한다.


두 사람은 같은 장면을 보고 있다. 그러나 완전히 다른 감각으로.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사람이 덜 착해서인가. 그 사람이 더 이기적이어서인가. 나는 그 설명이 너무 쉽다고 생각한다. 너무 쉬운 설명은 대부분 틀려 있다. 우리가 도덕적 우열로 이 차이를 설명하려는 순간,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쳐버린다. 그 차이가 선택이 아니라 설계라는 것을.




물리학 이야기를 잠깐 하려 한다. 공명이라는 현상이 있다. 어떤 물체는 특정 주파수에서만 진동한다. 그 주파수가 맞아야만 증폭이 일어난다. 맞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외부에서 아무리 강하게 자극해도, 주파수가 일치하지 않으면 그 물체는 반응하지 않는다. 이것이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 물체가 반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나는 이것이 인간의 공감과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닮아 있다기보다는, 같은 원리 위에 놓여 있다고.


원자는 모든 원자와 결합하지 않는다. 전자 껍질의 구조가 맞는 원자끼리만 결합한다. 그 선택은 원자가 하는 것이 아니다. 원자가 태어날 때 이미 결정되어 있다. 어떤 원소와 친해질 수 있는지, 어떤 원소와는 영원히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지. 양자역학의 언어로 말하면, 전자는 허용된 에너지 준위에만 존재할 수 있다. 조건이 맞지 않는 상태는 아예 형성되지 않는다. 자연은 애초부터 선택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이것이 단순한 비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하나의 원리가 여러 층위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고 본다. 물리적 세계에서, 화학적 세계에서, 생물학적 세계에서, 그리고 인간의 내면에서. 자연은 같은 설계도를 다른 언어로 반복해서 쓴다. 선택적 공감은 그 반복의 한 문장이다.




혀에는 미각 수용체가 있다. 단맛을 감지하는 수용체는 단맛에만 반응한다. 쓴맛 수용체는 쓴맛에만 반응한다. 이것은 생존을 위한 설계다. 독성을 가진 물질은 대부분 쓴맛을 낸다. 혀가 쓴맛에 강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된 것은, 위험을 빠르게 감지하기 위해서다. 모든 맛에 동등하게 반응한다면, 독을 먹고 나서야 알게 될 것이다. 선택적 반응이 생사를 가른다.


후각은 더 정교하다. 코 속의 수용체는 자물쇠-열쇠 구조로 작동한다. 특정한 분자 형태를 가진 물질만 그 수용체에 맞아 들어간다. 장미 향기를 맡을 때 활성화되는 수용체는, 땅 냄새나 생선 비린내에는 반응하지 않는다. 수용체는 선택한다. 아니, 선택하도록 만들어져 있다. 우리가 어떤 냄새에서 어머니를 떠올리고, 어떤 냄새에서 공포를 느끼는지. 그것은 코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코의 구조가 먼저 정해놓은 것이다.


면역계는 어떤가. 우리 몸은 자기 세포와 타인의 세포를 구분한다. 자기와 다른 것이 들어오면 제거한다. 그 정확도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자가면역 질환이 생긴다. 자기 세포를 적으로 인식하고 공격하기 시작한다. 구분이 무너지면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다. 면역은 선택적 공감의 신체적 형태다. 어디까지를 나로 볼 것인가, 어디서부터를 타자로 볼 것인가. 그 경계가 생명을 유지한다.


식물조차도 선택적이다. 엽록소는 적색광과 청색광을 흡수하고 녹색광을 반사한다. 그래서 식물은 녹색으로 보인다. 식물이 녹색광을 싫어해서가 아니다. 그 파장이 광합성에 효율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식물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빛에 반응할지 결정되어 있다. 여름 숲속에서 잎사귀가 햇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을 보면, 우리는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 뒤에는 치열한 선택이 있다. 어떤 빛을 받아들이고 어떤 빛을 흘려보낼 것인가의 결정.


