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야.'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다. 사람은 바뀌지 않기 때문에 누군가를 바꾸려 하는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말이다. 우리가 살아가며 쌓는 경험은 이를 증명하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적 증거에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 만약 성인까지 인간은 변화할 수 있고 그 이후에는 변화가 멈춘다면 우리는 모든 성인의 생각과 행동을 어느 정도 큰 틀에서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이를 이용할 수 있다(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는 뜻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개인의 행동은 변화무쌍하며 그들이 구성하고 있는 사회도 각 사회별 차이는 있지만 역동적으로 변화한다. 즉 이들은 고정된 형태로 지속하지 않는다.
잠깐 다른 이야기를 해 보자. 우리는 모두 프랑스 시민 혁명에 대해 알고 있다. 이게 근대 민주제의 시작을 알리는 선언과 같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봉건제는 토지를 중심으로 형성된 권력과 돈을 모두 왕과 귀족이 소유한 시스템이었다. 그러다 중세가 끝날 무렵부터 자본을 소유한 개인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막대한 자본을 소유하고도 넘을 수 없는 계급적 한계에 불만을 가진다. 그러던 중 계몽주의자들의 이론과 결합하게 되면서 계몽을 통해 불합리한 현실을 알려주면 '시민'이 된 대중이 들고일어나 이 사회를 개혁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실제로 혁명은 일어났고 체제는 전복됐지만 사회는 극심한 갈등 속에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몇몇 학자들은 회의를 느끼고 역사의 흐름은 조성하거나 이를 끌고 갈 수 없다고 늘 진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결국 이 사건은 민주제가 근대 이후 거의 모든 사회의 정치제도가 되도록 하는 기폭제가 된다. 이는 사람들의 변화로 인해 벌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당시 학자들이 얻어낸 일부의 깨달음처럼 누군가에게 이끌렸다고 볼 수 없다. 이 사건 이후에도 인류는 크고 작은 변혁(긍정적이기도 부정적이기도 한)을 겪었고 그에 대한 분석에서 특정한 개인들의 이름이 나오기도 하지만 몇몇 개인에 의해 이러한 거대 사건들이 발발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됐다. 이 변화를 추동하는 것은 시민들의 변화였다. 시민은 결국 개인들의 집합(단순한 집합만을 의미하지는 않지만)이기에 이는 개인의 변화하고도 이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개인은 언제 변할까? 혹은 어떤 조건에서 변화할 수 있을까?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은 교육이나 일반적인 경험을 통해 변화해 갈 수 있다. 이들은 아직 제대로 된 자아가 형성되기도 전이다. 이러한 유동성으로 인해 과거 계몽주의자들의 이야기처럼 조정되고 형성될 수 있다. 하지만 성인이 된 개인은 일반적인 방식으로 바뀌기 힘들다. 이들은 여러 경험으로 이미 나름의 확고한 관점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경직성은 때로는 긍정적으로(신념이라는 형태로) 드러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고집과 같은 부정적인 형태로 드러난다. 때문에 이들은 단순한 가르침, 경험, 감정으로는 잘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어떠한 경험을 통해 자신이 바뀌었다고 하는, 특히 긍정적으로 바뀌었다고 하는, '간증'을 여기저기서 듣게 된다. 그것은 성공담의 형태로, 혹은 인생을 뒤흔든 교훈의 형태로 전파된다. 그들이 경험을 통해 느낀 감정이나 깨달음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나 저렇게 많은 사람들의 경험담이 모두 사실이라면 반대로 사람이 쉽게 안 바뀐다는 말이 이렇게 널리 공유되지는 않을 거라고 본다. 보통 이러한 증언은 자신의 성공이나 자신이 변화했다는 결과를 중심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찾아진 것들이다. 그것이 모두 거짓은 아니지만 온전한 진실은 아닐 수도 있다. 앞선 글들에서 필자가 이야기한 어떠한 상황에 처했을 때 자신이 모르던 자신의 모습이 발현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심은 나의 아주 못된, 어떤 이야기를 쉽사리 의심하는, 성격에만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개인적 경험도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나'라는 개인을 변화시키기에는 약한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변화는 감정의 동요로 시작한다. 개인의 경험들도 당연히 감정을 자극하지만 이것은 대부분 제대로 된 변화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이는 마치 자기와 한 약속과도 같다. '내일부터 운동을 꾸준히 할래.', '내일 아침부터는 일찍 일어나야지.'와 같은 형태의 다짐은 오래가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이 행동이 아무하고도 연결돼 있지 않으며 이 다짐을 어겼다고 해서 나에게 피해가 오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이 어떠한 경험을 통해 각성을 하게 되거나 사고의 전환을 맞이했다고 해도 이는 방금 말한 고립된 감정이기에 일시적으로만 작동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때문에 이 상태를 유지시키거나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이를 통해 변화를 통한 경험이 축적되도록 해야 한다. 변화라는 낯섦이 주는 스트레스와 고통 앞에서, 그리고 이전 상태로의 회귀가 나에게 큰 피해를 주지 않고 때로는 그 사실을 누구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변화된 상태를 포기하고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렇게 회귀로만 끝나면 사실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행위와 선택의 결과를 납득할 수 있는 형태로 인지해야 한다. 때문에 자신이 되돌아간 이유는 보통 기존의 것이 좋았기 때문으로 치환된다. 자연스러운 자기 합리화의 과정으로 이러한 흐름은 때로는 한쪽으로 치우친 도덕으로써 개인에게 쌓인다(물론 모두가 칸트의 주장처럼 보편성 원리에 따라 자신의 도덕 준칙을 세우기는 쉽지 않다). 이러한 과정은 변화라기보다는 편향된 형태로의 고착화다.
