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플라뇌르, 산책자의 어느 하루

by 박수종

김영민의 <인생의 허무를 보다> 중 산책에 대한 글을 읽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나도 도시의 숨어있는 곳들을 찾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바로 그런 산책의 기분과 생각을 진지하지도 가볍지도 않게 표현한 글이라 읽으면서 많이 행복했다.


이 글을 읽고 어디선가 본 플라뇌르라는 단어가 떠올라 검색해보기도 했다. 플라뇌르(flâneur)는 배회자, 산책자, 활보자 또는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프랑스어 명사로 몇 가지 미묘한 뜻이 덧붙여져 사용된다고 한다. 플라뇌르는 도시의 풍요와 모더니티를 나타내는 모호한 인물로 산업화된 현대 사회의 관찰자로서 사회와 거리를 두고 목적지 없이 배회하고 경험하며 이해하는 존재로 설명될 수 있다고 한다.(위키백과)


플라뇌르의 개념은 건축과 도시 계획 분야의 심리지리학에서도 비중 있게 다뤄지며 보행 중 우연히 경험하는 특정한 디자인에 간접적 혹은 의도치 않은 영향을 받는 사람들을 말한다. (위키백과)


인간에게 걷기는 중요하고 정신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받는다는 걸 절감하게 하는 일이 걷기다. 기분이 우울하거나 처질 때 박차고 나가 궁금했던 곳을 걸어 다니면 기분이 바뀐다.


특히나 마음에 드는 곳이라면 새로운 활력이 생기고 영감이 떠오르기도 한다. 저번 주에도 날씨가 너무 좋고 짧은 가을이 아쉬워 혼자 나갔다. 저번에 잠깐 가서 밥만 먹었던 성북동을 샅샅이 구경해보고 싶었다.


한성대입구역에서 내려 버스를 한 번 갈아타고 금왕돈가스 본점으로 갔다. 10시 반에 문 열자마자 들어갔다. 사람이 별로 없어서 혼밥 하기 좋았다. 옛날식 경양식돈가스라 맛있었다. 아는 맛이지만 늘 먹고 싶은 맛이기도 하다.

금왕돈가스 정식



든든히 밥을 먹고 걸어서 갈 수 있는 길상사로 향했다. 금왕 돈가스 근처에 있는 교회의 외관도 범상치 않았다. 건물을 요모조모 뜯어보고 사진을 찍고 눈에 담았다. 그 교회 옆쪽의 가파른 길로 걸어 들어갔다.

금왕돈까스집 근처 교회


길상사 가는 길은 엄청 좁고 가팔랐다. 처음 경험해 보는 작고 좁은 골목이었다. 너무 좁아서 여기가 서울 한 복판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 길이 계속됐다. 재밌고 신기했다. 너무 재밌고 흥미진진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 골목을 돌아가면 어떤 길이 나타날지 가벼운 두려움과 흥분이 느껴졌다.

길상사로 가는 좁디 좁은 길들


그렇게 한 15분 정도 걷다 보니 큰 길이 나왔고 길상사가 나타났다. 산속에 있는 게 아니라 길가에 있었다. 백석 시인을 떠올리며 조용히 들어갔다. 생각보다 컸고 아름다웠다. 일반 절과는 좀 다른 느낌이 들었다. 법정스님의 수행처에도 들어가 봤다. 그 뜰 돌담 아래 스님이 묻혀있다고 한다. 스님이 입었던 낡아서 해진 승복과 사용하시던 물건들을 봤다.


길상사를 둘러보고 걸어서 내려왔다. 그 길이 오늘의 주요 산책코스다. 내려오면서 본 북악슈퍼의 모습도 예뻤는데 역광이라 그 느낌을 살린 사진은 못 찍었다. 크고 멋진 집들도 많았다. 그런 집의 담과 작은 창문도 눈길을 끌었다. 회색의 아파트와 빌딩숲에서는 보기 힘든 각자의 개성을 뽐내는 집들을 보니 좋았다.


다음에 친구들과 가보고 싶은 브런치 식당 사진도 찍고 이 동네에 산다면 다녀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성당도 있었다. 거의 한성대입구 근처까지 내려오니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기숙사 같은 단층 건물이 있었다. 1층에 작은 입구들이 있었고 몇 가구가 살고 있었다. 소박하지만 잘 관리되어 있어 보였고 특이했다.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단층건물

그렇게 죽 내려오다 아주 작고 낮은 집을 개조한 흔한 한옥카페처럼 보이는 곳을 발견했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며 안을 들여다봤는데 내부가 기대 이상이라 깜짝 놀랐다. 겉은 한옥이었는데 내부는 유럽의 어느 집에서 봤을법한 앤틱한 가구들와 오브제들, 정성으로 모은 티컵들이 어우러진 아늑한 공간이었다.