새끼 오리는 태어난 직후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을 어미로 각인한다. 그 순간이 지나면 다른 대상으로 각인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있다. 창이 열렸다가 닫힌다. 그 창이 열려 있는 시간 동안 특정한 자극에만 반응하도록, 존재가 세팅되어 있다. 박쥐는 인간이 듣지 못하는 초음파로 세계를 읽는다. 개는 인간보다 훨씬 넓은 주파수 범위를 듣는다. 종마다 다른 청각 범위를 갖는다는 것은, 종마다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같은 공간이지만 다른 자극에 반응하면서.


DNA와 단백질 합성도 마찬가지다. 특정 코돈은 특정 아미노산만 불러온다. A와 T, G와 C. 정해진 쌍만 결합한다.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언어부터가 선택적이다. 생명은 선택적 코드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




인간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 백지라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적어도 완전한 백지는 아니다.


어떤 아이는 질서가 무너질 때 불안해한다.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유독 긴장하고, 그 긴장이 몸에서 먼저 온다. 어깨가 굳어지고, 식욕이 줄고, 잠을 못 잔다. 어떤 아이는 누군가 소외되는 장면에서 먼저 알아챈다. 교실 구석에서 혼자 앉아있는 아이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같은 아이다. 어떤 아이는 경쟁하는 상황에서 눈이 빛난다.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단순한 즐거움이 아니라 존재의 확인처럼 느껴지는 아이. 어떤 아이는 누군가 위험에 처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몸이 앞으로 나간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이것들이 교육의 결과라고 보기엔 너무 이르다. 아직 아무것도 배우지 않은 나이에도 이 차이들은 존재한다. 기질이라는 단어가 있다. 나는 그것이 공감의 초기 세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자극에 강하게 반응하도록, 어떤 주파수에 공명하도록 태어난 설계.


수정된 공감 공식이 있다. E = W × R(f). 여기서 E는 공감의 강도, W는 자극의 무게, R은 반응이다. 그런데 R은 필터링된 반응이다. f는 주파수, 구조 일치, 거리, 반복성, 생존 효율성의 함수다. 공감은 단순한 반응이 아니다. 공감은 필터를 통과한 반응이다. 그리고 그 필터는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세팅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이 평등에 극도로 민감한 것은, 그가 더 착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 수 있다. 그가 그 주파수에서 태어났기 때문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질서와 위계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그가 권위적이거나 나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 수 있다. 그는 안정과 구조가 무너지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설계된 것일 수 있다.


이것이 불편하다면, 그 불편함을 잠깐 들여다보는 것이 좋다. 우리는 오래 도덕을 선택의 문제로 보아왔다. 착한 것을 선택하는 사람, 나쁜 것을 선택하는 사람. 그러나 만약 공감 자체가 선택이 아니라 설계라면, 우리는 도덕을 어디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할까. 나는 이것이 도덕을 부정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공감의 기본값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안 된다. 선천적 설계가 전부라는 말도 너무 쉬운 답이다.


공감은 가소성이 있다.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반응의 범위가 달라진다. 처음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던 자극에도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열리기 시작한다.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오래 살다 보면,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지던 그들의 가치가 어느 순간 조금 다르게 보인다. 완전히 공감하지 못해도,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게 된다. 그것도 일종의 확장이다. 주파수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 아니라, 감지할 수 있는 범위가 조금 넓어지는 것.


반대 방향도 있다. 트라우마는 공감을 닫는다. 깊이 다친 사람은 특정한 자극에 과잉 반응하거나, 혹은 아예 반응을 차단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존재가 스스로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공감의 왜곡은 악함이 아니라 상처의 흔적일 때가 많다. 차갑게 느껴지는 사람의 뒤에 얼마나 많은 열기가 억눌려 있는지, 우리는 쉽게 모른다.


편향이 강화되는 방식도 있다. 자신의 공감 패턴을 강화하는 정보만 계속 받아들이면, 기본값은 더 단단해지고 좁아진다. 극단주의는 종종 이렇게 만들어진다. 처음부터 좁게 설계된 사람이 더 좁아지는 것. 그리고 그 좁음 안에서 자신이 가장 잘 보인다고 착각하는 것.


