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소드 1: 지원과 만남
국토지기: 우리의 길
에피소드 1: 지원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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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비빅’
나른한 오후의 정적을 깨뜨리며 핸드폰에서 문자 수신음이 울렸다.
대학시절 국토순례를 함께 했던 후배가 보낸 것이었다.
발신자 이름 앞에 ‘kukto'라는 단어가 보이자 갑자기 가슴 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솟아올랐다.
잊고 있었던 국토지기 열병이 다시 도진 것이다.
몇 년 동안 서로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 통화조차 하지 못한 터라 서먹한 느낌이 들었다.
뭐 좋은 소식이라도 있느냐고 문자를 보냈더니 이번 달에 결혼하는데 청첩장 보낼 주소가 궁금하다고 답장이 왔다.
선약이 있어서 결혼식에는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면서 행복을 빌어주었다.
저녁에 노트북 국토지기 폴더에 저장해둔 사진들을 꺼내 보았다.
가장 환한 미소와 열정적인 모습을 가진 그가 그 안에 있었다.
하는 일이 잘 안 될 때, 실망하고 좌절할 때, 몸이 아파서 힘들 때, 사랑과 우정 때문에 괴로울 때 힘이 된 사진들이다.
사진을 보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시간여행을 하듯 빛처럼 빠르게 국토지기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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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화면이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달빛이 창가를 스치고 있었다.
시간은 새벽 두 시.
하지만 그는 잠들 수 없었다.
모니터 한가운데 커다란 글자가 선명하게 떠 있었다.
‘국토지기 국토순례단 지원서’
이름: 강민우
나이: 22세
지원 동기: (빈칸)
그는 손을 머리 위로 올려 기지개를 켜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원 동기란에 무슨 말을 써야 할까?’
‘뭔가 인생에 새로운 걸 해보고 싶어서?’
‘그냥 친구가 하라길래?’
도무지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화면을 들여다봤다.
이름이 ‘재훈’으로 떠 있었다.
그는 천천히 전화를 받았다.
“야, 너 아직도 안 했냐? 얼른 지원하고 자라.”
“나 진짜 가야 할까? 이거, 너무 힘든 거 아냐?”
“어휴, 됐고. 너 평생 이런 거 해볼 기회 없을 거다. 완주하면 추억도 남고, 뭐라도 얻어가겠지.”
재훈은 가볍게 말했지만, 민우는 여전히 고민스러웠다.
‘내가 끝까지 걸을 수 있을까?’
‘이걸 하면 뭐가 달라질까?’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상한 기대감이 꿈틀거렸다.
‘정말 아무것도 얻는 게 없을까?’
그는 결국 마우스를 움직여 지원하기 버튼을 눌렀다.
‘클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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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테이션 날이라 강당은 떠들썩했다.
100여 명이 넘는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긴장과 설렘이 교차하는 표정들.
민우는 조용히 강당 한 쪽에 서서 분위기를 살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왔어요. 대학생활 동안 뭔가 의미있는 추억을 남기고 싶어서 참가하게 되었어요.”
“지는 대구에서 왔습니더. 웡카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는데, 이건 완저이 새로운 도전 같데예.”
“아따, 허벌나게 반갑구마이. 나가 광주서 왔는디, 눈으로 직접보니 스케일이 확실히 달러야, 달러.”
“지는유 청주에서 왔구먼유. 앞으로 어떤 일들이 펼쳐질지 너무 기대가 많이 되구먼유.”
”저는 강원도 원주에서 왔어라. 산 넘고 물 건너서 오느라 힘 마이 들었지만 와보이 참말로 좋네요.“
사람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조금씩 어색함을 풀어갔다.
하지만 민우는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이곳에 왜 있는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 무대 위로 한 여자가 올라섰다.
그녀는 단정한 묶은머리에 깔끔한 등산복을 입고 있었다.
목소리는 맑고 단단했다.
“여러분, 앞으로 한 달 동안 같이 걸어가게 될 조장 이서연입니다. 서로 도와가며 끝까지 완주합시다.”
강단있는 말투에서 강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민우는 그런 그녀를 보며 순간 주눅이 들었다.