그러면 우리를 확실하게 변화시키는 것은 무엇일까? 결론을 이야기하면 그것은 바로 참여다. 우리는 어딘가에 참여해서 변화할 기회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그 변화는 개인의 경험처럼 일시적이 않다. 왜 참여는 개인차원의 경험을 넘어설까? 우선 참여가 불러일으키는 감정은 개인적이기보다는 집단적이다. 참여의 상황에서 우리는 이 감정을 나만이 느끼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당연히, 그리고 자연스럽게 연대의식을 형성한다. 이를 통해 내가 참여하고 있는 활동과 내가 느끼는 감정이 보편적이며 올바르고 정당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된다. 즉, 행위의 도덕적 근거와 윤리적 근거를 인지하고 확인하게 된다. 이들은 아주 강력하게 나의 행위를 변화시키고 유지시키는 힘이 된다.
이러한 내용을 뒷받침하는 몇 가지 이론들이 있다.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은 '집단적 열광(effervescence collective)'라는 개념을 통해 종교적 의식과 같은 집단의 행위가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감정적 에너지를 발생시키고 이는 개인의 도덕성과 정체성을 새롭게 확장시키며 사회적 연대를 강화시킨다고 했다. 또 다른 이론으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행위에 대한 설명을 들 수 있다. 아렌트는 인간의 활동을 노동(Arbeit), 생산(Herstellen), 행위(Handeln)로 구분하고 이 중 행위는 공적 영역(öffentlicher Raum)에서 타인과 주고받는 활동을 뜻하는 것으로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드러내고 새로운 시작을 만들어 낸다고 말했다. 즉 우리는 다른 이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강력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고 이를 통해 변화해 갈 수 있으며 이러한 변화는 개인의 차원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와도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참여가 늘 긍정적인 변화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참여하게 되는 활동의 성격과 목적이 극단적이거나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면 당연히 위에서 설명한 효과가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동하게 된다. 과거 인류 역사에 큰 오점을 남겼던 파시즘이나 최근 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일탈 수준의 극우적 주장과 활동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지지가 한 예시가 될 수 있다. 물론 이런 현상들의 근본적 원인을 이 이론으로 전부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과거라면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없을 이러한 행위들이 일부, 혹은 다수의 집단과 개인들에게 지지를 받는 현재의 상황을 일부 설명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짚어볼 것은 온라인을 통한 '참여'다. 우리는 온라인에서의 활동도 참여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경계할 측면이 있다. 2000년대 후반부터 전 세계적으로 있었던 여러 사회 운동들을 해석할 때 온라인의 역할은 빠지지 않는다. 일상적인 참여들도 온라인을 통해 조직되고 약속되곤 한다. 온라인에서의 활동이 물리적 참여를 더 강화하거나 확대하는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온라인 활동만을 참여라고 보기는 힘든 부분이 있다. 앞서 설명한 참여가 주는 변화의 힘이 온라인만을 통한 참여 및 활동에서는 매우 약해지거나 아예 작동하지 않는다. 온라인을 통해서는 물리적 참여를 통해서는 직관적으로 확인되고 느껴지는 공동의 활동을 하고 있다는 부분을 인지하기 힘들다. 온라인에서 상대는 텍스트와 그래픽으로만 확인되는데 이들이 모두 서로 다른 개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길이 없는 데다 직접적 참여에서는 보거나 듣는 직관적 형태로 확인되는 타인의 활동이 오히려 온라인에서는 읽거나 해석해야 하는 인지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무엇보다 참여에 들어가는 비용의 차이도 크다. 물리적 참여는 꽤나 큰 비용을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의지가 작용하게 되고 이 요소 역시 변화를 이끌어 내는데 주요 역할을 할 수 있다. 반면 온라인을 통한 행위는 거의 비용이 들어가지 않는다. 때문에 그 참여나 활동은 느슨해질 수 있고 의지의 개입이 매우 낮다. 더 나가 이 느슨하고 의지가 부족한 활동은 오히려 참여자들 간의 신뢰를 낮추고 심하면 결속을 와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변화가 무조건 선한 방향으로 향할지는 모른다. 앞서도 말했듯 과거의 파시즘이나 최근의 극우주의가 퍼져나가는 것을 보면 더더욱 경계할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부정적 흐름도 변화를 통해 다시 기존의 위치로, 혹은 더 나은 상황으로 전환할 수 있다. 참여는 그 행위에 동참하는 참여자들을 변화시키면서 사회 변화에 영향을 준다. 그 행위의 성격에 따라 직접적으로 사회 변화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참여자들이 변하면서 이뤄지는 간접적인 변화에도 영향을 준다. 참여는 이렇듯 마치 나비효과처럼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변화들을 이끌어낸다. 때문에 우리는 늘 적극적으로 여러 활동에 참여하되, 그 참여가 어떤 방향을 향하는지를 끊임없이 자문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