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수종 Feb 05. 2024

필운대로 5길을 산책하며

좀 춥지만 하늘이 맑고 좋은 날 10시쯤 무작정 집을 나섰다. 나이를 잊고 즐겁게 살려고 하는데 자꾸 처음 겪는 증상들이 나타난다. 무릎이 아프더니 얼마 전에는 입술이 자꾸 떨렸다. 입술 림이 사라지는 거 같더니 저번 교통사고 이후엔 왼쪽 눈가가 자꾸 떨린다. 잠도 일주일에 한두 번 못 잤는데 이제는 하루 건너 새벽 3~4시까지 잠들지 못한다.


몸에 좋은 걸 먹으려 노력하고 마음을 다스리며 스트레스 관리를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노화는 이런 것인가? 집에 가만히 있으면 이런 증상에 더 신경이 쓰이고 아픈 것 같아 약속이 없는 날에도 혼자 자주 산책을 한다.


그날은 필운대로 5길에 가보기로 했다. 인터넷 어디선가 누가 좋다고 해서 기억해 두었다. 서촌 쪽에 가본지도 오래됐고 새로운 곳에 대한 기대감을 앉고 길을 나섰다.


집 앞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 안에 사람이 별로 없고 날씨가 너무 좋아서 그런지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배경이 되어 창밖의 풍경들이 몇 배는 더 좋았다. 버스 안에 사람들이 없는 것도 좋았고 한강대교를 건널 때 보이는 철제구조물도 그날따라 새롭게 멋져 보였다.

<새로 쓰는 사랑 이야기> 블로그에서 가져온 사진


예전 기억도 떠올랐다. 나와 3살 차이 밖에 나지 않는 대구에 살던 중학생 외삼촌이 놀러 온 적이 있었다. 겨울 방학 동안 아빠에게 영어도 배우고 거의 몇 주간 있었다. 외삼촌을 데리고 여기저기 서울 구경을 했는데 그날은 현충원에 갔다가 - 그때가 1980년쯤이었나 보다. -  한강대교를 건너는데 외삼촌이 “와 여기가 한강대교구나, 이 다리 모양 좀 봐. 이걸 보다니”라며 감탄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40년 전쯤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나는 이렇게 나이 들었는데 다리는 그 모습 그대로 차분히 잘 있었구나 싶었다. 한강대교에 그렇게 감탄하던 외삼촌은 이제 서울 사람 다 돼서 잘 살고 있다. 철제 구조물 사이로 반짝반짝 빛나는 한강이 그 옛날 중학생이 처음 본 듯 새롭게 보였다.


버스는 용산을 지나고 시청을 지나 나를 내려주었다.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통인시장에 내리니 필운대로였다. 서촌 뒤쪽 길인 거 같았다. 필운대로 5길이라고 쓰인 표지판 주위를 여기저기 살펴봤지만 크지 않았고 생각보다 볼게 많지는 않았다. 내가 잘못 왔나 싶어 앞으로도 가보고 뒤쪽으로 다시 가 봐도 그게 다인 거 같았다. 그래도 그 작은 골목길에도 서촌, 북촌 쪽에서 본  비슷한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모여있어 아늑하고 좋았다. 동네가 너무 작아서 아쉬울 뿐이었다.

필운대로 5길 안 쪽 골목

누구랑 같이 다닐 때는 이렇게 마음대로 이리저리 가보고 잘못 들어선 거 같으면 또다시 가보는 일이 자유롭진 않다. 같이 간 사람이 그러는 게 괜찮은지 살피고 같이 정하고 해야 하는데 혼자 다닐 때는 내키는 대로 잘못 가면 잘못 가는 대로 새로운 길을 만날 수 있고 보고 싶은 것을 한 참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다.


어느 한 곳에 오랫동안 서서 그곳에서 피어오르는 감정에 집중할 수도 있고 그저 내 마음대로 할 자유가 좋다. 이 행복감은 오직 혼자 있을 때만 맛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이나 기분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라 온전히 풍경이나 주변에 집중하지 못한다.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족과 올 때도 아이들이 좋아하는지 불편해하는지에 신경을 써서 아무리 “괜찮아, 엄마 좋을 대로 해”라고 해도 못 한다.


