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힘든 이유, 여행이 젊게 만드는 이유

선택적 공감의 벽을 넘는 과정

by kamaitsra

나는 한때 여행을 좋아한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정말 여행을 좋아하는 것인지, 아니면 여행을 좋아한다는 말을 좋아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막상 여행지에 도착하면, 설레는 만큼 피곤하고, 자유로운 만큼 불안했기 때문이다.

짐을 풀고 낯선 침대에 누웠을 때의 그 이상한 감각. 천장의 질감이 다르고, 창밖의 소리가 다르고, 공기에서 나는 냄새가 다르다. 그 다름이 처음에는 신선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피곤해진다. 그런데 또 어떤 여행은 돌아온 뒤에도 오래 몸에 남는다. 여운이 아니라, 진짜로 무언가가 달라진 느낌.


나는 그 차이가 무엇인지 오래 생각했다.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비행 시간의 문제도 아니었다.




먼저 이것을 짚고 싶다. 여행이 왜 피곤한가.


우리는 일상에서 대부분의 에너지를 아낀다. 어떤 길로 출근할지, 어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지, 슈퍼마켓에서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지. 이 모든 것이 자동화되어 있다. 몸이 알아서 한다. 뇌가 개입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여행지에서는 이 자동화가 전부 꺼진다. 어느 방향이 북쪽인지, 지하철 출구가 어디인지, 메뉴판의 글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매 순간 새롭게 판단해야 한다. 처음 보는 자극에 처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신경과학자 패트리샤 쿨의 연구는 이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여준다. 아기는 태어날 때 세상의 모든 언어의 음소를 구별할 수 있다. 어떤 언어에도 열려 있는 상태다. 그런데 12개월이 지나면, 자주 듣지 않은 언어의 음소 구별 능력이 사라진다. 뇌가 자주 쓰이는 연결은 강화하고, 자주 쓰이지 않는 연결은 제거하는 과정, 즉 시냅스 가지치기(Synaptic Pruning)가 일어난 것이다.


나는 이것이 공감에서도 똑같이 작동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반복적으로 반응한 것들에 대해서는 자동화된 공감을 갖는다. 익숙한 공간, 익숙한 사람, 익숙한 언어. 이것이 선택적 공감이다. 특정한 자극에만 강하게 반응하고, 나머지는 배경처럼 흘려보내도록 굳어진 반응 패턴.


여행이 피곤한 이유는 이 선택적 공감이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동화가 꺼지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반응해야 한다. 그것이 흥미롭기도 하고, 동시에 소진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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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여행이 왜 설레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다.


2박 3일 여행. 낯선 거리를 처음 걷는 첫날 저녁의 그 공기. 간판의 글자들이 낯설고, 식당에서 나는 향신료 냄새가 낯설고, 사람들이 말하는 소리의 리듬이 낯설다. 그 낯섦이 감각을 살아있게 만든다. 보도블록의 질감까지 느껴진다. 평소에는 발바닥이 땅에 닿는 감각을 의식하지 않는데, 여행지에서는 그것까지 새롭다.


짧은 여행에서 이 흥분이 지속되는 것은, 기존의 선택적 공감이 본격적으로 해체될 만큼 충분한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자극을 경험하지만, 그 자극이 아직 내 공감 패턴을 뒤흔들 만큼 깊게 들어오지는 않는다. 자극의 쾌감이 적응의 부담보다 크다.


그런데 여행이 길어지면 달라진다. 처음 이틀은 모든 것이 신선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하루하루 매순간 새로운 공감에 지쳐간다. 선택적 공감의 스트레스이다. 그동안 내재되어 있던 자동화에 오류가 계속 발생하고 이를 수정하고 학습하는 일이 반복된다.


10일 정도 지나면 또 달라진다. 어느새 네비게이션을 보지 않아도 익숙한 길이 나타난다. 또 바가지를 쒸우는 현지인들에 화가 나지 않는다. 물갈이를 했는지 이제 제법 단단한 변을 본다. 어느 골목에 괜찮은 식당이 있는지 몸이 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나면, 그 도시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새로운 선택적 공감이 형성된 것이다.


그 순간부터 여행은 성격이 바뀐다. 더 이상 낯선 것에 흥분하지 않는다. 그리고 거기서 한국으로 돌아오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 한 달간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던 몸이, 원래의 삶으로 복귀하는 데 다시 적응 시간을 요구한다. 긴 여행의 피로는 여행 중에 오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뒤에 오기도 한다. 선택적 공감이 두 번 흔들린 것이다. 한 번은 여행지로, 한 번은 집으로.




