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춥지만 하늘이 맑고 좋은 날 10시쯤 무작정 집을 나섰다. 나이를 잊고 즐겁게 살려고 하는데 자꾸 처음 겪는 증상들이 나타난다. 무릎이 아프더니 얼마 전에는 입술이 자꾸 떨렸다. 입술 떨림이 사라지는 거 같더니 저번 교통사고 이후엔 왼쪽 눈가가 자꾸 떨린다. 잠도 일주일에 한두 번 못 잤는데 이제는 하루 건너 새벽 3~4시까지 잠들지 못한다.
몸에 좋은 걸 먹으려 노력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스트레스 관리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노화는 이런 것인가? 집에 가만히 있으면 이런 증상에 더 신경이 쓰이고 아픈 것 같아 약속이 없는 날에도 혼자 자주 산책을 한다.
그날은 필운대로 5길에 가보기로 했다. 인터넷 어디선가 누가 좋다고 해서 기억해 두었다. 서촌 쪽에 가본지도 오래됐고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을 앉고 길을 나섰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 사람이 별로 없고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배경이 되어 창밖의 풍경들이 몇 배는 더 좋았다. 버스 안에 사람들이 없는 것도 좋았고 한강대교를 건널 때 보이는 철제구조물도 그날따라 새롭게 멋져 보였다.
<새로 쓰는 사랑 이야기> 블로그에서 가져온 사진
예전 기억도 떠올랐다. 나와 3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대구에 살던 중학생 외삼촌이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겨울 방학 동안 아빠에게 영어도 배우고 거의 몇 주간 있었다. 외삼촌을 데리고 여기저기 서울 구경을 했는데 그날은 현충원에 갔다가 - 그때가 1980년쯤이었나 보다. -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외삼촌이 “와 여기가 한강대교구나, 이 다리 모양 좀 봐. 이걸 보다니”라며 감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40년 전쯤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나는 이렇게 나이 들었는데 다리는 그 모습 그대로 차분히 잘 있었구나 싶었다. 한강대교에 그렇게 감탄하던 외삼촌은 이제 서울 사람 다 돼서 잘 살고 있다. 철제 구조물 사이로 반짝반짝 빛나는 한강이 그 옛날 중학생이 처음 본 듯 새롭게 보였다.
버스는 용산을 지나고 시청을 지나 나를 내려주었다.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통인시장에 내리니 필운대로였다. 서촌 뒤쪽 길인 거 같았다. 필운대로 5길이라고 쓰인 표지판 주위를 여기저기 살펴봤지만 크지 않았고 생각보다 볼게 많지는 않았다. 내가 잘못 왔나 싶어 앞으로도 가보고 뒤쪽으로 다시 가 봐도 그게 다인 거 같았다. 그래도 그 작은 골목길에도 서촌, 북촌 쪽에서 본 비슷한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있어 아늑하고 좋았다. 동네가 너무 작아서 아쉬울 뿐이었다.
필운대로 5길 안 쪽 골목
누구랑 같이 다닐 때는 이렇게 마음대로 이리저리 가보고 잘못 들어선 거 같으면 또다시 가보는 일이 자유롭진 않다. 같이 간 사람이 그러는 게 괜찮은지 살피고 같이 정하고 해야 하는데 혼자 다닐 때는 내키는 대로 잘못 가면 잘못 가는 대로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있고 보고 싶은 것을 한 참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다.
어느 한 곳에 오랫동안 서서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에 집중할 수도 있고 그저 내 마음대로 할 자유가 좋다. 이 행복감은 오직 혼자 있을 때만 맛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기분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 온전히 풍경이나 주변에 집중하지 못한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족과 올 때도 아이들이 좋아하는지 불편해하는지에 신경을 써서 아무리 “괜찮아, 엄마 좋을 대로 해”라고 해도 못 한다.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관계에 집중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살피느라 완전히 편안해지지 못한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데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을 얼마간 만나면 반드시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날 배려해 주고 특별히 모난 사람도 없어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그러면 ‘저 사람이 날 배려해 주느라 본인의 욕구를 참는구나. 차라리 내가 힘든 게 나은데’라는 생각 때문에 내 뜻대로 한들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오히려 마음은 더 불편하다.
혼자의 시간을 즐거워하며 이리저리 걷다 보니 경복궁 근처까지 왔다. 그 중간에 노포느낌의 백반집이 보였다. 배도 고프고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 보여 들어갔다. 9천 원짜리 된장찌개를 시켰다. 반찬과 밥과 찌개를 쟁반째로 갖다 주었다. 계란이나 어묵 볶음 같은 단백질 반찬 하나 없이 다 풀떼기라 약간 실망을 하며 버섯 하나를 집어 먹었다.
<똑똑똑>블로그에서 가져온 사진
그런데 맛있었다. 미역귀를 찍어먹는 초고추장도, 시금치 무침도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주 메뉴인 된장찌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우연히 동네의 허름한 식당에 들른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된 거 같았다. 처음엔 “풀떼기뿐이군” 하며 집어먹다 갑자기 그 맛의 내공에 동공이 커지며 “뭐야, 맛있잖아? 이 버섯볶음도 평범치 않군, 이 시금치 양념은? 평범한 듯 하지만 감칠맛으로 입을 즐겁게 해 주는군. 다른 테이블에선 뭘 먹고 있나? 제육? 오징어 볶음? 다 맛있겠군” 이런 독백이 들리는 듯했다.
고로상이라면 제육이나 오징어볶음 중 하나를 더 주문했겠지만 난 그럴 소화력이 없어 아쉬웠다. 나중에 누군가와 같이 꼭 다시 와보고 싶은 청하식당이었다.
영하 5도이긴 했지만 많이 춥지 않고 든든히 점심을 먹어선지 걷는 게 상쾌하고 좋았다. 거기서 교보문고까지 또 걸었다. 책들을 살펴보고 맘에 드는 책 한 권을 사서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늘 앉아보고 싶었던 독서실 같기도 하고 도서관 같기도 한 곳의 자리가 마침 비어있었다. 커피와 마카롱을 먹으며 오늘의 감상을 수첩에 메모하고 책도 보며 잠시 쉬었다.
광화문 교보문고 스타벅스
그때가 벌써 6 천보였다. 집에 갈 때까지 걸으면 만보는 충분히 채울 수 있다. 다시 시청 쪽으로 걸어가 402번 버스를 탔다. 402번을 타고 하는 남산 길 드라이브를 좋아한다. 겨울보다는 다른 계절이 훨씬 좋지만 오랜만에 남산길 버스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 집 가는 방향과 좀 다르지만 402번을 탔다.
402번을 타고 남산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이태원 경리단 길 쪽 경치가 좋다.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도 정겹고 그 길의 풍경들이 좋다. 진한초록의여름 남산과 봄의 꽃이 만발했을 때, 색색의 나뭇잎들이 펼치는 가을의 고즈넉한 느낌을 402번 버스를 타면 쉽게 즐길 수 있다.
누구를 만나서 보낸 하루 못지않은 즐거운 시간으로 마음이 충만해졌다. 버스를 타고 들으면 음악도 더 잘 들리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얼굴에 닿는 차갑지만 따뜻하기도 한 겨울햇살이 아주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