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많은 학문, 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철학이나 사회학에서 많이 다루는 주제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이룩한 문명적 성취의 상당수는 죽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노력으로 탄생한 것들이다. 죽음은 인류가 부족을 결성하면서부터 사회적 의미를 가지게 됐다. 죽음이라는 공포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부족의 결속은 유지되기 힘들었을 것이고 때문에 구성원의 죽음은 집단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여기서 종교와 장례의식의 역할이 생겼다. 죽음의 극복은 종교적이거나 영적인 영역의 도움으로 승화되는 형태로 나갔다. 이러한 형태의 극복은 현대에 와서도 기능하고 있다.
한국은 죽음과 관련된 여러 지표들이 상반된 메시지를 주는 나라 중 하나다. 우선 한국의 기대수명은 OECD국가 중 상위권(2023년 기준 6위, 83.5세)에 위치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하듯 전반적인 건강 지표들 또한 평균을 웃돌고 있으며 특히 의료기관이용률은 평균에 비해 약 3배에 달한다(2023 기준 한국 18회, OECD평균 6.5회). 한국 사람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느끼는 사회 분위기처럼 건강에 관심이 많고 신경을 쓰고 있으며 그만큼의 기대수명을 누리고 있다.
이렇게 한국사람들은 죽음을 피하는데만 관심이 있어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반대되는 지표도 있다. 바로 자살률이다. 한국은 OECD국가 중 자살률이 압도적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국가다. 2024년도 조사의 결과로는 10대부터 40대까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며(50대의 사망 원인 2위도 자살) 한 해 자살로 총 14872명(만 4천 87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수치는 하루에 40명 이상이 자살로 명을 달리한다는 말이며 40분당 한 명이 사망하고 있다는 말이다. 2011년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문화 조성을 위한 법률'이 제정되었고 이후 몇 차례 개정이 있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했고 최근 2년 사이에는 다시금 악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이는 제도적 보충과 노력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그 외의 다른 차원의 것들이 필요함을 말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최근 높아지는 장례비용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이 나오고 있고 실제로 평균 임금 대비 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장례비용을 지불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장례의식은 앞서도 이야기했던 것처럼 유구한 역사 속에서 죽음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나온 것이고 지금도 그 역할을 수행하는 만큼 대부분의 나라에서도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죽음은 모든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이고 여전히 이를 극복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의 건강 염려 및 돌봄 유행이나 앞서 제시한 의료기관이용률을 보면 한국 사람들은 유독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삶의 유지에 신경을 쓰는 듯 보인다. 강한 두려움은 종종 대상(죽음)에 대한 회피로 이어지는 모습을 우리는 자주 목격한다. 또한 한쪽에서는 이렇듯 죽음의 회피에 신경을 쓰기 때문에 다른 한편에서 벌어지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에 대한 이해가 떨어질 수 있다. 이는 곧 자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누군가가 삶의 힘듦을 토로하고 극단적으로 죽고 싶다는 표현을 할 때 '야! 누구나 다 힘들어!'라거나 '왜 약한 소리를 해?'라고 하기보다는 따뜻한 위로나 공감의 말을 던지라는 '교육'을 받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태도는 이제 상식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말이 큰 효과가 있었다면 지난 몇 년간의 제도적 노력과 더불어 결과로 나타났을 것이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긍정성의 폭력(Gewalt der Positivität)' 개념에 비추어 보면 긍정의 과잉은 누군가의 힘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결과의 귀책을 자신에게 돌리게 할 수 있다. 즉, 일시적으로 그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국 이는 사람이 자기 착취(Auto-Exploitation)를 하게 만들고 이에 대한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다면 더 큰 좌절로 빠지게 할 수 있다. 결국 이는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게 하는 것이고 앞선 '교육'의 내용은 그 예방까지 개인에게 돌리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자살의 원인을 몇 가지로 이 자리에서 특정 짓고 해결책을 낼 수는 없겠지만 지금까지의 검토를 보았을 때 조금 더 사회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을 거 같다. 구성원들에게 행위가 아닌 행동의 기회, 즉 사회적 접촉을 늘리고 교류를 늘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과거에는 이런 것들이 개인의 문제였지만 지금은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2020년부터 2023년에 이르는 시간은 제앙이었다. COVID-19는 팬데믹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각인시켰다. 이 3년여의 시간은 우리의 생활양식을 바꾸기에 충분했고 특히 어린 구성원들의 사회적 관계 학습에 영향을 줄 충분한 기간이었다. 