그렇다면 여행의 강도는 어떻게 결정되는가.


나는 오래 거리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가까운 나라면 쉽고, 먼 나라면 힘들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서울에서 도쿄로 가는 것과, 서울에서 인도 오지 마을로 가는 것. 거리는 비슷할 수 있지만, 그 여행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도쿄는 시차가 없고, 교통 시스템이 익숙하고, 음식이 낯설지 않고, 도시의 질서가 비슷하다. 기존의 선택적 공감이 상당 부분 그대로 작동한다.


반면 언어도 통하지 않고, 시차가 크고, 음식의 질감이 완전히 다르고, 교통 질서가 다르고, 생활 리듬이 다른 곳으로 간다면, 기존의 선택적 공감은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 매 순간 새롭게 반응해야 한다. 그것은 체력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공감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이다.


여행의 진짜 강도는 얼마나 멀리 갔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다르게 공감해야 하는가로 결정된다. 그리고 그 다름의 강도가 클수록, 여행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더 많은 것을 남긴다.




나이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다.


어릴 때는 혼자 여행이 너무도거웠다. 처음 보는 것, 지역마다 다른 냄새, 신기한 음식, 다른 게 생긴 사람들, 그들의 역사, 문화, 사고 방식 매순간이 행복했고 또 아까웠다. 그래서 하루를 정말 길게 보냈다. 마치 한달살았던 경험을 하루에 완료한 느낌이었다.


지금은 혼자 여행이 두렵다. 준비 과정에 놓치는 게 없는지. 현지에서 무슨 돌발상황이라도 날까봐. 너무 외로울까봐 걱정부터 앞선다. 이것이 그동안 사회생활로 다져진 나의 선택적 공감이다. 막상 여행지에서는 짜증과 화가 많이 난다. 이해가 되지 않은 현지인들의 사고 방식, 바가지, 교통 체증, 맛없는 식사, 예상치 못한 사고, 터지지 않는 나의 무제한 유심카드, 엉터리 구글 네비게이션, 무거운 짐,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하지만 왠걸 10일 정도 지나니깐 익숙해졌다. 17일간 여행이후 돌아온 한국에서는 그 번잡함이 그립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점점 여행이 힘들어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그들은 대부분 체력 탓을 한다. 그런데 나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젊을수록 여행이 즐거운 것은, 선택적 공감이 아직 굳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에 대한 거부감이 적고, 낯선 환경에 반응하는 속도가 빠르다. 실패해도 다시 시도하는 힘이 있다. 불편해도 그것을 모험으로 읽는다.


나이가 들수록 여행이 힘들어지는 것은, 선택적 공감이 두꺼워졌기 때문이다. 익숙한 침대, 익숙한 음식, 익숙한 언어, 익숙한 생활 리듬. 이것들이 강해질수록, 그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 더 낯설고 더 불편하게 느껴진다. 몸이 피곤한 것이 아니라, 선택적 공감이 새로운 환경을 저항하는 것이다.


동물행동학자 콘라트 로렌츠의 각인 연구가 여기서 다시 떠오른다. 새끼 오리는 태어난 직후 특정 시간 안에 처음 본 대상을 어미로 각인한다. 그 창이 닫히면 다른 대상으로 교체되지 않는다. 인간의 선택적 공감도 이것과 유사하게 작동한다. 반복적으로 경험한 것들이 공감의 기본값으로 굳어지고, 그 기본값이 두꺼워질수록 새로운 것이 들어올 자리가 좁아진다.


젊음은 나이가 아니다. 선택적 공감의 유연성이다. 그리고 늙음도 나이가 아니다. 굳어버린 선택적 공감 상태다.




그러면 쉬운 여행이 좋은 여행인가.


여기서 나는 잠깐 멈춰야 한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생각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편함을 피하고 싶어한다. 여행에서도 마찬가지다. 잘 정비된 호텔, 익숙한 음식을 파는 레스토랑, 언어가 통하는 가이드. 이것들이 여행을 편하게 만든다. 선택적 공감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덜 피곤하다.