기본값은 있지만 완전히 고정되지는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조건이다. 설계되어 있지만 완전히 결정되지는 않은. 그 사이의 공간이 아마도 자유의 자리일 것이다.




운명이 왜 어느 정도 정해지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나는 이것이 공감의 집중과 관련 있다고 본다.


어떤 주파수에서 강하게 공명하는 존재는, 그 방향으로 계속 끌린다. 특정한 자극에 민감한 사람은 그 자극이 가득한 환경을 선택하고, 그 환경이 또 그의 반응을 강화하고, 그 강화된 반응이 다시 그의 선택을 이끈다. 재능이라고 불리는 것이 어쩌면 이것이다. 재능은 능력이 아니라 공명이다. 그 주파수에서 더 많이 울리도록 태어난 것.


직업도 그렇고, 신념도 그렇고, 사랑도 아마 그럴 것이다. 어떤 존재와 공명하는가. 그것이 삶의 방향을 만든다. 의지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공명이 먼저 일어나고 나서야 의지가 따라오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이미 끌린 뒤에 이유를 붙인다. 그 이유가 합리적으로 들리도록 편집하면서.


나는 이것이 숙명론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만 겸손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완전히 만들었다는 오만에서 한 발 물러서는 것.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내 의지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이 사람의 주파수와 내가 공명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는 것.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사실일 수 있다.




왜 공감 유형이 하나가 아닌가. 왜 인간은 이토록 다양한 방향으로 설계되어 있는가.


만약 모두가 평등에 민감하다면 무슨 일이 생길까. 모두가 규칙을 무시하고 느낌에 따라 움직이는 세계는 무질서하다. 반대로 모두가 질서에 민감하다면, 권력은 영원히 도전받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경쟁에 흥분한다면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모두가 타인을 보호하는 데만 집중한다면 발전이 멈춘다. 어느 하나가 지배적인 세계는 오래가지 않는다.


시스템은 균형을 요구한다. 안정을 추구하는 집단과 변화를 추구하는 집단이 동시에 존재해야 한다. 현재를 지키는 사람들과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이 같은 공간 안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충돌을 만들지만, 그 충돌이 붕괴를 막는다. 충돌이 없는 사회는 정지된 사회다.


8대 2라는 법칙이 있다. 다수는 안정을 지향하고 소수는 변이를 향한다. 진화의 언어로 말하면, 소수의 변이가 환경이 바뀌었을 때 종을 살린다. 모두가 같다면 한 번의 충격으로 전멸할 수 있다. 다양성은 사치가 아니다. 다양성은 생존 전략이다. 우리가 서로 달라서 불편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 달라서 함께 살아남는다.


MBTI가 유행하는 것이 단순한 심리 테스트에 대한 관심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것이 "나는 왜 저 사람과 다른가"에 대한 답을 찾고 싶은 욕구라고 생각한다. 내가 틀린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안도. 저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안도. 우리가 다르게 설계되어 있다는 것의 확인. 그 확인이 관계를 조금 덜 외롭게 만든다. 선천적 공감 유형을 확인하는 것은 자기 면죄부가 아니라, 타인을 읽는 더 정직한 언어를 얻는 것이다.




가족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같은 집에서 자랐는데 왜 이토록 다른가. 이것이 가족 내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다.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고, 같은 텔레비전 앞에 앉았는데. 왜 한 사람은 그 장면에서 감동을 받고, 다른 사람은 무감각하게 넘어가는가.


어떤 가족 안에는 안정형이 있다.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재를 유지하는 데서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 그리고 도전형이 있다. 새로운 것에 흥분하고 현재를 깨는 것에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사람. 관계형은 모두가 어떻게 느끼는지에 집중하고, 성취형은 무엇을 이뤄냈는지에 집중한다.


