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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카게살자 Jun 09. 2024

아주 오래된 기억, 카트만두

티베트 라사(Tibet Lhasa)에서 우정공로를 2박 3일 달려 우여곡절 끝에 중국 장무(Zhangmu) 출입국관리소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곳의 공안들은 고압적이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여권을 가져가서 무슨 검사를 하는지 한참 후에나 돌려주었다. 짜증이 났지만 아무런 항의도 하지 못했다. 공안들의 성질을 긁어봐야 네팔로의 출국만 지연되고, 가뜩이나 틀어진 일정 때문에 회사 출근은 이미 늦어버렸지만 그래도 무조건 빨리 카트만두로 가서 서울로 돌아가야 했다.     


마음을 졸인 끝에 장무 출입국관리소에서 우정의 다리를 건너 네팔 땅으로 들어갔을 때 첫 느낌은 ‘나는 이제 살았다!’였다. 숨쉬기도 너무 편했고 무엇보다 보이기 시작한 초록빛 나뭇잎을 지닌 나무들이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여기서부터 코다리(Kodari) 출입국사무소까지 약 8km는 차량을 이용하거나 아니면 걸어서 가야만 했다. 걷거나 대중교통만을 이용하겠다던 나만의 배낭여행 원칙을 위반하고 나는 불법 자가용 택시를 탔다. 몸도 너무 피곤했고 아무리 배낭여행이지만 차비 몇 푼을 아껴서 내가 얼마나 부자가 되겠는가.     


장무 출입국관리소에 비하면 코다리 출입국관리소는 초라했다. 게다가 검문도 매우 허술했다. 입국비자는 신고서와 함께 미화 30달러를 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비자 스티커를 붙여주었다. 세계 최빈국 중의 하나인 네팔은 많은 관광객이 와서 비자를 발급받아야만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는 나라였다.     


문제는 이제 카트만두(Kathmandu)로 가는 여정이었다. 그곳까지 코다리에서 약 100km밖에 안 되지만 도로 사정이 안 좋아 최소한 4~5시간은 걸린다고 하였다. 흥정할 기운도 별로 없고 급한 마음에 대충 가격을 지불하고 과연 카트만두까지 무사히 굴러갈지 의문이 생기는 택시에 짐과 함께 몸을 실었다. 피곤했고 배가 고팠다. ‘나 착해요’라고 앳된 얼굴에 쓰여 있는 어린 운전기사는 내 몰골을 보더니 중간에 밥을 먹고 가자고 했다.     


그래서 들른 허름한 동네 식당에서 우리나라의 김치찌개처럼 네팔 사람들이 흔하게 먹는 전통음식 달밧(Dal Bhat)을 처음 먹어봤다. 렌틸콩 수프, 카레, 쌀밥, 염소 고기, 야채 등으로 구성된 이 음식의 맛은 어땠을까?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그냥 맛있었다. 배가 고파서 맛있었을 수도 있었겠지만, 라싸에서 거의 매일 니로우미엔(우육면), 차오판(볶음밥), 만토우(아무것도 들어가 있지 않은 만두)만 먹었다. 다음에 네팔에 가면 제일 먼저 달밧부터 먹을 거다. 허름한 동네 식당에서 말이다.     


여행자 숙소가 많은 타멜의 싸구려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밤이었다. 무사히 도착하고 보니 이제 슬슬 걱정되었다. 내일 회사에는 뭐라고 얘기하지? 아마도 복귀하면 경위서를 써야 하는 것은 속된 말로 “따 놓은 당상”이었다. 아니지? 경위서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를 못 잡아먹어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영업이사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꿈에 그가 나타날 것만 같았다.


사건의 발단은 영업 회의 시간이었다. 회의 마무리에 각자의 의견을 자유롭게 내라고 해서 나는 정말 이사님의 말씀에 충실하고자 자유롭게 의견을 냈는데 그 이후로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분은 나에게 사회생활이란 하고 싶은 말은 누가 하라고 해도 절대로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교훈을 확실하게 행동으로 가르쳐주신 고마운 분이다. 그러나 마귀 같은 인간임이 틀림없다.     


