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살이 솔솔
바르면 새살이 돋는다던 연고의 유명 광고 문구다. 하지만 사실 이 연고가 포함하는 물질은 그저 상처가 덧날 확률을 줄여준다거나 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고 한다. 실제로 새살은 몸의 자가 복구 기능으로 돋아난다. 다시 말하면 상처는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회복된다. 감염을 조금 조심하고 청결을 유지하면 된다.
그럼에도 상처가 나면 우리는 언제나 연고를 찾는다. 상처가 주는 고통을 빨리 끝내고 싶어서, 조금이라도 빨리 다시 상처가 없었던 과거로 회귀하고 싶은 마음에 ‘해결책’인 연고를 찾는다. 상처는 아물어야 하고 흉터도 남아서는 안 되고 내 몸은 상처를 입기 전으로 돌아가 나는 상처를 입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해서는 안 되는 듯하다. 상처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그렇다.
신체적 상처는 보통 나의 부주의로 입는다.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면 피할 수 있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기억이나 감정의 상처는 보통 외부 요인에 기인한다. 예기치 못한 이별이나 사별, 상실 등 내가 신중하게 행동했다고 해서 예방할 수 있지 않다. 나의 잘못이 아닌 일들과 사건들로 머리와 가슴에 상처를 입는다.
이런 상처들은 사실 극복 방안이랄 것이 없다. 당장에 효능을 보이는 연고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를 빨리 털어내려고 노력한다. 고통을 잊으려고 다른 일을 하거나 술을 마시기도 하고 남들에게 하소연하기도 한다. 하지만 진짜 큰 일을 당하면 입을 다물기 일수다. 정신적 부담이 크고 스스로가 감당하지 못할 거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를 털어놓기는커녕 속으로 썩힌다.
어머니가 난치병 판정을 받으셨을 때 난생처음 정신적 힘듦을 주변에 토로한 적이 있었다. 원래 그러지 않던 성격이었기 때문에 당황했던 것인지 아니면 그들에게 받아들이기 힘든 무게였기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담스러운 시선과 어찌할 바 모르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다물 수밖에 없었다.
좋은 일은 나눌수록 커지고 나쁜 일은 나눌수록 줄어든다고 하지만 후자의 경우 그것도 정도껏일 때나 통용되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인들에 대한 서운함이나 미움의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나 또한 이 짐을 덜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털어놓은 측면이 있었으니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었다.
당사자인 어머니만 했겠냐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자괴감, 무력감이 들었다. 그것이 나름 꽤 크고 깊었던 거 같다. 일을 입에 올릴 때마다 조건반사처럼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상처는 아물었다. 적어도 그 일을 언급한다고 눈물이 흐르지는 않는다. 현실의 상황이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여전히 어머니는 병마와 싸우고 있고 무력한 자신의 모습이 극복되지도 못했지만 상처는 아물었다.
변한 것은 시간이 흘렀다는 것 밖에 없다. 내가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고 할 것도 없었다. 몸의 상처가 신체 스스로의 능력으로 치유되듯 마음의 상처에도 시간이 흐르면 새살이 솔솔 돋아난다. 하지만 상처의 기억과 흔적까지 지워버리지는 못한다. 그 상처가 깊고 얕고 와는 별개로 그 흔적이 남는다.
그렇게 흉터가 남았다. 흉터는 가끔 가슴이 아리거나 문득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마음이 드는 형태로 인식하게 된다. 그럼에도 상처가 치유됐다고 느끼는 이유는 이제 남들이 내가 힘들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정도로 마음 상태를 감출 수 있고 스스로도 내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않으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 흉터마저 지우고 싶어 한다. 빨리 잊고 새 출발을 하고 싶어 한다. 사소한 상처에도 연고를 찾는 이유다. 무언가 고통을 극복하는데 특별한 방안이 있는 듯 찾아 헤맨다. TV 속 유명 인사들이 늘 대중에게 받는 단골 질문 중 하나도 그런 것들이다. 질문을 받은 자들은 무언가 이야기하고 그것이 감동적인 문구로 포장되기도 하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사람들도 있는 듯 하지만 실제의 고통에서 그것이 얼마나 유용할지는 알 수 없다.
상처는 지속적으로 관조해야 한다. 그래야 덧나지 않고 곪지 않는다. 계속 외면하고 회피하고 그저 고통에만 반응해 불평을 늘어놓으면 그 상처는 영원히 나의 치부가 되고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힌다. 좋았던 기억은 행복함을 되새기게 해 주지만 아픈 기억은 현재의 나를 성숙하게 한다. 흉터는 내가 극복했다는 기록이며 증거다. 보기 흉하고 가끔 아릴 수는 있지만 나란 사람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흔적이기도 하다.
성숙은 발전의 의미는 아니다. 갓 지은 밥도 맛있지만 잘 숙성시키면 또 다른 풍미의 술이 되듯 다른 종류의 맛이 될 뿐이다. 다만 시간은 흐르고 변화는 불가피하다. 때문에 그 흐름 속에서 성숙할 것이냐 부패할 것이냐의 선택이 놓여있을 뿐이다. 살면서 상처를 안 받을 수 없고 상처는 아물어 간다. 그것이 자랑스러운 흉터가 될 것인가 부끄러운 치부가 될 것인가를 놓고 우리는 늘 줄다리기를 하며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