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독했던 더위가 한 풀 꺾이고 나서야 기운이 좀 돌아왔다. 돌아온 것 같았다.
지난여름, 자도 자도 계속 졸리고 몸이 무거워 침대방을 벗어나기에도 몇 시간이 걸리곤 했는데
그렇게 거실로 나서면 기다렸다는 듯 후덥지근한 공기가 훅- 밀려들어 숨쉬기도 힘든 더위에
에어컨이 켜져 있던 침대방으로 뒷걸음질 치고 그렇게 틀여 박혀있기를 몇 개월이었는데,
정말 말 그대로 갑자기, 어느 날,
‘잘 만큼 잔 것 같다’라든가
‘어, 조금, 개운하네’라든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기하고도 낯선 가뿐함.
그렇게 방문을 나서보니 며칠 전과 같은 숨 막히는 더운 공기가 많이 사라졌다.
이제 정말, 가을이 오는 중이라고 기대해 봐도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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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나는 하루, 이틀.. 싱크대가 터져나가게 그릇을 쌓아놨다가
업보를 청산하듯 한 번씩 땀에 푹 절어가며 설거지를 했다.
혼자 자취할 때도 그렇게 부지런하게 바로바로 치우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같이 사는 짝꿍이 한 번씩 고무장갑을 끼고 나서려고 했지만
안 그래도 민폐를 끼치고 있다는 마음 때문에 괴로운데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아 말렸다.
‘내 업보는 내가 청산하는 게 맞다’며 꾸역꾸역, 그가 오기 전에 정리를 해두곤 했다.
혼자 지냈으면 글쎄. 인간의 존엄성 따위는 더 멀리 던져두지 않았었을까.
그랬던 여름의 나였는데, 공기가 선선해지며,
뿌옇던 뇌가 조금 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쌓인 그릇들을 치우는 게 그렇게까지 힘든 일이 아니게 느껴졌다.
예전처럼 패드를 부엌 창틀에 끼워놓고 30분짜리 영상을 라디오처럼 틀어두거나
듣고 싶은 음악을 틀어놓고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달그락달그락 설거지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가 집안일을 딱 떨어지게 분류해서 맡아서 하는 편은 아니지만
나는 설거지를, 짝꿍은 청소기와 빨래를 맡아하는 편이었다.
나는 청소기와 빨래보다, 설거지를 더 좋아했었다.
보글보글 흰 거품 사이로 물에 불린 그릇을 문질거리면 금세 새하얀 그릇이 되니까.
좋아하는 음악 메들리를 듣고 나면, 뇌를 빼고 몇 번 달그락 거리면 설거지가 끝나곤 했었으니까.
하기 전과 후가 명확히 달라지는 부엌이, 나는 후련했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설거지가 좋았었다.
그 기분을 정말로 꽤나, 오랜만에 느끼는 중이었다.
그렇게 내가 어지른 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어렵지 않게 치우고, 정돈할 수 있게 되었다.
예전에 그랬었듯, 아침에 일어났을 때 키우던 금귤나무를 한 번 둘러보고 스킨답서스 상태를 확인했다.
매일 아침 화분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은 나의 작은 낙이기도 했었다.
‘내가 왜 그렇게까지 무기력했던 걸까?’
‘지금 나는 어떤 기분이고 마음이냐면..’
‘지난여름, 내가 제일 힘들다고 느꼈던 걸까. 뭐가 그렇게 날 괴롭혔던 걸까’
분명 지난주까지만 해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었었는데,
전처럼 이런저런, 상념들이 떠올랐다.
꼬리를 물며 질문에 답을 해보기도 했다.
책상에 앉아 머릿속에 부유하고 있는 생각들을 마구 털어놓기도 하고,
‘아.. 이건가? 이거 때문이었나..?’를 여러 날에 걸쳐 들여다보기도 했다.
아침에 막 잠에서 깼을 때, 자기 전에, 자다가.. 그냥 문득 생각이 들면
천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자문자답 해봤다.
그렇게 ‘아.. 이거 때문이었네..’라는 생각이 드는 것들은 따로 메모하고 기록하고 싶어졌다.
책상에 각 잡고 앉을 시간도 없이, 그냥 바로 핸드폰 메모를 켰다.
드는 생각들을 마구 적었다.
‘메모하고 싶다’
‘기록하고 싶다’
라는 기분도 정말 오랜만이었고,
그렇게 적은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중구난방의 메모들도
실로, 오랜만의 기록들이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위로도 응원도 쓴소리도 다 싫은 ‘어쩌라고’의 상태에 빠져버린 내가 너무 싫어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었는데
친구들을 만나
‘나.. 지난여름 좀 힘들었어. 무기력이 생각보다 세게 왔고 인성이 파탄나 있었어.’
라고 나의 상태를 고해성사하듯 털어놓을 수 있었다.
‘내가 했던 것들은 나한테만 의미가 있었던 건가.. 나의 지난 십여 년은 다 어디로 가버렸냐..’
‘내가 하는 이 모든 것들이, 하려고 하는 것들이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냐..’ 했었는데
‘근데 나는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힘든 거지’ 하며 그냥 그렇게 불현듯
나를 조금 떨어져서 볼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행동에서 숨겨진 나의 마음을 찾아내는 것.
내가 좋아하는 일이자, 의미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회고.
집을 정돈하기 시작한 것.
기록하고 메모하고 싶다는 마음. 감각.
‘내가 왜 그랬을까?’에 대한 자문자답.
지독한 무기력의 늪, 지긋지긋했던 여름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괜찮아지고 있다는 시그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