‘나는 일주일도 못 버틸 것 같은데’
조원들이 차례로 자기소개를 했다.
“나는 박태성! 군대에서 행군만 수십 번 했으니까 다들 내 말 잘 들어!”
민우는 태성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 이런 유형은 너무 힘들겠는데?’
조용한 구석에 앉아 있던 유민준은 말없이 분위기를 살폈다.
의료팀원인 최지우가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모두 건강하게 완주합시다. 의료팀에서 최대한 도울게요.”
민우는 조원들을 보며 점점 불안해졌다.
‘이 팀, 만만치 않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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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퍼지는 저녁, 캠프파이어가 타올랐다.
불꽃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춤을 추었다.
국토지기 임원진들은 행사 전야제 준비로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전야제 사회를 맡은 대원이 진행 순서를 알려주었다.
“전야제는 각 조별 장기자랑과 조 구호, 조가 발표로 진행되겠습니다.”
각 조별 맨 앞에 조장들이 들고 있는 깃발들을 보니 조 이름부터가 특이했다.
웃조, 오직이조, 무대뽀조, 에너자이조, 못먹어도고조, 깡이조, 휘모리조, 왕초조 등 기발한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민우는 7조 휘모리조 소속이었다.
휘모리조 순서가 되자 조원들이 모두 무대에 올라 조구호를 외쳤다.
“7조 휘모리! 짝짝짝짝짝! 7조 휘모리! 짝짝짝짝짝! 7조 휘모리! 짝짝짝짝짝! 야!!!”
조가는 대부분 가요나 동요를 개사해서 재미있게 만들었다.
휘모리조는 ‘아기공룡 둘리’ 주제곡에 맞춰서 노래와 율동을 준비했다.
“요리보고 저리봐도 음음 알 수 없는 휘모리, 휘모리”
“버스타고 달려와 으흐음 친구를 만났지만”
“일억년 전 한반도가 너무나 그리워”
“보고픈 동포 찾아 모두 함께 나가자 하아 아하”
“기운센 휘모리는 천하장사 국토지기”
“호이! 호이! 휘모리는 초능력 내 친구”
분위가 무르익을 무렵 ‘스타킹’ 프로그램에 나올 정도로 실력이 출중한 깜짝 스타가 등장했다.
부산에 사는 25살의 청년이 주인공이었다.
그는 모 그룹의 팬클럽 지역회장을 맡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기타를 치며 반주를 했다.
노래가 시작되자 무대는 순식간에 광란의 해변가 콘서트로 변했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사람”
“누가 뭐래도 그대는 꽃보다 아름다워”
“국토의 온기를 품고 사는 바로 그대 바로 당신”
“바로 우리 국토지기”
전야제는 전국의 재주꾼들이 모여서 전국 노래자랑 연말 결선을 벌이는 것처럼 뜨거운 열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민우는 그런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캠프파이어 불꽃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일부터 30일 동안 걸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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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야제를 마치고 대원들은 취침 준비를 했다.
대원들이 세면을 하고 나자 임원진들이 조별 텐트를 돌며 점호를 했다.
텐트 안에서 박태성이 중얼거리듯 말했다.
“군대에서만 이런 것을 할 줄 알았는데 감회가 새롭네.”
잠시 후 임원진들이 불침번과 주의 사항을 확인시키고 본부로 돌아갔다.
민우는 텐트 안에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거, 시작부터 쉽지 않겠는데?‘
텐트 안에서는 조원들이 한두 명씩 잠들어갔다.
누군가는 마지막 농담을 주고받았고, 누군가는 피곤에 지쳐 금세 잠에 빠져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묻어서 부드럽게 불어오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옆자리에서 코고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드르렁 드르렁’
민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예상 못 했다.
첫날부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국토지기의 첫날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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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화 예고: 2화 첫 행군, 첫 번째 위기
“첫 행군이 시작된다. 예상과 전혀 다른 현실. 물집, 땀, 피곤함. 그리고 예상치 못한 첫 번째 위기. 민우는 견딜 수 있을까?”
전국 대학생 국토순례단 국토지기(Since 1999) http://www.kukto.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