다음 날 아침, 팀장님한테 전화했다. 네팔이라고 했더니 그게 어디에 있는 나라냐고 물으셨다.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먼 나라라고만 대답했다. 출근이 며칠 늦어질 것 같다고 그냥 ‘배 째라’고 속으로 외쳤다. 그런데 이상했다. 통화를 끝내고 ‘될 대로 되라’하고 자포자기를 하고 나니 걱정이 안개가 걷히듯 사라졌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음 편하게 생각하자. 티베트 속담처럼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를 되뇌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어쨌든 이제부터 나는 자유다!     


산재이를 처음 만난 건 조악한 글씨로 ‘쉼터’라고 쓰여 있던 한국식당 간판을 보고 호기심에 들어갔을 때였다. 이름 산재이(Sanjay). 쉼터 사장. 네팔 전통 가문인 네왈족. 경기도 안산 공장에서 5년간 일함. 한국어 매우 유창. 힌두교도인데 소고기도 먹음(물론 한국에 있을 때 몰래 먹었다고 함). 그도 한국 사람이 반가웠는지 이런저런 한국에서의 좋았던 추억을 얘기했고 나의 사정을 듣더니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했다.     


다음날부터 나는 산재이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매달려 카트만두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취소된 비행기표를 다시 구하는 것이었다. 그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런저런 인적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3일 후 중국 상하이로 떠나는 로열네팔항공 티켓을 구해주었다. 그 고마운 마음을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짧은 기간이지만 카트만두에서 있으면서 언제 또 여기에 올지 모른다는 조바심에 알차게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하루는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서 원숭이 사원으로 불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네팔에서 가장 오래된 스와얌부나트 사원에 갔었고, 여기에서 먹던 과자를 원숭이들에게 강탈당했다. 그리고 네팔에서 가장 큰 부다나트 스투파(돔 형식의 불탑)에 가서 거기에 새겨진 부처님의 ‘지혜의 눈’을 바라보며 소원도 빌었다.     


박타푸르에도 갔었다.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오래된 왕궁과 사원들이 즐비한 아름다운 곳이었다. 2015년 대지진 때 박타푸르가 심한 손상을 입었다는 기사를 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피해복구를 위해 약간의 성금을 보냈다. 지금은 완전히 복구되었을까? 그곳에서 고대 왕실이 있었던 더르바르(Durbar) 광장의 골목길을 어슬렁거리며 걷기도 하고, 네팔 사람들은 신성하게 모신다지만 내 눈에는 그저 어리고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살아있는 여신이라는 쿠마리(Kumari)도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짧은 여행 기간이었지만 지금도 강렬하게 카트만두를 기억하는 것은 바로 냄새였다. 타멜 거리에서 맡았던 매캐한 매연과 각국에서 온 여행자들의 땀 냄새와 카레 냄새가 뒤섞인 뭐라고 표현하기 힘들지만, 몸이 기억하는 냄새가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가장 강렬한 냄새는 시바신의 사원인 파슈파티나트에서 맡았던 죽은 이를 화장할 때 나는 참기 힘든 냄새였다. 헝겊으로 대충 둘둘 말려서 불타고 있던 죽은 이의 발가락이 보였다. 충격이었다. 죽으면 저렇게 아무렇게나 헝겊에 말려 불타다가 결국에는 한 줌의 재가 될 인간의 운명. 그곳에서 삶과 죽음은 동일체였다.     


카트만두를 떠나던 날, 공항으로 가는 길은 울퉁불퉁했고 거리는 어두웠으며 비가 내렸다. 당시 로열네팔항공은 비행기가 몇 대 없어서 도착하면 대충 정비를 하고 바로 출발한다고 했다. 그래서 사고의 위험이 높다고 현지인이 조언해 주었다. 웬만하면 기다렸다가 다른 비행기를 타고 가라고 했지만 상황이 그럴 수 없었다. 중국 상하이를 거쳐 무사히 인천공항에 도착해서 집으로 향했다. 버선발로 뛰어나올 것을 예상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아내는 내 몰골을 보더니 한심하다는 듯 인사도 없이 쳐다보고만 있었다.     


다음날 마음을 졸이며 회사로 출근했다. 영업이사님께 호되게 혼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예상외로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셨다. 아이고, 깜짝이야. 첫날은 그렇게 무사히 지나갔다. 다음 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이사님 방에 불려 갔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은 얘기하고 싶지 않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나는 회사와 거래처에서 인기스타(?)가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라는 따가운 시선도 덤으로 받았다. 벌써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는 아직도 카트만두를 냄새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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