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에 왔다. 카페루소의 좋아하는 자리에 앉았다. 20세기에 건축된 듯한 빨간 벽돌 건물이 보이는 80년대 대학교 근처에 있던 카페 분위기가 난다. 처음 와보고 좋아서 친구들과 가족들도 데리고 여러 번 왔지만 이렇게 노트북을 가져와 글을 쓰기는 처음이다.
정동에서는 이미 유명한 카페인데 뒤늦게 알게 되었다. 엄청 크고 브런치까지 먹을 수 있어서 조용히 글 쓰기에는 별로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내부가 두 곳으로 분리되어 다르게 꾸며져 있어서 창가 쪽 구석 자리를 잘 차지하면 글쓰기에 충분하다.
바깥은 초록의 나무들과 빨간 벽돌 건물의 조화로운 풍경으로 아름답고 실내는 시원하고 쾌적하다. 매번 스타 벅스에만 가다 새로운 카페에 오니 이런 글이 쓰고 싶어졌다. 사실은 다른 내용을 쓰려고 준비한 게 있는데 여기서는 가벼운 여름날의 기분을 쓰고 싶어졌다.
카페루소 장밖 풍경
이제야 여름의 아름다운 정취가 느껴진다. 짙은 초록과 덥지만 시원한 기분!
요 며칠간 너무도 더웠다. 그저께는 서울이 36도였다. 체감은 더 높았고. 올해가 최악의 더위인 거 같고 매년 심해지고 있다.
최근의 극심한 더위가 시작되기 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여름이었다!!!
여름의 여유로움과 밝음, 가벼운 옷차림, 초록 나무들과 매미소리, 더울 때 부는 한 자락 시원한 바람이 이마의 땀을 식혀 줄 때의 기분, 밖은 덥지만 어릴 적 살던 집 마당에 있던 나무들의 짙은 초록이 만들어 주던 거실의 푸르스름한서늘함, 푸른 바다와 그 바다 너머에 있는 것들에 대한 호기심, 오랫동안 힘들 때마다 떠올리던 배를 타고 바다 위를 떠다니는 이미지 모두 여름과 관련된 것들이어서 좋아했었다.
늘 깨끗하고 단정하게 집을 돌보던 엄마 덕분에 더운 여름날에도 우리 집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깨끗한 하얀 커튼으로 햇볕을 가린 거실에 깔린 돗자리 위에 누워 맞바람을 맞고 있으면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더 어릴 때는 마당에 커다란 빨간 다라이에 물을 받아주면 거기서 물놀이도 했었다. 할머니와 강아지와 놀며 그렇게 더위를 식혔었다.
물놀이하다 팬티와 런닝만 입은 채로 바로 집 옆에 있던 구멍가게에 가서 하드도 사 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지금 같은 냉장고가 아니라 길쭉한 냉동고 같이 생겼는데 뚜껑을 열면 위에 얼음주머니 같은 것이 있었고 그걸 들어내고 하드를 꺼내야 했다.
블로그 <6080 민속품 추억상회>에서 가져온 옛날 하드통
하드 하나 물고 강아지와 놀다 또 더워지면 그 다라이에 들어가 놀았다. 마당 옆의 작은 꽃밭에서 나뭇잎도 따서 물에 띄우고 미지근해진 물에서 하루 종일 놀았던 그날이 떠오른다.
선풍기 옆에서 러닝과 팬티 바람으로 달디 단 복숭아와 수박의 과육을 베어 먹던 앞니 밖에 나지 않았던 아이들의 애기 때 얼굴들, 베란다에 간이 수영장을 만들어 물 받아서 놀며 눈이 휘어지게 웃던 아이들의 행복한 표정들, 그 햇살 같이 눈부신 얼굴은 모두 여름의 표정이었다.
바닷가나 계곡으로 피서도 가고 휴양지에서 보낸 여름 풍경은 이런 아련함을 자아내지 못하는 거 같다. 이상하게 휴양지의 수영장이나 바닷가에서 놀던 기억보다 집에서 보낸 여름이 향기롭게 기억된다. 식구들과 먹던 과일과 옥수수, 고구마 같은 음식과 밖에서 들리던 매미들의 비명에 가까운 울음이 이제 정말 여름의 한가운데 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만들던 기억들.
소박하지만 집에서 얼마든지 시원하게 보내며 유유자적할 수 있었던 여름의 추억이 이제는 심각한 무더위에 사라져 버리고 있다. 에어컨만 켰다 껐다하며 넷플릭스 같은 거나 몰아보면서 어떻게든 이 더위의 시간을 참아내야 하는 계절로 변해버렸다. 그것도 힘들어지면 그다지 기대되지 않는 여행을 떠나 호텔과 주변 쇼핑몰로 피해 다니는 여름이 됐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이런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한 한 순간이 깊이 각인된다는 걸 알게 됐다. 소박하게 보낸 하루가 아름답게 기억에 남는다. 소박하고 조용한 하루를 보내며 그 느낌을 온전히 느꼈기 때문일까? 바쁘게 움직여야 하고 사람들과 정신없이 보내는 하루보다 오늘 어떤 느낌이었고 어떤 기분인지 다시 한번 기억한 날들이 오래 남는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