사람들을 좋아하지만 관계에 집중하고 상대방의 감정을 살피느라 완전히 편안해지지 못한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데 자동적으로 그렇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을 얼마간 만나면 반드시 나만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가족이나 친구들도 날 배려해 주고 특별히 모난 사람도 없어서 내 마음대로 해도 되는데 그러면 ‘저 사람이 날 배려해 주느라 본인의 욕구를 참는구나. 차라리 내가 힘든 게 나은데’라는 생각 때문에 내 뜻대로 한들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오히려 마음은 더 불편하다.


혼자의 시간을 즐거워하며 이리저리 걷다 보니 경복궁 근처까지 왔다. 그 중간에 노포 느낌의 백반집이 보였다. 배도 고프고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아 보여 들어갔다. 9천 원짜리 된장찌개를 시켰다. 반찬과 밥과 찌개를 쟁반째로 갖다 주었다. 계란이나 어묵 볶음 같은 단백질 반찬 하나 없이 다 풀떼기라 약간 실망을 하며 버섯 하나를 집어 먹었다.

<똑똑똑>블로그에서 가져온 사진


그런데 맛있었다. 미역귀를 찍어먹는 초고추장도, 시금치 무침도 맛이 예사롭지 않았다. 주 메뉴인 된장찌개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우연히 동네의 허름한 식당에 들른 <고독한 미식가>의 고로상이 된 거 같았다. 처음엔 “풀떼기뿐이군” 하며 집어먹다 갑자기 그 맛의 내공에 동공이 커지며 “뭐야, 맛있잖아? 이 버섯볶음도 평범치 않군, 이 시금치 양념은? 평범한 듯 하지만 감칠맛으로 입을 즐겁게 해 주는군. 다른 테이블에선 뭘 먹고 있나? 제육? 오징어 볶음? 다 맛있겠군” 이런 독백이 들리는 듯했다.


고로상이라면 제육이나 오징어볶음 중 하나를 더 주문했겠지만 난 그럴 소화력이 없어 아쉬웠다. 나중에 누군가와 같이 꼭 다시 와보고 싶은 청하식당이었다.


영하 5도이긴 했지만 많이 춥지 않고 든든히 점심을 먹어선지 걷는 게 상쾌하고 좋았다. 거기서 교보문고까지 또 걸었다. 책들을 살펴보고 맘에 드는 책 한 권을 사서 스타벅스에 들어갔다. 늘 앉아보고 싶었던 독서실 같기도 하고 도서관 같기도 한 곳의 자리가 마침 비어있었다. 커피와 마카롱을 먹으며 오늘의 감상을 수첩에 메모하고 책도 보며 잠시 쉬었다.

광화문 교보문고 스타벅스


그때가 벌써 6 천보였다. 집에 갈 때까지 걸으면 만보는 충분히 채울 수 있다. 다시 시청 쪽으로 걸어가 402번 버스를 탔다. 402번을 타고 하는 남산 길 드라이브를 좋아한다. 겨울보다는 다른 계절이 훨씬 좋지만 오랜만에 남산길 버스 드라이브를 하고 싶어 집 가는 방향과 좀 다르지만 402번을 탔다.


402번을 타고 남산을 올라가면 나타나는 이태원 경리단 길 쪽 경치가 좋다. 오래된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도 정겹고 그 길의 풍경들이 좋다. 진한 초록의 여름 남산과 봄의 꽃이 만발했을 때, 색색의 나뭇잎들이 펼치는 가을의 고즈넉한 느낌을 402번 버스를 타면 쉽게 즐길 수 있다.


누구를 만나서 보낸 하루 못지않은 즐거운 시간으로 마음이 충만해졌다. 버스를 타고 들으면 음악도 더 잘 들리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 얼굴에 닿는 차갑지만 따뜻하기도 한 겨울햇살이 아주 좋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도에서 파랑새를 만났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