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외국 책에 대한 무한한 찬사와 주례사 비평은 늘 볼썽사납다.
줄리언 반스의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이란 책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영국 문학의 제왕이자, 맨부커상 수상 작가’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인 줄리언 반스가 인간의 영원한 숙제인 ‘죽음’을 유쾌한 한판 수다로 풀었다는 보도이다. 그의 말대로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의식 않고 사는 것”은 인생 최대의 실수이다. 죽음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우리에게 필요하다. 나 역시 한 달간, 주변에서 네 분이 망자가 되었다.
내용을 읽다 보니 문학에 대한 그이 견해가 보인다. 줄리언 반스는 죽음에 연결되는 이야기지만 “치유 효과가 있는 문학(therapeutic literature)의 가치를 믿지 않는다”라 하였다. 또 “세상에 대한 어떤 감정을 없애기 위해 소설은 쓰는 건 수준 낮은 일”, “문학작품은 객관적인 어떤 것, 바깥세상에 존재하는 잘 다듬어진 사물”이라 한다.
과연 그러할까? 글쓰기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이다. 글 쓰려는 내면의 욕구가 치받혀 토해낸 결과물이 글이다. 치유 효과는 여기서 자연히 발생한다. 세상에 대한 어떤 감정을 없애기 위해 소설은 쓰는 것 또한 왜 수준 낮은 일이며, 문학작품을 객관적인 사물(object)로 보는 것이 옳을까?
문학은 주관적인 사물(subjective)이다. 작가가 외부 현실을 최대한 객관화하여 본다 해도 문학작품 자체는 작가의 주관에서 잉태된 산물이다. 어떻게 객관화한단 말인가. 나아가 죽음을 앞둔 이가 쓴 글이라면 치유 효과는 물론이고 수준 낮은 일도 아니다.
작품은 반드시 주관적인 눈이 있어야만 문제를 찾아내고 이를 기록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나온다. 문학에 관한 견해야 글 쓰는 이만큼 많은 것, 굳이 따질 게 무에 있으련만, 하 대단한 작가라 추켜세우고 그이 말이 지상 명제인 것처럼 보도하는 기자 태도가 못마땅하여 몇 자 쓴다. 특히 외국 책에 대한 무한한 찬사와 주례사 비평은 늘 볼썽사납다.
첨언 한 마디만 더하자. 죽음을 앞에 놓고 웃는 이 몇이 되겠는가? 죽음은 모든 사람과 영원한 이별을 하고 한 사람의 역사가 인류사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비극 중, 가장 큰 비극이다. 우리가 곡(哭)을 하는 이유도 이 때문 아닌가. 본인 죽음이 아닌 남 죽음을 객관화하여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저 이의 죽음에 대한 무례인 듯도 싶다. '죽음을 이야기하는 법'을 좀 더 경건하게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저자:줄리언 반스/출판:다산책방/발매:2016.05.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