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많은 일들이 겹쳐서(좀 더 정확히는 많은 감정들이 뒤섞여서)
더 힘들게 느꼈던 것 같다.
퇴사 후 흘러버린 시간에 아무것도 이룬 것 없는 것 같은 허무함이나
짝꿍에게 느끼는 미안함이나
스스로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나
나의 쓸모에 대한 자책감 같은..
그런 여러 가지 들 때문에.
그랬던 내가 무기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어떤 대단한 계기 때문은 아니었다.
왜 흔한 만화나 드라마를 보면
주인공에게 어떤 각성의 계기 같은 게 있곤 하잖아.
하지만 이번에 내게 그런 드라마 같은 일은 없었다.
나도 따지고 보면 내 인생의 주인공인데
모든 일이 다 그렇게 극적으로 풀리진 않은 모양이지.
그냥 그렇게 두들겨 맞아야만 하는 시간이었나 보다.
아프고 도망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럴 힘도 없어 그냥 맞아야 하는.
그냥 그렇게 버티면 지나가는 시간이었나 보다.
나도 힘든 시간을 지내고 있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그런 때가 있는 것 같다'라고.
빈말로 했던 이야기도 아니고, 뭔가 통달해서 했던 이야기도 아니고
정말 나는 그렇게 생각해 왔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이럴만한 일에는 이럴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냐고.
하지만 당사자가 되어보니 하나도 위안이 되지 않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그때가 언제까지인데'
'그런 얘기는 나도 하겠어'
'그럴만한 이유가 도대체 뭔데'
삐뚤어진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들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들을 수가 없다.
나도 이번에 그러했다.
하지만 그래도, 돌아보니 그렇다.
정말 그런 '때'라는 게 있나 보다.
누구나 번데기인 상태로 버텨야만 하는 때가.
다행히도 그 시간은 지나간다.
아침저녁으로 그래도 전보다 선선한 바람이 분다.
엊그제 저녁 산책은 정말 걷기 좋은 날씨였다.
'아- 이제 좀 살겠다-'라고 나는 하루에도 여러 번 말하게 되었다.
선선한 바람과 온도가 너무나, 너무나 반갑다.
지독했던 더위의 여름이 가고 가을이 정말 왔다. 오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이 정말 많은 위안이 되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그리고 가을이 가고 또 겨울이 올 것이다.
그리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
봄이 올 것이다.
이 사실을 잊지 않고 나는 내가 잘 버텨주었으면 좋겠다.
작은 행복들을 도토리처럼 부지런히 잘 모아주길 바란다.
결국 나를 지탱하는 것들은 그런 것들이었기에.
지독했던 여름,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