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수종 Jun 03. 2024

감동은 다른 색깔로 평생 오나보다.

- 경주 불국사 설국암 여행

두 달 전쯤 경주여행을 다녀왔다. 경주에는 애들 어릴 때도 여러 번 갔었고 작년에도 가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벚꽃 구경을 실컷 하기도 했다. 불국사 앞에 있는 벚꽃 동산은 천국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라는 생각이 들 만큼 몽환적이고 아름다웠다.


올해에도 남편이 경주에 일이 있어 가는 길에 딸과 셋이 다녀왔다. 올해는 아쉽게도 벚꽃이 피지 않은 시기라 어딜 갈까 고민하다 낮에는 경리단 길에 가고 저녁엔 야경으로 유명한 예전에 안압지라고 불렸고 지금은 동궁과 월지라고 불리는 곳과 첨성대에 가기로 했다.


예전에도 와봤지만 볼 때마다 신비롭고 좋았다. 호수에 비치는 나무와 건물의 모습이 정말 멋졌다. 조명을 잘 배치해 놓아선지 호수에 거울처럼 비치는 모습이 장관이었다. 그렇게 주변을 한 바퀴 돌고 나가서 월정교도 보았다.

동궁과 월지 야경


밤에 보는 첨성대는 멋지다고 해서 보러 갔다. 수학여행 때 첨성대를 보고 실망했던 기억은 누구나에게나 있을 것이다. 국사시간에 배운 문화유산 중 가장 유명한 것 중 하나가 첨성대였는데 실제로 보고 너무 소박하고 작은 모습에 실망했었다. '저렇게 낮은데 별이 잘 보였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는데 밤에 보니 조금은 더 크고 위용있어 보였다. 남편 말로는 그 옛날인데도 내진 설계로 만들어져서 오랜 세월 잘 버티고 있다고 했다. 경주에도 몇 년 전에 큰 지진이 여러 번 왔었기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첨성대 야경


다음날 아침에는 호텔 주변 산책을 하고 함양집에서 육회물회와 비빔밥을 점심으로 먹고 불국사로 갔다. 경주에는 여러 번 왔었어도 불국사는 수학여행의 기억이 있어 다 안다는 생각에 안까지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사실은 단체사진기억에 있고 잘 알지 못해서 한 번 보고 싶어졌다. 근 39년 만에 오는 불국사다. 세상에 내가 나이가 정말 많구나.

함양집 육회물회


단체사진 단골 장소인 청운교 백운교 앞의 모습이 이렇게나 섬세하고 멋진지 이제야 알게 되었다. 17살 고1 때는 그저 친구들과 수다 떨고 우르르 몰려다니느라 이런 유적지에 대한 감흥이 하나도 없었다. 선생님들이 설명을 해주셨었는지도 기억에 없고 힘들고 재미없어서 친구들과 밤에 뭐 하고 놀까 그런 생각뿐이었던 거 같다.

불국사 단체사진 장소


안으로 들어가니 다보탑과 석가탑이 있었다. 몇 백 년 전부터 지금까지 한 자리에 서 있는 멋진 조형물에 대한 신비한 느낌과 경외감이 들어 구석구석 자세히 살펴보고 절의 다른 곳들도 거닐며 불국사의 봄날을 만끽했다.

다보탑 석가탑



불국사에서 나와 석굴암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데 생각보다 멀었고 높이 올라갔다. 수학여행 때도 와 본 거 같긴 한데 이 먼 길을 어떻게 왔었는지 전혀 기억에 없었다. 남편과 딸도 분명히 왔었던 거 같은데 이런 길을 왔었나 하면서 전혀 기억에 없다고 한다. 그렇게 한참 차를 타고 올라 드디어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서 석굴암으로 걸어들어가는 길


주차장에서도 석굴암은 산속으로 한 참을 더 걸어 들어간 곳에 있었다. 이런 높고 깊은 산 중에 어떻게 그렇게 큰 석굴암을 만들었을까 궁금해하며 한 참을 걸어가니 드디어 석굴암이 있는 곳에 도달했다.

<지나고 보니 추억> 블로그에서 가져 온 석굴암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


석굴암은 거기서도 좁은 계단 길을 더 올라가야 나왔다. 줄을 서서 몇 명씩 들어가야 했다. 예전엔 이런 건물 속 유리벽 안에 있지 않고 그냥 자연 속에 있었던 거 같은데 잘 기억나지 않았다. 유리벽 안에 있다는 말을 들으니 별로겠구나 조금 실망하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드리어 우리 차례가 되어 안으로 들어가 석굴암을 마주했다! 거대한 부처님상을 마주 했을 때 미쳐 생각지도 못한 큰 감동이 느껴졌다. 저절로 눈물이 나오고 가슴이 벅차올라 한참을 멍하게 있었다.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크게 감동받을 줄 몰랐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불교신자도 아니고 단순히 크기에 압도당해 느껴지는 감정은 아니었다. 나도 알 수 없는 감동에 그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신성한 아름다움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깊은 감동을 받아 기뻤다. 아직은 이런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남아있겠구나라는 기대감이 솟아올랐다.


이 세상엔 내가 아직 알지 못하는 진실과 아름다운 것들이 많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실제로 보기 전에는 막연히 ‘사진이랑 비슷하겠지. 뭐 별거 있겠어?’ 라는 마음이어서 여행에서 유적지나 문화유산을 보는 거에 큰 기대감이 없었다. 그 보다는 관광객들이 몰리지 않고 현지인들의 생활 모습을 볼 수 있는 곳에서 여유롭게 산책하는 여행을 더 선호했었다.


56년간 많이 경험해 봤다고 막연히 그렇겠지 이렇겠지 추측하며 시큰둥한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맛있는 것도 많이 먹어봤고 좋다는 곳도 많이 가봐서 비슷비슷한 그런 관광지의 감성에 식상해져 있었다. 어릴 때는 뭐든지 처음 하는 경험이라 많은 것들이 재밌었다. 이제는 감성이 너덜너덜 낡아버려 뭐든 시큰둥한 자신이 슬펐는데 이런 경험을 하게 되어 기뻤다.


어릴 때는 도시의 모든 것들이 다 재밌고 좋았던 반면 이런 문화유산이나 자연에 대한 감성은 부족했다. 지금처럼 외식이 다양하지 못했던 어린 시절을 지나 급속하게 발전하는 시기에 20,30대를 보내면서 가 본 다양한 식당들, 카페와 술집들, 대형 쇼핑몰이 정말 재밌고 좋았는데 이제는 그런 것들에 질리고 지쳤다.


지금도 사람들을 만날 때면 가지만 예전만큼의 감흥이 없다. 그냥 사람을 만나는 장소일 뿐이다. 대신 어릴 때 잘 느끼지 못했던 자연의 아름다움과 이런 문화유산을 잘 볼 수 있는 연륜이 생긴 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은 감동받고 그 깊이를 알아볼 수 있는 마음이 남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 좋았다. 아직 가보지 못한 세상의 유명한 유적지들에 가보고 싶어졌다.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는 나의 버킷리스트에 있다. 그곳만은 전에도 꼭 가보고 싶었는데 그 외에도 내가 아직 경험하지 못한 인류의 유산들을 보러 다녀야겠다. 젊을 때와는 다른 감정의 방이 따로 있었나 보다. 몸뿐만 아니라 마음도 늙어지는 것 같아 슬펐는데 새로운 감정의 영역을 찾은 것 같아 안심이 된다.







매거진의 이전글 화려한 5월의 혼자 여행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