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정말 변했을까?

선천적, 후전적 공감에너지장의 진실

by kamaitsra

나는 오래 이 질문을 피해왔다. 사람은 변하는가, 라는 질문을. 너무 오래된 질문이라서,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자신 있게 답해왔기 때문에, 나는 그 질문 자체가 좀 지겨웠다. 그런데 어느 날 배우 조진웅에 관한 기사를 읽다가 다시 그 질문 앞에 섰다. 어린 시절의 문제 이력이 언급되어 있었고, 댓글창은 예상대로였다.

"역시 사람은 안 변해."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 밑에 또 다른 댓글들이 있었다.


"그래도 지금은 다르지 않나?"


"지금의 그는 충분히 증명했다."


나는 그 댓글창을 한참 읽었다. 같은 사람을 두고, 같은 사실을 앞에 놓고, 전혀 다른 판단이 나란히 달려 있었다. 이상한 것은, 어느 쪽도 틀린 것 같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것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라는 것을.


사람은 변하는가. 아니면 본성은 그대로인가.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묻고 싶다. 우리가 '변한다'고 말할 때, 정확히 무엇이 변한다고 생각하는가.




인간은 백지로 태어나지 않는다. 이것을 나는 꽤 오래 믿어왔다. 그런데 그것을 '믿는다'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이미 이상하다. 사실이 믿음의 언어로 표현될 때, 우리는 보통 그것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백지라는 환상이 더 공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출발한다는 이야기가, 도덕적으로 더 깨끗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냄새를 맡아보면 안다. 갓 태어난 아이들조차 다르다. 어떤 아이는 낯선 소리에 몸 전체가 굳고, 어떤 아이는 같은 소리에 고개를 돌릴 뿐이다. 어떤 아이는 배고픔을 온몸으로 울부짖고, 어떤 아이는 조용히 칭얼거리다 잠든다. 이 차이는 며칠 된 아이에게서도 이미 눈에 보인다. 교육이 시작되기 전부터, 경험이 쌓이기 전부터, 그 아이는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세계에 반응한다.


나는 이것을 선천적 공감에너지장이라고 부르고 싶다. 거창한 이름처럼 들릴 수 있는데, 사실은 단순한 개념이다. 태어날 때 이미 어떤 자극에 강하게 반응하고, 어떤 자극에는 조용히 있도록 세팅된 기본 진동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감정 강도가 유독 높다. 기쁨도 크고 분노도 크고 슬픔도 깊다. 어떤 사람은 충동이 빠르다. 생각하기 전에 몸이 먼저 움직인다. 어떤 사람은 인정 욕구가 강하게 태어난다. 타인의 시선이 피부에 닿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떤 사람은 위험 앞에서도 심장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들은 삶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삶이 시작되기 전부터 세팅되어 있던 것이다.


행동유전학은 이것을 오래 연구해왔다. 쌍둥이 연구들은 반복적으로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공감 능력의 개인차, 충동 조절 능력의 개인차, 정서 반응의 강도 차이가 상당 부분 유전적 기반을 가진다는 것. 2018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사이먼 배런-코헨 팀은 공감 지수와 유전자의 관계를 분석하며 공감의 방향성과 민감도가 부분적으로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보고했다. 그러나 나는 그 논문보다, 어떤 아이가 넘어진 친구를 보자마자 자기도 모르게 달려가는 장면이 더 설득력 있다고 느낀다. 그 아이는 그렇게 하라고 배운 것이 아니다. 그냥 그렇게 반응하도록 태어났다.




그렇다면 이 선천적 공감에너지장은 왜 쉽게 변하지 않는가.


나는 자연의 8대 2 법칙을 자주 생각한다. 집단 안에서 다수는 안정을 지향하고 소수만이 변이를 향한다. 이것은 사회적 현상이 아니라 자연의 기본 구조다. 진화의 언어로 말하면, 급격한 변화는 시스템을 무너뜨린다. 안정성이 생존의 기본 조건이다. 그래서 선천적 공감에너지장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것이 약 80퍼센트의 코어로 남는다.


그런데 이 코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우리는 '변한다'는 것을 코어가 교체되는 것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예전의 나는 사라지고 완전히 다른 내가 들어서는 것. 그러나 그런 변화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다면 그것은 변화가 아니라 붕괴에 가깝다.


코어는 남는다. 그러나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여기서 나는 잠깐 멈춘다. 왜냐하면 이 지점이 가장 많이 오해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코어가 남는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반응한다. "그러니까 사람은 안 변한다는 거잖아." 그런데 그것은 정확하지 않다. 코어가 남는다는 것과, 그 코어가 항상 같은 방향으로 발현된다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물이 담긴 용기를 생각해보자. 물의 양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물이 어디로 흐르는지는, 용기의 모양에 따라 완전히 달라진다. 같은 양의 물이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각진 형태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원형이 된다. 물의 본질은 그대로인데, 형태는 전혀 달라진다.


선천적 공감 코어는 물의 양이다. 후천적 공감에너지장은 그 물이 담기는 그릇이다.


후천적 공감에너지장은 반복 경험이 만든 공감의 관성이다. 책임을 배우는 경험, 타인의 고통을 가까이서 목격하는 경험, 직업적 훈련, 사회적 인정과 지지, 그리고 충분히 긴 반성의 시간. 이 반복들이 기본 공감 진동 위에 새로운 층을 만든다. 80퍼센트의 코어 위에 20퍼센트의 방향이 더해지는 것이다.


그 20퍼센트가 작아 보일 수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총기의 방향이 1도만 달라져도 총알이 도달하는 곳은 완전히 달라진다. 방향의 변화는 작아도, 그 결과의 차이는 크다.




