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적 공감에너지장과 후천적 공감에너지장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히틀러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히틀러가 되었을까.
불편한 질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런데 이 질문을 불편하다고 피해버리면, 우리는 인간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된다. 그가 그렇게 된 것이 순전히 그의 내면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그가 서 있던 자리, 그가 숨 쉰 시대, 그가 반복적으로 노출된 환경이 그를 만든 것인지. 나는 이 질문 앞에서 오래 멈춘다.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의 독일은 냄새가 났을 것이다. 패배의 냄새, 굴욕의 냄새, 가난의 냄새. 초인플레이션이 절정이던 1923년, 독일에서는 빵 한 덩어리가 1000억 마르크였다. 어제의 저축이 오늘 아침 휴지 조각이 되는 세계. 그 세계에서 사람들은 분노할 대상이 필요했고, 희망을 약속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히틀러의 연설이 광장을 가득 채울 때, 그 소리는 단순한 정치적 수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집단적 상처가 공명하는 주파수였다.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유튜브 채널을 운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스타트업 창업자가 되었을지도. 극단적 카리스마와 대중을 읽는 감각, 강렬한 인정 욕구. 그 에너지가 어디로 흘렀을지는, 그가 어떤 시대의 공기를 마셨느냐에 달려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람을 너무 쉽게 그 사람 자체로만 본다. 성격이 나쁜 것이라고, 의지가 약한 것이라고, 원래 그런 사람이라고. 그런데 나는 그 설명이 너무 빨리 끝난다고 느낀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그렇게 홀로 완성되지 않는다.
회사원이 "왜 회사는 이렇게 일을 시키지?"라고 말하다가, 대표가 되면 "회사를 살리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봤다. 그 사람이 위선자가 된 것이 아니다. 그가 서 있는 자리가 달라진 것이다. 책임져야 할 대상이 달라지면, 공감해야 할 방향이 달라진다. 그것은 배신이 아니라, 자리가 만들어내는 필연이다.
경찰과 시민이 같은 시위 현장에서 전혀 다른 것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시민은 진압의 폭력성을 보고, 경찰은 질서 붕괴의 위험을 본다. 둘 다 같은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둘이 서 있는 자리가 다르고, 그 자리가 요구하는 공감의 방향이 다르다. 나쁜 사람과 좋은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자리의 문제다.
시대도 마찬가지다. 나는 기성세대를 오해했던 때가 있다. 왜 그렇게 버티는 것에 집착하는지, 왜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지, 왜 개인의 행복보다 조직의 생존을 먼저 말하는지. 한동안 그것이 낡은 사고방식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들이 살아온 시간의 질감을 조금씩 알게 되면서, 나는 달라졌다. 전쟁 직후의 한국에서 태어나 절대적 빈곤 속에서 자란 사람에게, 생존은 추상적 가치가 아니었다. 매일 아침 밥상에 무언가 있다는 것이 기적이었던 시대. 그 시대를 몸으로 통과한 사람이 "버텨라"고 말할 때, 그것은 냉혹한 조언이 아니라 생존한 자의 진심이다.
MZ세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안정보다 의미를 먼저 말할 때도 같은 구조다. 그들은 절대적 빈곤을 경험하지 않은 세대다. 어느 정도의 물질적 조건이 갖춰진 환경에서 태어났고, 다양한 삶의 방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면서 자랐다. 그래서 그들에게 의미 없는 안정은 느껴지는 것이 다르다. 빈 그릇을 채우는 것과 이미 채워진 그릇의 내용물을 바꾸는 것은, 같은 행위가 아니다.
두 세대가 충돌할 때, 그것은 도덕의 충돌이 아니다. 서로 다른 시대가 만들어낸 공감의 층이 부딪히는 것이다.
환경도 사람을 만든다. 치열한 경쟁 환경에서 성장한 사람은 경쟁을 세계의 기본 문법으로 받아들인다. 그것이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 환경이 반복적으로 그에게 가르친 것이다. 살아남으려면 앞서야 한다. 그 가르침이 피부에 스며든 사람이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냉소가 아니라 그가 공감해온 세계의 언어다.
협력 중심의 환경에서 자란 사람은 다른 언어를 쓴다. "함께 가야 한다"는 말이 그에게는 공기처럼 자연스럽다. 그는 경쟁을 강조하는 사람을 이기적이라고 느끼고, 경쟁을 강조하는 사람은 그를 순진하다고 느낀다. 둘 다 자신이 반복적으로 공감해온 환경의 논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단순해질 위험이 있다. 자리, 시대,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면, 우리는 모두 환경의 산물에 불과한가. 똑같은 조건이면 똑같은 사람이 나오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는 매일 그 반례를 목격한다.
