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물, 진영논리, 팬덤까지: 현대형 꼰대

선택적 공감의 균열과 공감력 회복

by kamaitsra

꼰대는 나이가 아니다

부제: 선택적 공감이 굳어버릴 때 일어나는 일




꼰대라는 말을 들으면 대부분 나이 든 남자를 떠올린다. "내 때는 말이야"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 야근을 미덕으로 여기고, 후배에게 자기 방식을 강요하는 사람. 그 이미지는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꼰대의 전부라면,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다.


나는 꼰대를 나이의 문제로 보지 않는다. 꼰대는 존재 상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선택적 공감이 너무 굳어버려서 더 이상 새로운 것에 반응하지 못하는 상태다.


이 구분이 중요하다. 나이를 먹어도 꼰대가 아닌 사람이 있고, 20대인데도 이미 꼰대인 사람이 있다. 그 차이는 어디서 오는가.




먼저 공감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짚고 가야 한다.


존재는 의지, 반응, 공감, 존재의 순환으로 성립한다. 무언가를 원하고, 자극에 반응하고, 그 반응이 쌓여 공감이 생기고, 그 공감이 존재를 확장한다. 이 순환이 살아있을 때 사람은 성장한다.


그런데 사람은 모든 것에 공감하지 않는다. 반복적으로 반응한 것, 오래 머문 관계, 익숙한 규범에만 강하게 반응한다. 이것이 선택적 공감이다. 선택적 공감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생존에 필요하다. 모든 자극에 동등하게 반응하면 에너지가 고갈된다. 뇌는 효율을 선택한다.


문제는 그 선택적 공감이 너무 오래, 너무 깊이 굳어버릴 때다. 그때 사람은 안정감을 얻는다. 판단이 빨라지고, 에너지가 덜 들고, 세상이 단순해진다. 그러나 그 대가로 반응의 폭이 사라진다. 공감이 생성되지 않는다. 의지는 강하다. 말하고 싶고, 가르치고 싶고, 통제하고 싶다. 그런데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힘이 없다. 이것이 꼰대의 철학적 실체다.


생존 효율은 높아지지만, 생명력은 낮아진다. 그 지점에서 꼰대가 탄생한다.




과거의 꼰대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였다.


학교, 군대, 회사, 가정에서 위계가 강했다. 윗사람의 말이 거의 정답처럼 통하는 사회였다. 그 환경에서 반복적으로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의 방식이 옳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확신을 아랫사람에게 일반화했다. "내가 해봤으니까 안다"는 말은 경험에서 나왔지만, 동시에 다른 가능성을 차단하는 말이기도 했다. 과거형 꼰대는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었다. 위계가 만들어낸 일반화된 선택적 공감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꼰대는 다르다.


사회가 끝없이 쪼개졌다. 취미, 정치, 팬덤, 연애관, 직업 윤리, 생활 방식이 모두 분화되었다. 그러면서 꼰대도 분화되었다. 이제 꼰대는 "내 때는"을 외치는 중년만이 아니다. 자기 규범을 정통으로 포장하는 커뮤니티 관리자, 자기 진영의 고통만 크게 보는 정치적 인간, 자기 문법만 정상이라 믿는 관계 설계자. 형태는 달라졌지만 본질은 같다.


과거에는 보편 규범의 폭력이 문제였다. 지금은 미시 규범의 독재가 더 큰 문제다.




이 구조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고인물 현상이다.


고인물은 단순히 오래 한 사람이 아니다. 오래 했는데도 살아있는 사람은 장인이다. 오래 했고 새로 들어온 사람의 다른 감각까지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른이다. 그러나 오래 했다는 이유로 입문자를 시험하고, 자기 문법을 정통으로 만들고, 변화를 타락처럼 보는 사람은 고인물형 꼰대다.


그는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지식의 출입권을 독점한 사람이다.


취미 커뮤니티에서 이것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그 장비도 없이?", "그 작품도 안 봤어?", "그 정도도 모르고 들어왔어?" 원래 취미는 공감의 확장이어야 한다. 그런데 고인물화된 커뮤니티에서는 선택적 공감이 출입 통제로 바뀐다. 공명의 장이 검열의 장이 된다.


팬덤도 다르지 않다. 언제 입덕했는지, 얼마나 소비했는지, 어떤 해석이 정통인지가 권력이 된다. 팬덤은 원래 같은 주파수에 공명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런데 꼰대화되면 감정의 공동체가 아니라 감별의 공동체가 된다.




정치에서는 이 구조가 더 선명하다.


각 진영은 자기 진영의 고통만 크게 느끼고 다른 진영의 고통은 삭제한다. 이것이 선택적 공감의 고착이다. 진보든 보수든, 이 경직은 형태만 다를 뿐 구조는 같다. 정치 꼰대의 핵심은 나이가 아니다. 반응의 편식이다.


