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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Jan 05. 2024

아이들은 살아냈다 _영화 괴물(2023)을 보고

스스로 살아낸 아이들에게

 사춘기가 온 걸까. 수상한 흔적을 발견할 때마다 사오리는 누구보다 불안해졌다. 물통에 흙이 들어 있었고 신발 한 짝은 갑자기 사라졌다. 밤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던 아이는 폐쇄된 터널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사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노력해서 미나토가 '평범한 가정'을 이룰 때까지 도울 거라고.


  사오리는 미나토에게 말했다. 미나토가 성장해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을 때까지. 다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던졌던 말은 미나토에게 닿지 못하고 아스러졌다. 미나토가 달리는 차량의 문을 열고 뛰어내렸으니까. 사오리는 미나토에게 생긴 변화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 미나토는 금방이라도 날아갈 것처럼 위태로웠다. 결국 사오리는 미나토를 몰아붙여 원인을 찾아냈다. 원인은 바로 담임 선생님인 호리라고.


  사오리의 시점에서 선생들은 괴물이었다. 당사자인 호리를 만나는 일은 고사하고 기계적인 사과와 매뉴얼에 의한 행동이 반복하는 그들. 사오리는 점차 이성을 잃어버렸다. 진심이 벗겨진 사과에 상처받고 고립될수록 사오리는 호리를 더욱 의심했다. 내 아이의 변화에는 분명 호리가 있을 거라고 믿으며.


괴물(2023) 스틸컷

  사오리의 눈에 호리는 죄를 인정하지 않는 최악의 어른이었다. 교장과 다른 선생이 시키는 대본을 줄줄 읽는 선생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 하지만 그 사람에게서는 뜻밖의 사실이 흘러나왔다.

  미나토가 요리라는 아이를 괴롭히고 있다는 이야기.


  호리의 이야기에 사오리는 진실을 알기 위해 요리를 찾아갔다. 돌보는 어른 없이 능숙하게 생활하는 아이. 미나토가 괴롭힌 적이 없다는 말에 사오리는 누구보다 안심했다. 게다가 리는 호리가 미나토를 괴롭혔다는 말을 전했으니까.


  사오리의 시점에서 세상은 가혹했다. 소중한 아들에게 문제가 생겼지만 학교는 기계적으로 행동하기 바빴다. 아이를 위해 바쁘게 움직였지만 어째서인지 감정은 켜켜이 쌓여만 갔다. 공개적으로 호리가 학교를 떠나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사오리는 안심할 수 없었다. 미나토는 여전히 사오리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으니까.


괴물(2023) 스틸컷

  아이를 학대한 선생님. 엄마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학교에서 쫓겨난 어른.

  호리의 시점으로 바뀐 영화는 사건의 이면을 비추기 시작했다. 유난히 눈에 밟히는 아이. 사건을 주시하던 호리는 미나토가 리를 괴롭히고 있다고 생각했다. 괴롭힘이 일어난 현장에 항상 미나토가 있었으니까. 그날의 사건 역시 호리의 시점에서 미나토가 친구들의 가방을 던지는 걸 말리려다가 발생한 것이었다.


  사오리가 처음 학교에 찾아왔을 때 호리는 사건에 대해 직접 전달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민원인을 빠르게 대처하겠다는 명목하에 둘 사이에 거리를 벌렸다. 사건은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학교는 호리의 입을 막았고 사오리의 분노는 나날이 두터워졌으며 그 사이 아이들은 빠졌다. 진실이 감춰진 사건에 괴물이 들끓었다. 자극적인 기사를 내며 괴물 선생님의 이미지를 만드는 것으로.


  사건의 진실은 무엇인가. 모두에게 그런 일은 중요하지 않았다. 학교는 시스템을 지키기 위해 호리를 가해자로 몰아갔다. 사오리는 미나토에 대한 걱정과 학교의 안일한 대처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지 못했다. 휘몰아친 감정은 그녀의 눈을 가려버렸다. 호리는 모두에게 완전한 가해자가 되어버렸다. 맹목적인 시선이 개인을 나락으로 몰아붙인 것이다.


  호리는 결국 학교로 미나토를 찾아가 물었다. 왜 거짓말을 한 것이냐고. 궁지에 몰린 호리는 흔들리는 미나토의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진실을 은폐하고 쫓아버린 학교의 어른도, 거짓말을 한 아이들도 그의 눈에는 낯선 괴물로 비칠 뿐이었다. 궁지에 몰린 호리는 끝끝내 미나토가 거짓말을 한 이유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이들의 마음이 담긴 글을 발견하기 전까진.


  영화는 어른의 시간을 지나 두 아이의 시점으로 되돌아온다. 유난히 밝은 빛이 드리운 두 아이의 시간. 사건이 일어나기 더 이전의 이전의 하루들. 영화는 이제 사건에서 벗어나 두 아이의 관계를 비춘다.


돼지의 뇌를 이식한 인간은 인간일까, 돼지일까.