같은 가난을 경험하고도 누군가는 나눔의 사람이 되고, 누군가는 결핍을 채우는 데만 집중하는 사람이 된다. 같은 경쟁 환경에서 자라도 누군가는 협력의 가치를 더 강하게 느낀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어떤 이는 변화를 갈망하고 어떤 이는 안정을 원한다. 환경이 같아도 반응이 다르다.
이것이 선천적 선택적 공감의 층이 작동하는 지점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떤 자극에 강하게 반응하도록 세팅된 기본 진동을 가지고 있다. 조너선 하이트는 도덕의 기원(The Righteous Mind)에서 인간의 도덕 판단이 여섯 가지 기초 위에 놓여 있다고 했다. 배려, 공정, 충성, 권위, 고귀함, 자유. 그리고 사람마다 이 여섯 가지에 부여하는 가중치가 다르다고 했다. 진보적 성향의 사람은 배려와 공정에 강하게 반응하고, 보수적 성향의 사람은 충성과 권위에도 강하게 반응한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어떤 도덕적 주파수에 공명하도록 태어났는가의 문제다.
어떤 사람은 불평등한 장면에서 심장이 빨라진다. 어떤 사람은 같은 장면에서 무질서의 신호를 읽는다. 같은 뉴스를 보고 한 사람은 눈물을 흘리고 다른 사람은 채널을 돌리는 것이, 공감 능력의 차이가 아니라 공명하는 주파수의 차이다.
이 두 층이 함께 작동한다. 선천적으로 세팅된 공감의 방향이 있고, 그 위에 자리와 시대와 환경이 만들어내는 후천적 공감의 층이 쌓인다.
정치적 갈등을 예로 들면 더 분명해진다. "안정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사람과 "변화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충돌할 때,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 입장의 차이가 아니다. 한쪽은 질서와 안정에 강하게 공명하도록 태어나 그것을 강화하는 환경과 시대를 통과한 것이고, 다른 쪽은 공정과 변화에 강하게 공명하도록 태어나 그것을 강화하는 경험을 해온 것이다. 두 층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남녀 갈등도 같은 구조로 읽힌다. 같은 사건을 보고 남성과 여성이 다르게 반응하는 것은, 서로 다른 환경과 경험이 만들어낸 공감의 층이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자극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반복적으로 훈련되어 왔는가. 그 차이가 같은 장면에서 다른 것을 읽게 만든다. 누가 틀린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공감의 층을 가지고 같은 세계를 보고 있는 것이다.
학생일 때 세상을 쉽게 비판하다가 사회에 나온 뒤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말하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학생의 자리는 책임보다 관찰이 더 넓다. 그 자리에서는 이상을 기준으로 현실을 판단하기 쉽다. 직장에 들어가고 가족을 부양하고 조직 안에서 책임을 지기 시작하면, 공감해야 할 대상이 달라진다. 이상이 현실과 마찰을 일으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타협이 아니라, 공감의 반경이 넓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단정하기 전에, 잠깐 멈추는 것이 필요하다.
저 사람은 왜 저럴까, 라는 질문 앞에서. 저 사람이 서 있는 자리를 먼저 보는 것. 저 사람이 살아온 시대의 공기를 먼저 느껴보는 것. 저 사람이 반복적으로 노출되어온 환경을 먼저 상상해보는 것. 그리고 그 위에, 그 사람이 어떤 주파수에 공명하도록 태어났는지를 생각해보는 것.
이것이 불가능한 이해처럼 들릴 수 있다. 모든 사람의 배경을 다 알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나는 그 이해가 완전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완전하지 않아도 된다. 저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자리와 시대와 환경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그를 지금의 그로 만들었다는 것을 그냥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판단은 조금 느려진다. 판단이 느려지는 만큼, 이해가 조금 더 들어올 공간이 생긴다.
인간은 완전히 같지도, 완전히 다른 존재도 아니다. 선천적으로 세팅된 공감의 방향 위에, 자리와 시대와 환경이 만들어낸 공감의 층이 쌓인다. 그 두 층이 만나는 방식이 그 사람이다.
히틀러가 지금 시대에 태어났다면 히틀러가 되었을까.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 질문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그 불편함을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왜 불편한가. 인간이 환경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것이 무섭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다른 자리에, 다른 시대에, 다른 환경에 놓였다면 지금의 나와 달랐을 수 있다는 것이 불편하기 때문인가.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공감해온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아직 그 이해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가장 오래 함께한 사람들에 대해서도. 나는 그들이 서 있던 자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본 적이 있는가. 그들이 살아온 시대의 냄새를 얼마나 맡으려 했는가.
그 질문이 나를 오래 붙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