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천재이고 꼰대는 왜 탄생할까

선택적 공감

by kamaitsra

가끔 엘레베이터에서 혹은 산책하면서 아기를 본다. 그들은 나와 눈을 마주치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하루 중에도 눈길 한번 받아보기 힘든 세상에서 아기의 눈빛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그런지 아기에 대해 더욱 관찰하기 시작한다. 아기는 너무 많은 것에 반응한다. 천장의 그림자에 반응하고, 바람 소리에 반응하고, 낯선 사람의 표정에 반응하고, 손에 닿는 모든 질감에 반응한다. 그 반응의 순수성이 높다. 공감한다. 지칠 줄 모르는 끝없는 공감이다.


아기는 아직 세상에서 무엇을 무시해야 할지 배우지 않은 존재다. 모든 것이 처음이고, 모든 것이 자극이고, 모든 것이 반응을 요구한다. 이미 많은 공감의 문을 닫아버린 나는 그 상태가 피곤해 보이면서도, 동시에 가장 살아있는 상태처럼 보인다. 나는 그것이 왜인지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이 질문이 남았다. 나는 언제부터 특정한 것에만 반응하기 시작했는가. 언제부터 어떤 것은 보고도 지나치고, 어떤 것은 보자마자 심장이 반응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은 내가 선택한 것인가, 아니면 시간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인가.




우리 주변에는 꼰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이 단어를 경멸의 언어로 사용하려는 것이 아니다. 꼰대라는 현상이 흥미롭기 때문에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꼰대의 특징은 단순하다. 새로운 것을 만났을 때 새로운 반응을 만들어내는 대신, 이미 가지고 있는 반응으로 판단한다.


"원래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내가 살아보니 말이야."


나는 이 말들이 경험에서 나오는 지혜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이 말들은 경험이 많은 것의 표현이 아니라, 새로운 자극에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상태의 표현이다. 공감이 고착된 상태. 세상이 변하고 있는데, 그 변화를 감지하는 안테나가 더 이상 새로운 주파수를 잡지 못하는 상태.


아기와 꼰대. 이 두 존재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신경과학에는 시냅스 가지치기(Synaptic Pruning)라는 개념이 있다. 아기의 뇌는 태어날 때 어마어마한 수의 신경 연결을 가지고 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태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자주 사용되지 않는 연결은 제거되고, 자주 사용되는 연결은 강화된다. 이것이 학습의 신경학적 기반이다.


이 과정은 효율적이다. 모든 연결을 유지하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 자주 쓰이지 않는 연결을 제거함으로써 뇌는 에너지를 절약하고, 자주 쓰이는 회로를 더 빠르고 강하게 만든다. 아기가 그토록 빠르게 학습하는 것은 이 가지치기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아직 어떤 연결이 중요하고 어떤 연결이 중요하지 않은지 결정되지 않은 상태, 그래서 모든 것에 반응하는 상태.


나는 이것이 공감의 신경학적 기반이라고 생각한다. 아기가 모든 것에 공감하는 것은 아직 어떤 것에 공감해야 하는지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반복적으로 반응한 것들이 강화되고, 반응하지 않은 것들은 점점 희미해진다.


이것이 내가 선택적 공감이라고 부르는 것의 신경학적 기초다.




선택적 공감은 이렇게 작동한다. 모든 것에 반응하는 상태에서 시작해서, 반복된 반응이 특정 방향으로 굳어지는 상태로 이동한다. 그 굳어진 방향이 그 사람의 공감 패턴이 된다.


새로운 도시로 이사한 첫날을 기억하는가. 모든 것이 낯설다. 골목의 냄새도 낯설고, 버스 노선도 낯설고, 슈퍼마켓의 배치도 낯설다. 그 낯섦이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다. 매일 지나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면 달라진다. 골목의 냄새는 더 이상 의식되지 않고, 버스 노선은 자동으로 몸이 알고, 슈퍼마켓은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다. 낯섦이 사라지면서 감각도 함께 무뎌진다.


이것이 적응이다. 그런데 나는 이 적응이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응은 공감의 반복이 선택적 공감으로 굳어지는 과정이다.


처음에 낯선 골목에 반응할 때, 그것은 새로운 공감의 시도다. 그 반응이 반복되면 익숙해진다. 익숙함이 쌓이면 그 자극은 더 이상 강한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다. 에너지가 절약된다. 효율적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골목에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 선택적 공감이 형성된 것이다.




콘라트 로렌츠의 각인(Imprinting) 연구가 여기서 다시 등장한다. 새끼 오리는 태어난 직후 특정 시간 안에 처음 본 움직이는 대상을 어미로 각인한다. 그 창이 닫히면 다른 대상으로 교체되지 않는다. 로렌츠는 이것이 결정적 시기(Critical Period)에만 작동하는 메커니즘이라고 설명했다. 공감의 가능성이 최대로 열려 있는 시기에, 특정 자극이 영구적인 반응 패턴으로 고정되는 것이다.


인간도 이와 유사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심리학자 존 볼비의 애착 이론은 생후 초기의 관계 경험이 이후 모든 관계에서의 공감 패턴 기본값을 형성한다고 본다. 처음 반복적으로 경험한 관계의 방식이 공감의 첫 번째 선택적 고착을 만든다.