  미나토는 엄마에게 물었다. 스치듯 물었던 한마디에는 미나토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혼란스러운 겹겹의 마음이 쌓여 만든 질문. 질문을 만든 대상은 리였다. 자신의 뇌를 돼지의 뇌라고 말하는 아이.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해도 툴툴 털고 일어나 앞을 나아가는 존재. 학교 안에서 두 아이는 시선이 만든 차별에 의해 거리를 두었다. 리에게 장난이라고 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아이들 때문이었다. 관계가 드러나는 순간 미나토 역시 괴롭힘의 대상이 될 테니까. 학교에서 친한 친구가 생겼다며 기뻐하는 리에게 미나토는 말한다. 학교에서는 아는 척하지 말아 달라고.


괴물(2023) 스틸컷

  함께하는 날이 쌓여갈수록 두 아이는 가까워졌다. 둘만의 아지트인 기차에서 서서히 감정을 쌓아갔다. 감정이 탑을 이루자 미나토는 학교에서 마주하는 현실이 괴로워졌다. 다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요리를 볼 때마다. 괴롭힘이 자신에게 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멈칫하는 순간들이.


  요리와 함께했던 순간만큼 미나토의 세상에는 변화가 생겼다. 보이지 않았던 우글거리던 차별이 미나토의 시선에 가까워졌다. 관객은 미나토의 시선에서 스치듯 지나갔던 차별의 시선을 다시금 마주한다. 여자아이 같은 행동을 한다며 요리를 집요하게 괴롭히는 남자아이들의 시선에서. 무심코 아이들에게 남자답게 행동하라는 말을 전하는 호리의 말에서. 요리에게 돼지의 뇌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전하는 아이의 아버지에게서.


  관객은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주는 고통의 무게를 마주한다. 평범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상에서 아무렇지 않게 쓰이던 단어가 아이들에게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박혔다. 남자아이답게 라는 말도,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평범한 가족을 이루어 보라는 사오리의 말도 결국에는 다수가 생각하는 기준에서 비롯된 말이었다. 


요리는 요리로, 미나토는 미나토로. 


영화는 거리를 좁혀 두 아이의 마음을 담아 관객에게 비춘다. 당신은 평범함이라는 단어가 숨겨 놓았던 폭력적인 기준에 대해 바라보고 있는가. 무심코 던진 말이 누군가의 마음에 비수가 되었던 것은 아닌가.


  요리가 전학을 갈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들었던 그날, 미나토의 감정은 결국 폭발했다. 켜켜이 쌓여갔던 알 수 없었던 감정은 마침내 빛깔을 드러냈다. 사랑. 빛깔이 드러난 감정을 미나토는 감당하지 못했다. 리가 떠나는 것만으로 괴로워질 만큼 사랑했지만 두려움이 컸다. 모든 게 혼란스러운 미나토를 리는 꼭 안아주며 말했다.

  알아, 무섭지. 나도 그랬어.

 

  폐쇄된 터널에서 사오리를 만났던 그날, 미나토는 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먼저 미나토를 찾는 바람에 둘은 만나지 못했다. 사오리의 시선에서 알 수 없는 행동을 반복했던 지난날들은 리와 나눈 감정의 산물이었다.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린 건 리를 만나기 위해서. 돼지의 뇌를 가진 인간에 대해 이야기한 건 호리의 말이 아닌 리와 나눈 대화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던 미나토는 교장 마키코와 마주쳤다. 마키코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털어놓는 미나토. 괴로워하며 괴물이 되어버린 자신은 더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담담히 미나토의 이야기를 듣던 마키코는 미나토에게 말했다.


가질 수 없는 것은 행복이라고 부르지 않아.


  마음에 솔직해졌을 뿐인데. 미나토는 자신을 괴물이라고 말한다. 장난이라며 차별의 시선이 가득한 폭력을 휘두르던 아이들도, 학교를 지키기 위해 호리를 희생시켰던 어른들도, 진짜 괴물들이 마주하지 못한 왜곡된 세계를 미나토는 마주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쉽게 말하는 행복의 무게를 미나토는 마음에 쌓여가던 돌덩이만큼 감당했다. 비밀을 만들어 감추면서까지 지켜내고 싶었던 소중한 마음을 말이다.


  마키코는 미나토에게 호른을 건네주었다. 후 불어서 소리를 내어보라는 말과 함께. 마키코와 미나토는 각자의 악기를 들고 마음을 담아 후 하고 내뱉었다. 진짜 마음을 담아. 괴물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서.


괴물(2023) 스틸컷

  폭풍우가 치던 날 밤, 미나토는 위험을 감수하며 리를 만나러 갔다. 욕조에 잠겨 금방이라도 숨을 거둘 것 같은 리를 세상 밖으로 끌어낸 건 미나토였다. 두 아이는 금방이라도 붕괴할 것 같은 세계를 등지고 둘 만의 아지트로 향했다.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마주한 두 아이들은 어두운 터널을 지나 폭풍우가 지나간 세상 밖으로 나아갔다. 여전히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고 두 아이는 다시 태어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두 아이는 웃으며 달렸다. 다시 태어나지 않아도 되니까. 결국 그대로인 자신을 받아들였으니까.


있는 그대로의 '나'로 세상을 살아낼 거니까.


괴물(2023)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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