이들이 같은 식탁에 앉으면 충돌이 생긴다. 안정형은 도전형이 무모하다고 느끼고, 도전형은 안정형이 겁쟁이라고 느낀다. 관계형은 성취형이 냉정하다고 느끼고, 성취형은 관계형이 비효율적이라고 느낀다. 가족 안에서 가장 자주 다투는 두 사람이 사실 서로를 가장 필요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것을 아는 데 너무 오래 걸린다.


이 충돌이 오류인가. 나는 오히려 이것이 설계라고 생각한다. 한 가족 안에서도 시스템은 균형을 원한다. 모두가 같은 방향이면 그 가족은 한 번의 위기로 무너진다. 다양한 공감 유형이 있어야 다양한 상황에서 누군가는 옳은 반응을 할 수 있다. 충돌은 오류가 아니다. 충돌은 보완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밥상 앞에서 쌓였던 오래된 오해들이 조금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나는 사회를 거대한 공감 네트워크로 본다. 질서를 원하는 공감, 자유를 원하는 공감, 평등을 원하는 공감, 효율을 원하는 공감. 이것들이 각각의 축을 형성하고 서로 당기고 밀면서 사회가 움직인다.


어느 하나가 완전히 이기면 문제가 생긴다. 질서만 남으면 독재다. 자유만 남으면 혼돈이다. 평등만 남으면 획일화다. 효율만 남으면 인간이 도구가 된다. 다양한 공감 유형의 긴장이 사회를 살아있게 만든다. 정치적 갈등을 나는 이 관점에서 본다. 진보와 보수의 다툼이 선과 악의 싸움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공감 주파수를 가진 집단들이 사회를 어느 방향으로 끌어야 하는지에 대해 갈등하는 것이다. 둘 다 틀리지 않을 수 있다. 둘 다 옳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둘 다 필요할 수 있다.


모두가 맞을 수는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공감 필터가 다르기 때문에, 같은 현실을 보면서도 다른 것을 읽는다. 부분적으로 일치하고 부분적으로 불일치한다. 이것이 오류가 아니라 정상 구조다. 우리가 완전히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착각할 때, 가장 큰 오해가 생긴다. 그 착각이 분노를 만든다. 왜 저 사람은 이것을 모르는가. 왜 저 사람은 이렇게도 명백한 것을 보지 못하는가. 명백한 것은 없다. 각자에게 명백한 것이 있을 뿐이다.




선택적 공감은 존재의 기본 설계다.


우리는 특정한 자극에 공명하도록 태어났다. 어떤 주파수에서 살아나고, 어떤 주파수에서는 조용히 있도록. 그 방향성은 자연이 오랫동안 검증한 효율성의 결과다. 미각 수용체가 독을 감지하고, 면역계가 이물질을 구분하고, 새끼 오리가 어미를 각인하듯이. 선택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존재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인간의 공감 유형이 다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양한 방향으로 공명하는 존재들이 함께 있을 때, 시스템은 하나의 방향만 있을 때보다 훨씬 강하다. 다양성은 붕괴 방지 장치다. 우리가 다르게 태어난 것은 서로를 괴롭히기 위함이 아니라, 함께 더 잘 살아남기 위함이다.


모두가 맞을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누군가가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공감의 필터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본다는 말이다. 공존은 동일함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공존은 서로가 다른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멈출 수가 없다. 이 모든 설명이 맞다 해도,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이 남는다.


선택적으로 공감하도록 설계된 존재가, 자신의 설계를 넘어서는 공감을 할 수 있는가. 주파수가 맞지 않는 타인을 향해, 자신의 수용체가 반응하지 않는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능한가.


나는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쉽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스럽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설계를 거스르는 일이고, 그래서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다른 동물들은 설계에 충실하게 살아간다. 인간만이 설계를 알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려 한다.


설계를 알고도, 설계를 넘어서려 하는 것. 공명하지 않는 곳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는 것.


그것이 도덕인지, 아니면 또 다른 설계의 발현인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