그런데 나는 그 편안함이 때로는 손실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의 일상은 이미 너무 안정적이고 너무 반복적이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고, 같은 경로로 출근하고, 같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같은 플랫폼에서 같은 종류의 콘텐츠를 소비한다. 이 반복이 편안하다. 그러나 이 편안함이 선택적 공감을 콘크리트처럼 굳게 만든다.


선택적 공감이 굳어지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새로운 자극에 반응하지 못한다. 타인의 다른 공감 패턴을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이 변화하는데 그 변화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살아있는데 점점 죽어가는 상태.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현대적 무감각의 본질이다.


단순한 스트레스나 피로가 아니다. 익숙한 환경만 반복하면서 새로운 것에 반응하는 능력이 퇴화하는 것. 공감력의 퇴화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머제니치는 뇌 가소성(Neuroplasticity) 연구를 통해, 성인의 뇌도 새로운 경험을 통해 신경 연결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을 보였다. 굳어진 선택적 공감도 새로운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때 변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이미 형성된 선택적 공감이 에너지 효율이 높기 때문이다. 뇌는 기존 패턴으로 판단하는 것을 자동적으로 선호한다. 새로운 반응을 만들어내는 것은 에너지가 많이 든다. 편안한 것을 놔두고 불편한 것을 선택하는 데는 의도적인 힘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려운 여행이 가치 있다.


힘들다. 불편하다. 귀찮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고, 잠자리가 불편하고, 이동이 예측대로 되지 않는다. 여행 중에 계획이 틀어지고, 길을 잃고,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그 모든 순간이 선택적 공감을 흔드는 순간이다.


굳어있던 반응 패턴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다시 처음처럼 세상에 반응하기 시작한다. 아기가 모든 것에 반응하듯이, 잠시 그 상태로 돌아간다. 그 흔들림이 피곤하다. 그러나 동시에, 죽어가던 공감력이 다시 깨어나는 감각이 있다.


오지에서 길을 잃었을 때, 나는 지도 앱을 열 수 없었다. 신호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주변을 처음으로 제대로 봤다. 산의 방향을 봤고, 물이 흐르는 방향을 봤고, 사람들이 걷는 방향을 봤다. 평소 도시에서는 절대 하지 않는 관찰을 했다. 선택적 공감이 작동하지 않으니, 다시 모든 것에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온 뒤 한동안 세상이 조금 다르게 보였다. 출근길에 하늘을 봤다. 식당에서 나는 냄새가 다시 느껴졌다. 그 상태가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잠시라도 굳어있던 공감이 흔들렸다는 것은 분명했다.




여행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다. 선택적 공감의 재조정 과정이다.


짧은 여행은 자극의 쾌감을 준다. 선택적 공감이 크게 흔들리지 않으면서 새로운 감각을 경험한다. 긴 여행은 새로운 선택적 공감을 형성한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원래의 삶을 다시 낯설게 보는 시간이 생긴다. 낯선 환경의 여행은 기존 선택적 공감을 가장 깊게 흔든다. 그것이 가장 힘들고, 동시에 가장 많은 것을 남긴다.


여행의 피로는 체력의 문제가 아니라, 선택적 공감이 흔들리는 데서 온다. 여행의 강도는 거리가 아니라, 얼마나 다른 환경에 공감해야 하는가로 결정된다. 그리고 여행이 우리를 젊게 만든다는 말은 감상이 아니다. 굳어있던 선택적 공감이 다시 유연해지는 과정이 실제로 일어나기 때문이다.


진화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인간의 도덕 판단이 여러 층의 공감 기초 위에 놓여 있다고 했다. 그 공감의 층은 경험의 반복으로 형성된다. 같은 경험만 반복하면 특정 층만 두꺼워지고, 다른 층은 얇아진다. 여행은 평소 사용하지 않던 공감의 층을 강제로 활성화하는 일이다. 그래서 좋은 여행 뒤에는 타인을 보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진다. 다른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을 실제로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의 공감 패턴을 몸으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편안한 여행은 쉼을 준다. 낯선 여행은 변화를 준다. 둘 다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 내 삶이 너무 반복적이고, 너무 안전하고, 너무 굳어 있다면, 내게 필요한 것은 쉬운 여행이 아닐 수 있다.


여행은 세상을 보는 일이 아니다. 굳어버린 내 선택적 공감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떤 여행을 하고 있는가. 나를 설레게 하는 여행인가, 나를 흔드는 여행인가. 그리고 나는 그 흔들림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