그런데 이것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선택적 공감은 평생에 걸쳐 계속 형성되고 강화된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자극을 만나고, 반복적으로 반응하면서 새로운 공감의 층이 쌓인다. 그리고 그 층이 충분히 두꺼워지면,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기보다 기존의 층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이 지점에서 꼰대의 문제가 다시 보인다. 꼰대는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경험이 너무 많다. 선택적 공감의 층이 너무 두껍게 쌓여서, 새로운 자극이 그 층을 뚫고 들어오지 못하는 상태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진화생물학의 언어로 말하면, 이것은 집단의 생존 전략이기도 하다. 집단 내에서 경험이 많은 구성원이 이미 검증된 반응 패턴을 유지하는 것은, 불확실한 새로운 시도의 위험으로부터 집단을 보호한다. 꼰대는 사실 집단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기능을 담당하도록 설계된 존재일 수 있다.


그런데 환경이 빠르게 변할 때 문제가 생긴다. 검증된 반응 패턴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환경에서도 그 패턴을 유지하려 하면, 적응 실패가 일어난다. 꼰대가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경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경험이 현재의 환경과 맞지 않는데도 새로운 공감을 시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머제니치는 뇌의 가소성(Neuroplasticity) 연구를 통해, 성인의 뇌도 새로운 경험을 통해 신경 연결을 재구성할 수 있음을 보였다. 선택적 공감이 고착되었다고 해서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새로운 자극에 의도적으로 노출되고, 그 반응을 반복함으로써 선택적 공감의 패턴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미 형성된 선택적 공감은 에너지 효율이 높다. 새로운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든다. 뇌는 기본적으로 에너지를 절약하려 한다. 그래서 기존의 패턴으로 판단하는 것이 자동적으로 선호된다.


나는 이것이 학습의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무언가를 배우면 배울수록, 새로운 것을 배우기가 어려워진다. 이미 형성된 선택적 공감이 두꺼워질수록, 그것을 통하지 않고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기가 어려워진다. 아기가 그토록 빠르게 학습하는 것은 잃어버릴 선택적 공감이 아직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성장이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을 오래 가지고 있었다.


성장을 선택적 공감의 축적으로만 본다면, 성장은 결국 꼰대로 가는 과정이 된다. 그것이 전부라면 너무 슬픈 이야기다. 그런데 나는 성장이 그것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장은 선택적 공감을 쌓아가면서도, 동시에 그 선택적 공감에 균열을 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캐럴 드웩의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 연구는 이 균열의 중요성을 다른 언어로 말한다. 자신의 능력이 고정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Fixed Mindset)은 새로운 도전 앞에서 기존의 패턴을 방어하려 한다. 자신의 능력이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Growth Mindset)은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는 것을 위협이 아니라 가능성으로 받아들인다.


드웩의 연구를 선택적 공감의 언어로 번역하면 이렇다.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선택적 공감 패턴을 잠정적인 것으로 본다. 지금까지의 반응 패턴이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지 계속 점검한다. 꼰대와의 차이는 경험의 양이 아니라, 기존 선택적 공감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가 여부다.




나는 여기서 잠깐 멈춘다. 왜냐하면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긴장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선택적 공감이 없으면 존재는 모든 자극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에너지가 고갈된다. 아기가 그토록 많이 자는 이유가 이것이다. 모든 것에 반응하는 것은 소진된다. 선택적 공감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효율화다.


그러나 선택적 공감이 너무 강해지면 세상이 좁아진다. 새로운 자극이 들어오지 못한다. 변화하는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리고 타인의 다른 공감 패턴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꼰대의 외로움은 어쩌면 이것이다. 자신의 선택적 공감 패턴 안에 혼자 남겨지는 것.


적당한 선택적 공감은 효율을 만들고, 과도한 선택적 공감은 고립을 만든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살아간다.




조너선 하이트의 도덕의 기원은 세대 갈등을 이 관점에서 읽게 만든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가 같은 사건을 보고 다르게 반응하는 것은, 서로 다른 도덕적 기초에 강하게 공명하도록 형성된 선택적 공감의 차이다. 기성세대는 충성과 권위와 안정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선택적 공감이 두껍고, 젊은 세대는 공정과 자율과 다양성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선택적 공감이 형성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을 알면 세대 갈등이 조금 다르게 보인다. 어느 쪽이 더 진보적이거나 더 낡은 것이 아니다. 서로 다른 시대의 환경이 서로 다른 선택적 공감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각자는 자신의 선택적 공감이 가장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자신의 반응 패턴이 세계의 기본 언어처럼 느껴진다.


갈등은 선택적 공감의 충돌이다. 이해는 상대의 선택적 공감 패턴을 읽는 것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선택적 공감의 역사다. 아기로 태어나 모든 것에 반응하다가, 반복된 경험이 특정 반응을 강화하고 다른 반응은 희미하게 만들면서, 점점 고유한 공감의 지형이 만들어진다. 그 지형이 그 사람이다.


그 지형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완전히 고정된 것도 아니다. 새로운 자극에 의식적으로 반응하고, 그 반응을 반복함으로써 지형은 천천히 달라질 수 있다. 그것이 학습이고, 성장이고, 어쩌면 성숙이다.


아기는 모든 것에 공감하고, 꼰대는 이미 공감이 끝난 사람이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는 매일 선택하고 있다.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어떤 자극에 반응할 것인지, 어떤 자극을 무시할 것인지.


그 선택이 쌓여서 나라는 사람이 만들어진다.


나는 지금 어떤 것에 반응하지 않기로 선택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선택이 나를 조금씩 좁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아기를 보면서 내가 느꼈던 그 불편함은, 아마도 이 질문이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