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의 한계를 보고 듣는 것의 한계를 들어라
보고 듣는 것에 우선하여 마음이 있어야 한다
보는 것의 한계를 보고 듣는 것의 한계를 들어라
‘나는 투명인간이다’ 무슨 소리냐고? 나를 보면서도 저 이는 나를 인식조차 못하지만 이이는 나와 벗이 아닌가. 나를 인식조차 못하는 이들에게 나는 없다. 이 나를 보는 데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이를 견과 시와 관이라 한다. ‘견(見)’은 ‘잠깐 눈에 비치는 것을 본다’는 뜻으로 쓴다. 예를 들어 견문(見聞), 견학(見學)이다. ‘시(視)’는 ‘주의 깊게 자세히 본다’는 뜻으로 쓴다. 예를 들어 시선(視線), 주시(注視)이다. ‘관(觀)’은 ‘시(視)’보다도 더 자세히 살펴본다는 뜻일 때 쓴다. 예를 들어 관찰(觀察), 관망(觀望)이다.
‘관견’이란 말이 있다. 관견은 대롱 구멍으로 사물을 본다는 관견(管見)이 아닌 관견(觀見)이다. 관(觀)의 눈은 강하고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며, 견(見)의 눈은 약하며 잠깐 눈에 보이는 것이다. 관은 관찰하여 상대의 의중을 간파하는 심안(心眼)이고, 견은 상대의 심중이 움직이는 표면을 보는 육안(肉眼)이다. 심안은 마음눈이라 하여 상대의 의중을 꿰뚫고, 육안은 맨눈으로 식견 없이 현상만을 읽어낸다.
상대의 마음을 간파하려면 관의 눈으로, 표면에 나타나는 현상을 볼 때는 견으로 가볍게 보아야 한다. 관견은 거리에 따라 보는 방법이 다르다. 원방을 보려면 눈을 가늘게 뜨고 견으로 보는 것이 좋고, 근방을 보려면 눈을 부릅뜨고 관으로 보아야 한다. 관만으로도 견만으로도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서로 상보해야만 보는 것의 한계를 볼 수 있다.
관과 견의 사이에 시(視)가 있다고 했다. 보아도 보지 못한다는 ‘시이불견(視而不見)’에서 시(視)는 주의하여 보려함이고, 견(見)은 자연히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시(視)는 다시 시선과 응시가 있다. 시선(視線)은 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이다. 단순히 물수제비 뜨듯 표면을 스치는 눈길만을 준다. 응시(凝視)는 눈길을 모아 한 곳을 똑바로 바라봄이다. 응시할 때 시선이 대상에 부딪쳐, 대상도 읽어 낸다. 사물을 제대로 보려면, 이렇듯 ‘견․시․관(見視觀)’이 고루 필요하다.
보고 듣는 것에 우선하여 마음이 있어야 한다
서양에서는 눈에서 ‘에테르’라는 물질이 나가서 대상을 만져 보고 돌아오는 것이라 생각했다. 응시와 유사하다. ‘에테르’는 현재 맞지 않은 학설이 되었지만 꽤 흥미롭다. 응시하려면 잘 보려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 《대학》에는 ‘마음이 그곳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애쓰지 않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심부재언 시이불견 청이불문(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이란 말도 있다. 보고 듣는 것에 우선하여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시를 빨리 짓는 법을 묻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것은 책을 많이 읽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구름이 흐르고 비가 모이며 새가 홰치고 벌레가 우는 것이 마음에 관계되지 않는 게 하나도 없다. 가거나 멈추거나 앉거나 눕거나 일찍이 잠시라도 잊지 않는다면 이에 따라 생각이 길이 훤히 트이게 된다.(或問作詩捷法 非徒多讀書 雲行雨集 鳥翎蟲吟 無一不關於心 行住坐臥 未嘗暫忘 於是從此思路闊利)” 조선 후기의 서리로 태어나 화가로 시문으로 이름을 날린 조희룡(趙熙龍,1789~1866)의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에 보이는 글이다. 조희룡 선생의 글을 잘 짓는 비의 역시 독서가 아니라 자연현상을 관찰할 줄 아는 마음이었다.
성대중 선생도 그의 <태호집서>에서 “무릇 마음이 공평하면 아는 것이 밝고, 아는 것이 밝아지면 이치가 정밀하여지고, 이치가 정밀하면 말이 순해지고, 말이 순해지면 글이 우아하게 된다. 그러므로 말과 이치를 모두 갖춘 것이 으뜸이요, 말은 졸렬하나 이치가 뛰어난 것은 그다음이요, 이치는 졸렬하나 말은 뛰어난 것이 글의 말단이다(夫惟心公則識明 識明則理精 理精則辭醇 辭醇則文雅 故辭理俱長者上也 辭拙而理勝者次之 理詘而辭工 文之末也)”라고 하였다. 졸렬한 글이든 우아한 글이든 일단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만큼은 명확한 사실이다.
“무엇이든 마음의 눈으로 볼 때 가장 잘 볼 수 있는 거야. 가장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거든” “사막은 아름다워.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디엔가 우물이 숨어있기 때문이야. 눈으로는 찾을 수 없어, 마음으로 찾아야 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보이는 문장이다. 저기에도 마음이 보인다. 어디엔가 숨어 있는 우물을 찾으려면 ‘견․시․관(見視觀)’으로 고루 보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눈은 있어도 망울이 없다’라는 속담이 있다. 사물을 바로 분별하거나 꿰뚫어 볼 줄 모름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사물에 눈길을 주고 눈망울로 읽어 보는 자세도 필요하다. 두 눈을 떴다고 잘 보이는 것이 아니다. 사냥꾼은 더 잘 겨냥하기 위해 오히려 한쪽 눈을 감는다. 이렇게 될 때 연암의 제자이기를 자청했던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선생의 말처럼 “반드시 마음이 환히 밝아져 한 번 눈을 굴리면 만물이 모두 나의 문장(必透得玲瓏竇一轉眼 則萬物皆吾文章也)”이 되고, 박제가(朴齊家, 1750~1805) 선생의 말처럼 “하늘에 가득 찬 만물이 모두 시(盈天地者 皆詩)”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