연애와 젠더 영역도 마찬가지다. "남자는 원래 이래야 한다", "여자는 원래 저래야 한다", "연애는 반드시 이런 방식이어야 한다." 특정 서사만 정상으로 만들면, 그것도 꼰대다. 상대를 살아 있는 타인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기대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객체로 보기 때문이다. 꼰대는 결코 나이 든 남성만이 아니다. 자신의 상처, 이념, 온라인 문법에 갇히면 나이와 관계없이 누구나 꼰대가 된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전의 꼰대는 야근과 충성을 절대화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반대 방향의 경직도 나타난다.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바로 탈출, 내 기준에 안 맞으면 전부 부당. 나는 이것도 꼰대화의 한 형태라고 본다. 왜냐하면 본질이 같기 때문이다. 자기 경험의 틀로만 해석하고, 다른 맥락을 들을 능력을 잃는 것. 그것이 꼰대의 핵심이다.


꼰대는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경직된 해석 습관의 문제다.




여기서 건강한 공동체의 구조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건강한 집단은 80의 안정과 20의 변이가 함께 있다. 80은 질서를 만든다. 언어, 규칙, 예절, 기준, 숙련된 방식을 제공한다. 그러나 20은 균열을 만든다. 낯선 질문, 초보자의 시선, 다른 감각, 불편한 반론을 가져온다. 이 20이 있어야 공동체는 늙지 않는다.


꼰대화된 집단은 이 20을 위험으로 본다. 초보를 무시하고, 다른 해석을 조롱하고, 기존 방식과 다른 시도를 배척한다. 결국 80의 안정이 100의 고착으로 굳어버린다. 다양성이 사라지고, 선택적 공감만 남는다.


100의 고착. 이것이 꼰대 집단의 최종 상태다.




나는 꼰대를 공감 블랙홀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꼰대는 겉으로 확신이 강하고 존재감이 커 보인다. 말을 세게 하고, 기준이 분명하고, 분위기를 장악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새로운 반응을 흡수하지 못한다. 블랙홀은 주변을 끌어당기지만 스스로 빛을 내지 않는다. 꼰대도 그렇다. 사람을 통제하고 분위기를 장악할 수는 있다. 그러나 새로운 공감을 생성하지 못한다.


상대의 생명력을 북돋우지 못하고, 오히려 침묵과 위축을 만든다. 결국 공동체 전체의 공감 순환을 멈추게 한다. 그 결과는 존재의 확장이 아니라 존재의 매몰이다.


그러니 꼰대 옆에 있으면 지친다. 그것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공감이 순환되지 않기 때문이다.




꼰대는 한편으로 편하다. 이것도 직시해야 한다.


선택적 공감이 굳으면 세상이 단순해진다. 판단이 빠르다. 예측 가능성이 높다. 안정감도 있다. 이미 검증된 방식만 따르면 된다. 그 편안함이 사람을 꼰대로 이끈다. 의도가 아니라 효율이 만드는 상태다.


그러나 변화하는 세상에서 그 안정은 곧 노화가 된다. 공감 능력이 생명력이다. 반응의 폭이 줄어든다는 것은 존재가 늙어간다는 뜻이다. 꼰대가 늙어 보이는 이유는 주름 때문이 아니다. 반응성이 줄었기 때문이다. 몸보다 먼저 존재가 늙는 것이다.




그렇다면 꼰대의 반대말은 무엇인가.


젊은 사람이 아니다. 균열을 허용하는 사람이다. 자기 회로에 스스로 금을 낼 수 있는 사람이다.


초보자의 질문을 진지하게 듣는 것. 자기가 싫어하는 취향에 잠시 머무는 것. 다른 세대의 언어를 배우려는 것. 자기 확신이 흔들리는 불편함을 피하지 않는 것. 이것들이 공감력 회복의 시작이다.


이 균열이 쉽지 않은 이유가 있다. 이미 굳어진 선택적 공감은 에너지 효율이 높다. 뇌는 기존 패턴으로 판단하는 것을 자동으로 선호한다. 새로운 반응을 만들어내는 데는 에너지가 든다. 그래서 균열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신경과학자 마이클 머제니치의 뇌 가소성 연구는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인의 뇌도 새로운 경험을 통해 신경 연결을 재구성할 수 있다. 굳어진 공감 패턴도 새로운 자극에 반복적으로 노출될 때 변화한다.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다만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정리하면 이렇다.


과거의 꼰대는 위계가 만들어낸 일반화된 선택적 공감의 산물이었다. 지금의 꼰대는 다양성 사회에서 미시 규범이 과도하게 강화된 선택적 공감의 고착이다. 고인물 문화, 팬덤 검열, 진영 논리, 연애 문법 강요, 직장 내 양방향 경직. 모두 같은 구조다. 그리고 이 꼰대화는 공감 블랙홀로 이어져 개인과 공동체의 생명력을 갉아먹는다.


해법은 하나다. 자신이 선택적 공감에 너무 깊이 갇혔다고 느끼는 순간, 일부러 균열을 만드는 것이다. 틀린 것을 하라는 말이 아니다. 낯선 반응을 허용하라는 말이다. 내 회로가 작동하지 않는 자극 앞에 잠시 머무는 것. 그것이 공감력의 회복이고, 존재의 젊음이다.


꼰대는 나이가 든 사람이 아니다. 선택적 공감이 너무 효율적으로 굳어버려서 더 이상 새롭게 반응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젊음이란 나이가 아니라, 그 굳음에 스스로 균열을 낼 수 있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안에서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언제부터 그것이 배경처럼 흘러가기 시작했는가. 그리고 나는 그 균열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