이 시기 질병의 전파를 막기 위해 사회적으로 자가 격리의 상황이 이어졌고 이 영향으로 팬데믹 이후 만남의 형태나 만남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바뀌게 되었다. 우리의 사적 만남은 이제 공적 장소에서만 주로 이뤄지며 이 시기 사회적 관계 학습의 기회를 잃은 층에서는 관계의 의미를 인지하지 못하거나 관계를 맺는 방법 자체를 잃었다.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생활세계의 식민지화(Kolonialisierung der Lebenswelt) 개념에서 보면 생활세계에서 우리는 의사소통 행위를 통해서 관계를 맺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여기에 체계(System)가 개입한다. 체계는 전략적 합리성(strategische Rationalität)으로 조정되며 이 조정의 매체는 돈(Geld)과 권력(Macht)이다. 여기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효율성이며 이 속에서 관계는 산업화가 되거나 상업화된다. 우리가 대부분의 만남을 공적 공간에서 가져가게 되고 만남 자체의 가치를 상실하면서 '만남=비용'이라는 등식이 성립되게 되었다. SNS의 영향으로 타인의 만남을 관찰할 기회가 늘면서 만남의 형태가 규정되고 더더욱 만남을 비용으로 여기는 태도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관계의 극단화를 야기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돈이 없는 사람일수록 관계에 대한 부담과 두려움을 가지게 되며 이 때문에 관계를 섣불리 맺으려 하지 않고 소위말해 관계에서 '재는'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상대가 비용을 지불할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판단이 선행돼야 실질적 관계가 이뤄질 수 있는 시도가 일어난다. 당연히 이러한 태도와 인식은 관계의 범주를 극단적으로 좁히거나 관계를 단절시킨다. 그리고 당연히 심리적, 정신적으로 부정적 상황을 야기할 가능성을 높인다. 최근 언급되고 있는 '은둔 청년'현상은 일부 이 내용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I only wanted to be part of something
나는 그저 무언가의 일원이 되고 싶었을 뿐이야
- The Emptiness Machine中 (by Linkin Park)-
우리가 관계를 맺는 것은 어딘가에 속한다는 느낌을 통해 유대를 확인하고 안정을 얻기 위함이다. 이것이 무너지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하지 않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토머스 조이너(Thomas Joiner)는 '왜 사람들이 자살을 통해 죽을까?'라는 어찌 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질문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그 과정을 통해 자살을 하게 되는 세 가지의 조건을 정리했다. 첫 번째는 좌절된 소속감(thwarted belongingness)이다. 내가 어디에도 속해있지 않고 혼자라는 느낌으로 사회적 유대가 부재한 상황이다. 두 번째는 지각된 짐 됨(perceived burdensomeness)이다. 말 그대로 자신이 주변 사람이나 사회에 민폐를 끼치고 짐만 된다라고 생각하는 상황이다. 이 두 조건이 만족되면 사람들은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의 이론에 따르면 이 충동만으로는 실제 자살의 행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세 번째 조건은 습득된 자살 능력(acquired capability for suicide)이다. 자살이 가져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신체적 고통을 여러 자극을 통해 후천적으로 극복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앞의 두 조건, 소속감의 상실과 스스로를 짐이라고 여기는 상황이다. 앞서 설명한 관계의 단절과 관계 형성의 노하우 상실은 즉각적으로 소속감 상실을 야기한다.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실패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아질 수밖에 없다. 사회적 관계를 최소화하면 경제 활동의 기회 역시 축소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경제적 불안정성을 높이고 때문에 실패의 확률도 올라간다. 이렇게 경제 활동을 실패하면 부득이하게 주변이나 사회 시스템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이는 자기 스스로가 사회적으로나 대인 관계에서도 짐이라는 의식을 가지게 만든다.
여기서 어떠한 실질적 대안을 제시하기는 힘들다. 다만 앞선 분석들을 통해 자살과 관계의 단절을 해결하는 방안이 단순한 물질적 지원이나 만남의 장을 제공하는 것으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미 많은 구성원들이 관계를 '전략적 행위(strategisches Handeln)' 측면에서 바라본다. 앞서 말한 '만남=비용'의 도식으로 비춰봤을 때 이러한 구성원들에게 만남이 실질적 이익을 보장하지 못한다면 그들이 관계 맺기의 장으로 나올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다. 설령 이들에게 의료적 지원으로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적 질병을 치료할 기회를 제공해 줘도 생활환경의 변화가 없다면 이들은 다시금 그 상태로 회귀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지금보다 조금 더 폭넓게, 그리고 다양한 측면에서 접근해야 한다.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죽음은 우리의 본능에 반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이를 누군가는 자살을 한, 혹은 시도한 이들을 비판할 때 쓰기도 하지만 반대로 이 본능에 반하는 행위를 하기까지의 고통은 우리가 그렇게 쉽게 짐작할 수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본능에 따르는 존재이고 삶을 유지하는 것은 그 본능 중 가장 근본에 있는 것이다. 그 본능을 거스른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대가를 치른다는 것이다. 저들이 왜 그렇게 큰 대가를 감수하면서 까지 저런 선택을 내렸는가는 같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관심 가져야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