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헌 간호윤 Dec 09. 2021

책벌레가 되지 마라

“독서시인간제일건청사(讀書 是人間第一件淸事).”

 인터넷에 '책벌레'를 치니, 모두 책벌레가 못 되어 야단법석이다. 그야말로 온통 책벌레 투성이입니다. 


“책벌레가 되지 마라” 


독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는 그의 《문장론》에다 이렇게 써놓았습니다. 


책을 '마음'으로 읽지 않으면 읽어도 소용없다는 뜻입니다. 공부는 ‘머리공부’가 아닌 ‘마음공부’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책 읽기[공부]의 진정성입니다. 영국의 경제학자인 알프레드 마셜(Alfred Marshall)조차도 《경제학원리》라는 책의 서문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차가운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져야 한다”라고 써 놓았습니다. 인간의 이기(利己)를 극한값으로 끌어올리는 비정의 세계인 경제조차도 저렇습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1분에 60번씩 우리의 가슴을 쳐대는 심장 위에 뜨거운 마음공부를 새겨야 합니다. 마음공부는 뜻을 세움이지요. 하여, ‘뜻(志)은 만사의 근본(志者萬事之根柢)’입니다.


“말은 다함이 있지만 뜻(志)은 다함이 없는 법(言有盡而意無窮)입니다.”


마음을 가다듬어 먹을 갈며 묵향(墨香) 속에 넣어 둔 마음은 말이 없습니다. 그러니 작품들을 제대로 읽어보려면 글의 행간(行間)을 짚어가며 따지면서 읽고, 내 뜻으로써 저 이의 뜻을 읽어낸다는 이의역지(以意逆志)로써 헤아려야 합니다. 작가들이 종종 사용하는 수사적 기교 속에 독자에게 은밀히 건네는 시사점은, 우리가 ‘고매함으로 위장한 한 글들’에서 종종 발견하곤 하는 ‘인식되지 않는 불확실한 경계선’을 넘은 저쪽에 의연히 있습니다. 그저 글자만 읽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일본 게이오 대학의 설립자이자 일본 근대화의 정신적 지주로  1만 엔 지폐 전면에 그려져 있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는 “문자를 읽을 수는 있어도 사물의 도리를 모르는 자는 진정한 학자라고 할 수 없다. 세상에서 말하는 ‘《논어》를 읽되 《논어》를 모른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저 나라나 이 나라나 학문하는 이치가 별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황현(黃玹, 1855~ 1910) 선생을 아시지요. 조선의 뒷자락을 예리한 칼로 베어버린 1910년 8월 29일, 그로부터 꼭 열흘째 황현 선생은 목숨을 끊는다는 <절명시(絶命詩)> 네 수를 짓고 이승을 달리합니다. 그 둘째 수 결구는 이렇습니다. 


인간 세상에 글 아는 사람노릇하기 어렵기만 하구나. 

難作人間識字人(난작인간식자인)   


‘나라 잃은 백성은 상갓집 개만도 못한 법(亡國奴不如喪家之犬)’이지요. 배운 자로서 망국(亡國)의 백성인 그에겐 단 세 가지 길밖엔 없었습니다. 창검의 기치를 높이 들든가, 굴욕의 삶을 살든가, 이것도 저것도 아니면 죽을 수밖에요. 허나, 나이 쉰 하고 여섯의 늙은 지식인, 그저 생목숨 떼는 수밖에요. 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용기나 양심은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라 저렇게 힘겹게 얻는 것이지요. 오죽하였으면 마음공부를 다부지게 한 저 이도 이러한 시를 지었겠습니까. 


황현 선생을 보면 용기란 두려움의 부재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비틀거리며 행동하는 양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글은 앉아서 쓰고 뜻풀이는 서서한다는 게 어려운 일입니다. 사실 모든 책에 실종된 정의는 그렇게 찾는 것이라고 씌어있습니다만. 


그래 저 이의 말씀처럼  ‘글 아는[글 읽고 글 쓰는] 사람 노릇’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조선 8도에 어디 황현 선생만 글자를 배웠던가요. 그런데 황현 선생 같은 이를 손가락 몇으로 헤는 것을 보면, 대부분 머리공부만 하였거나 마음공부가 짧은 것이겠지요. 하여, 책벌레라 자임하는 분네들 자중자애해야 할 겁니다. 자칫 ‘인간공부’라는, ‘마음공부’라는 문패를 큼지막하게 내 건 인문학 집안에, 파산위기를 부른 장본인으로 지목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두 뼘도 안 되는 거리건만 머리와 가슴이 하염없이 멀어선, ‘행동하는 위선’의 표본실에 안치되기 십상입니다. 


허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저 황현 선생의 죽음과 함께 순장된 양심을 종종 목격합니다.  다산 정약용 선생 말씀으로 맺겠습니다.


 “독서시인간제일건청사(讀書 是人間第一件淸事).”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산 선생이 책 읽기 [글공부]를 정의한 문장입니다. 풀이하자면, “독서야말로 인간이 해야 할 일 가운데 가장 맑은 일이다.”정도의 의미입니다마는 쉬이 넘어갈 글줄은 아닙니다. 공부를 하여 조선인 특유의 풍토병인 출세나 하려는 독서와는 영판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산 선생은 독서를 다섯 글자로 정의하였습니다. ‘제일건청사(第一件淸事)’라고. 즉 책을 읽는 것이 인간의 일중에서 ‘가장 맑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가장 맑은 일’이란, 바로 맑은 삶을 살라는 마음공부에 다짐장을 두라는 의미의 독서를 말함이 아니겠는지요. 정녕 맹물에 조약돌 삶듯 머리로만 책을 보아서는 아니 될 말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글쓰기 묘방(妙方)은 무방(無方)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