조진웅으로 돌아가자. 나는 그를 개인적으로 모른다. 그러나 그를 둘러싼 논란의 구조는 안다.


어린 시절의 문제 이력이 있다. 그 시절, 그는 강한 선천적 공감 진동을 가지고 있었고, 그 진동이 거칠게 발현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감정 강도가 높은 사람, 충동이 빠른 사람, 인정 욕구가 강한 사람이 이성적 조율 능력이 아직 발달하지 않은 시기를 통과할 때, 그 원형의 에너지는 날카롭게 튀어나온다. 그것은 본성이 나쁜 것이 아니라, 방향을 조율하는 층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이다.


신경과학의 언어로 말하면, 전전두엽은 20대 중반까지 완전히 성숙하지 않는다. 충동 조절, 감정 조율, 장기적 결과 예측. 이 모든 것이 전전두엽의 기능이고, 청소년기에는 이 기능이 아직 불완전하다. 강한 공감 에너지가 조율되지 않은 채 발현되는 것이, 뇌 발달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예측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이후 삶이 달라진다.


배우라는 직업은 특이한 직업이다. 타인의 감정 안으로 반복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살인자의 내면을 이해해야 하고, 희생자의 공포를 몸으로 느껴야 한다. 이 훈련은 공감의 범위를 강제로 확장한다. 일상적 삶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감정의 영역들을 직업적으로 반복 경험한다. 대중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도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행동이 공공의 맥락 안에서 해석된다는 인식은, 책임감의 층을 만든다.


그의 선천적 코어가 사라진 것이 아니다. 강한 감정 진동, 높은 충동성, 강한 인정 욕구. 이것들은 아마 지금도 그 안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위에 후천적 공감에너지장이 형성되었다. 그 에너지가 어디로 흘러야 하는지를 배운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혼란을 느끼는 것이다. 과거의 그와 현재의 그가 동시에 사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을 하나의 시점으로 고정하고 싶어한다. 과거를 보면 "본성은 안 변한다"고 말하고, 현재를 보면 "사람은 변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공감이론은 둘 다 맞다고 본다. 코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현 방향은 바뀌었다. 이 두 문장이 모순처럼 들리는 것은, 우리가 변화를 교체로 상상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교체가 아니다. 변화는 방향의 조율이다.




이 구조를 이해하면, 타인을 보는 방식이 달라진다.


어떤 사람의 거친 행동을 볼 때, 우리는 그것을 그 사람의 전부로 읽는다. 그것이 그의 본성이라고 결론 내린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선천적 공감 코어가 후천적 조율 없이 날것으로 드러난 것일 수 있다. 코어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코어를 담는 그릇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지금 매우 온화하고 배려 깊게 행동할 때, 우리는 그것이 그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온화함은 강한 선천적 에너지가 오랜 시간 조율된 결과일 수 있다. 그 안에 여전히 강한 진동이 있다. 다만 그 진동이 지금은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볼 때, 두 층을 함께 보는 것이 필요하다. 선천적 코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코어가 어떤 후천적 공감에너지장 위에서 발현되고 있는지. 이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을 때, 우리는 타인에 대해 조금 더 정확하고 조금 더 따뜻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신경과학자 리처드 데이비슨은 수십 년간의 명상 수련자들의 뇌를 연구하며, 감정 조절과 공감 능력이 훈련을 통해 실질적으로 변화할 수 있음을 보였다. 전전두엽과 편도체의 연결이 강화되고, 감정적 반응의 강도가 조율된다. 이것이 후천적 공감에너지장이 뇌 수준에서 실재한다는 증거다. 코어의 에너지는 남지만, 그 에너지를 조율하는 회로가 발달한다.


그리고 반대 방향도 있다. 트라우마는 이 조율 회로를 손상시킨다. 깊이 다친 사람은 자신의 선천적 코어를 더 이상 조율하지 못하게 된다. 그것은 의지의 부재가 아니라, 조율 능력 자체가 손상된 것이다. 그래서 트라우마를 입은 사람의 거친 반응을 도덕적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부러진 다리로 달리지 못하는 사람을 게으르다고 나무라는 것과 같다.




80퍼센트와 20퍼센트. 이 숫자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사람마다 다를 것이고, 상황마다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구조가 말하는 핵심은 분명하다. 인간은 완전히 변하지 않으면서도 달라질 수 있다. 코어는 유지되지만, 방향은 바뀔 수 있다. 그리고 그 방향을 바꾸는 것이, 삶이 우리에게 주는 가능성이다.


나는 이것이 희망적인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완전한 변화를 요구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의 강한 진동, 나의 충동, 나의 날카로움이 사라져야 내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 진동을 담는 그릇을 만들어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삶을 통해 하는 일이다.


그것이 교육이고, 관계이고, 반성이고, 직업이고, 사랑이다. 우리는 코어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코어가 흐르는 방향을 조율하는 그릇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긴다.


나는 내 선천적 공감 코어를 알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떤 후천적 공감에너지장을 만들고 있는가. 내가 타인을 판단할 때, 나는 그의 80퍼센트와 20퍼센트를 구분하여 보고 있는가. 아니면 눈앞에 보이는 발현만을 그의 전부로 읽고 있는가.


사람은 변하는가, 라는 질문에 나는 이제 이렇게 답하고 싶다.


코어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방향은 바뀐다. 그리고 그 방향을 바꾸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다만 그것이 충분한 시간과 충분한 경험을 요구한다는 것. 그 시간을 기다릴 줄 아는 것이, 타인을 이해하는 첫 번째 조건이라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에게 충분히 그 시간을 주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