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볼일이 있어 외출했다가 충동적으로 여의도를 거쳐 숙대입구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나온 김에 좀 걷다 들어가고 싶어서였다. 꽃샘추위로 조금 쌀쌀했지만 걷기에 좋은 날씨였다. 여의도에서 내릴까 숙대입구에서 내릴까 고민하다 숙대입구역에서 내렸다.
남산을 지나는 버스에서만 내려다 보던 해방촌에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숙대입구역에서 용산 2번 마을버스를 타면 해방촌에 갈 수 있다는 글을 어느 블로그에서 본 기억이 나 찾아보았다. 맞았다. 용산 2번을 타고 해방촌 오거리에서 내리면 예쁜 식당과 카페들이 있다고 한다.
처음 가보는 곳이라 조금 두리번거리긴 했지만 네이버지도가 가르쳐 주는 대로 숙대입구 5번 출구에서 용산 2번을 탈 수 있었다. 버스는 후암동으로 해서 용산고등학교를 지나 해방촌 언덕길로 올라갔다. 너무너무 가팔랐다. 마을버스 운전기사님은 이곳이 익숙하신 듯 속도를 크게 줄이지도 않고 기세 좋게 부왕 올라가셔서 아찔할 정도였다. 걸어서 올라간다면 거의 등산하는 기분이 들 것 같았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차도 다니기 힘들 것 같고 걸어서 올라가기 참 힘들 것 같다. 열선은 깔려 있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드디어 해방촌 오거리에 도착했다.
해방촌 오거리는 말 그대로 오거리로 갈라지는 작은 광장 같은 느낌이었다. 가파른 언덕 위에 있는 작은 광장은 나름대로의 운치가 있었다. 조금 더 느낌 있는 건물들을 세우고 잘 다듬는다면 유럽의 어느 광장의 분위기가 날 것도 같았다.
해방촌오거리
광장을 잠시 바라보다 신흥시장을 찾아 나섰다. 나는 신흥시장이 망원시장이나 광장시장처럼 길거리 음식도 팔고 식료품들이며 갖가지 물건을 파는 재래시장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굉장히 세련되고 감각 있는 음식점과 카페들, 베이커리로 바로 앞 동네의 느낌과는 딴 세상이었다.
맛있어 보이는 솥밥집과 옷장 안으로 들어가는 컨셉의 카페가 마음에 들었지만 50대 아줌마가 혼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게 주변엔 젊은이들 뿐이었다. 인터넷 쇼핑몰 쵤영을 하는지 예쁜 모델과 사진 찍는 젊은이들도 보이고 해방촌 오거리에서 몇 걸음 차이인데 갑자기 가로수길인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가게들도 작아서 내 존재감이 더 크게 느껴질 거 같아 다음을 기약하며 주변만 이리저리 구경했다.
옷장속 컨셉의 카페
작은 골목골목들로 이루어진 이곳만의 이국적 분위기가 재밌었다. 친구들과 왔다면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며 더 오래 머물 텐데 배도 고프고 해서 그만 내려가기로 했다. 이 동네를 잘 몰라서인지 그 이상 볼 곳은 없어 보였다.
신흥시장안 작은 골목들
내려갈 때는 걸어갔다. 데크 길이 잘 되어 있어서 천천히 내려오며 동네를 계속 구경할 수 있었다. 내려오는 길에 귀엽고 예쁜 가게와 게스트하우스, 서점 등이 보였다. 귀여운 오락실도 있었고 평범한 게스트 하우스의 벽화도 예뻤다. 그 옆에 있는 중고서적을 파는 것 같은 서점에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2시나 되어야 문을 연다고 한다.
오락실과 게스트하우스, 중고서점
내려오는 데크길 시작점
내려오는 길도 재밌었다. 담장 장식이 특이한 예쁜 계단도 있었고 지금은 거의 사라진 책 대여점도 아직 있었다. 만화책과 비디오를 빌려보던 곳, 언제 사라졌는지 어느 순간 우리 주변에서 자취를 감췄는데 여기에 살아 있었다. 너무 반가워서 한참 바라봤다. 뜨개질 가게도 아주 예뻤다. 한 번 들어가서 구경하고 싶었는데 여기도 불이 꺼져 있었다.
책대여점
뜨개질 가게
거의 내려온 거 같아 주변을 보니 후암동인지 그곳에 해방촌으로 올라가는 108 계단이 보였다. 옆에 승강기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108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면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100 계단이 있던 아파트에 살았던 적이 있어선지 친근하기도 하고 반가웠다. 그곳에도 이런 승강기를 설치하려는 시도가 있었는데 바로 옆 아파트 단지에서 무슨 이유에선지 반대해서 성사되지 못했다. 그곳 주민들은 요즘도 그 100 계단을 힘겹게 올라 다니고 있겠지 라는 생각도 했다.
108계단과 승강기
구경하며 내려와서인지 어느새 용산고등학교 앞이었다. 계속 쭉 걷다 보니 다시 숙대입구역에 도착했다. 중간에 구복만두라는 미슐랭 식당도 지났다. 가보고 싶었지만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어서 여기도 나중에 와보기로 하고 계속 걸었다.
배가 고파 밥 먹을 곳을 생각하다 대학교 앞이 저렴하면서 혼밥 하기 편할 것 같아 숙대 앞으로 가기로 했다. <갈월동지하차도>를 건너니 바로 숙대입구 상가들과 식당들이 즐비한 번화가가 나왔다. 아기자기하고 좋아 보이는 식당과 카페들이 많았다. 언젠가 텔레비전에서 본 맛집인 까치집인가 하는 곳도 보였고 괜찮아 보이는 식당들이 너무 많아 고르기 힘들었다. 까치집에서 돈가스와 쫄면순두부를 먹고 싶기도 하고 초밥도 먹고 싶고, 샌드위치도 먹고 싶어서 몇 번을 왔다 갔다 하다 초밥으로 결정했다.
닌자 초밥이라는 곳이었는데 점심으로 8500원에 초밥과 롤, 우동까지 아주 훌륭한 세트메뉴를 팔고 있었다. 탄산음료와 보리강정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서 입가심까지 알차게 하고 나왔다. 또 어딜 걸을까 하고 살펴보니 효창공원이 가깝게 있었다.
구성이 훌륭했던 초밥 런치세트
그런데 그때 이미 만보가까이 걷고 밥을 잔뜩 먹어선지 급 피곤이 몰려와 공원엔 다음에 가보기로 하고 스타벅스에 들어가 쉬었다. 이곳 스타벅스는 한 참 붐빌 시간인데도 사람이 적었다. 아직 방학 중이라 그런지 너무 한적하고 좋아서 한참을 앉아 커피 한잔을 마시며 쉬었다.
오늘도 만보 넘게 서울을 걸어 다녀 뿌듯한 마음을 안고 다시 숙대입구역으로 걸어와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왔다. 아직도 내가 가보고 싶은 서울의 작은 골목길들이 많다는 것이 행복하다. 다음엔 또 어딜 걸어볼까 검색해 봤다. 동대문 쪽에 있는 성곽길이 걷기 좋다던데 날씨가 조금 더 풀리면 거기서 또 만보 걷기를 해볼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