공간이 주는 아늑하고 좋은 느낌에 행운이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였다. '오늘의 행운은 이 카페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 좋은 곳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한 명도 없었고 주문을 받는 사람은 이 카페를 정성껏 가꾼 주인인 거 같았다.


가구 하나, 벽에 걸려있는 그림과 장식, 잔 하나하나 발품 팔고 고심해서 선별한 듯한 물건들로 채워져서 하나의 독특한 느낌과 아우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기분 좋은 공간에는 그런 게 있다. 남들이 멋지다고 하는 유행하는 것들을 생각 없이 채워 넣은 공간에는 차가운 느낌이 든다. 겉으로 보기엔 번지르르하고 나쁘지 않은데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는 곳들이다.


이 카페는 주인의 취향과 정성이 느껴졌고 그 취향이 나와도 맞아서 좋았다. 천장 쪽 크랙에 꽃을 끼워 넣는 섬세함이 좋았다. 나 같은 사람이 발견해 주길 기다리는 그런 한 번의 손길, 고심 끝에 골라낸 오브제가 한 단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분위기를 풍긴다.

저 위 크랙에 꽂혀있는 꽃을 찾아보세요


그런 장소들을 찾아다닌다. 그곳의 주인이 오랜 시간 경험하고 추구해서 꾸며진 공간에서 느껴지는 스피릿이 주는 힘이 있다. 특히 그 취향이 나와 맞을 때 느껴지는 미감과 아늑함은 사춘기 시절의 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때의 기분은 결코 사소하지 않았다. 난 그래서 자연도 좋지만 도시의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이런 장소들을 찾아내고 방문하는 걸 좋아한다. 가장 나다운 날 기억나게 해 준다.


지나다니다 발견한 소품가게, 서점, 주인의 안목을 보여주는 특이하고 예쁜 옷을 파는 옷가게, 액세서리 가게들을 구경하고 맘에 드는 것을 하나씩 사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그렇게 정성껏 준비해서 파는 물건은 나도 오래도록 아끼고 좋아하며 사용하게 된다.


라테 한 잔을 주문하고 작은 수첩에 끄적거리며 한 시간쯤 그 공간을 만끽했다. 점점 사람들이 채워지기 시작할 때 밖으로 나와 계속 걸었다. 그렇게 한성대입구 주변을 걸어 다니다 버스를 타고 교보문고로 향했다. 교보문고에서 <플라뇌르, 산책자> 책을 사고 보고 싶었던 다른 책들을 살펴보고 오늘의 산책을 마쳤다.


한 작가의 산책에 대한 글 한편이 나를 다시 움직이게 하고 좋아하는 걸 다시금 생각해 내고 행동하게 했다. 플라뇌르라는 단어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이 기분을 글로 쓰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보낸 시간들은 다시 별을 보는 나로 되돌려 놓았다.


인간은 잠시라도 정신을 놓으면 부정적이고 나쁜 것으로 자석처럼 끌려가는 존재이기에 책 속의 멋진 글 한 편의 반짝임이 필요한 순간들이 많다. 그 반짝임은 내가 좋아하는 것,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빛을 비춰준다.


텔레비전, 핸드폰 속 세상과 그 세상 속에 푹 절어 사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를 자꾸 끌어내린다. 자꾸자꾸 끌어내려져 다시 올라갈 힘을 내기 힘들 때 책을 펼친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정혜윤 작가의 새 책이 나왔다. <책을 덮고 삶을 열다>라는 책의 모든 문장에 줄을 치고 거기에 나온 모든 책을 읽어보고 싶다. 좋은 책은 내가 해야 할 일을 기억해내게 해 준다.


“좋아하는 삶을 살 방법은 그것에 대해 자꾸 이야기하는 것밖에 없다. 이 주문은 나를 꼭 릴케의 시구처럼 만들어 준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지 말고 별을 보고 울어라’ 주문이 길 때도 있고 짧을 때도 있지만 기본 형태는 이렇다. 몇 번이고 다시 경험하고 싶은 가벼운 이미지의 순간들 빛나는 순간들을 모아 만든 것이다.”


이런 글들이 날 살린다. 브런치에 1년 넘게 그림 그리는 이야기만 쓴 거 같아 그만해야 하나 고민이 많았다. 좋아서 하고 또 하면서도 이제 그만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나를 살리는 일이었다고 말해줘서 안심이 됐다. 내가 원할만큼 해도 된다고, 아니 해야 한다고 말해줘서 좋았다.


현실의 사람들이 지겨워할 거 같다는 쓸데없는 고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자꾸 기억해 내고 이야기하는 것이 나 자신으로 사는 길이라고 해주어서 좋았다.


책은 나를 옳은 방향, 나를 내가 되게 해주는 방향을 제시해 준다. 늘 반짝이며 그 자리에 있던 것을 발견하게 해 준다. 생활 속에 파묻혀 잊어갈 때 책을 읽어야 할 이유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매력적인 청파동 골목길 산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