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47
휴헌(休軒) 간호윤(簡鎬允)의 ‘참(站)’147
2026. 3. 12. 10:31ㆍ카테고리 없음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라 했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의 이 격언은 흔히 승리를 위한 최고의 전략으로 인용된다. 하지만 현대의 참혹한 전장, 특히 최근 이란에서 보내온 180여 명 어린 생명들의 부고장 앞에서 이 문장은 생각을 몹시 혼란스럽게 한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아는 끝에 도달해야 할 지향점은 ‘어떻게 적을 섬멸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전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여야 하기 때문이다.
옛 소비에트 연방의 엘렘 클리모프 감독이 만든 <와서 보라>(Come and See, 1985)라는 반전(反戰)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독일령 벨라루스 소년 플료라의 시선으로 나치 점령기의 참상을 보여준다. ‘와서 보라!(Come and See)’는 『요한계시록(묵시록)』의 네 기사(騎士)가 부르는 파멸의 신호와도 같은 말로 『요한계시록』 6장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이 구절에서 어린 양이 일곱 봉인 중 하나씩을 뗄 때마다, 네 기사는 천둥 같은 소리로 “와서 보라!”고 외친다.
흰 말을 탄 기사(정복)는 승리에 집착하는 눈먼 권력과 정복욕을 상징한다. 마치 『손자병법』에서 경계한 ‘전쟁 그 자체에 매몰된 지도자’의 형상을 떠올리게 한다. 붉은 말을 탄 기사(전쟁)는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죽이게’한다. 검은 말을 탄 기사(기근)는 ‘곡물 가격을 폭등’시킨다. 오늘날 우리 언론이 생명의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경제적 파탄 보도와 유사하다. 청황색 말을 탄 기사(죽음)는 그 이름 자체가 ‘사망(Death)’이다.
영화는 관객에게 단순히 스크린을 감상하라고 권유하지 않는다. 소년 플료라의 시선을 통해, 봉인이 풀려버린 지옥도(地獄圖)를 똑똑히 ‘목도하라’고 강요한다. 영화 초반, 전쟁터에서 주운 소총 한 자루를 들고 영웅을 꿈꾸며 입대한 천진난만한 소년의 얼굴은 영화가 끝날 무렵, 수십 년의 고통을 강제로 보낸 노인의 형상으로 일그러져 있다. 나치 독일의 학살 현장을 목격하고 자신의 마을이 불타며 가족이 몰살당하는 광경을 마주한 소년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희망을 담지 못한다.
공포와 경악으로 가득 찬 플료라의 클로즈업된 얼굴은 우리에게 묻는다. “와서 보라! 이것이 당신들이 말하는 영광스러운 전쟁의 실체이며, 인류가 자초한 묵시록(黙示錄,종말과 파멸에 대한 계시)의 현장이다.”라고. 소년의 깊게 팬 주름과 초점 없는 눈망울에서 이란에서 희생된 아이들이 겪었을 공포가 겹쳐 보인다.
영화의 종막에서 플료라는 웅덩이 속에 버려진 히틀러의 초상화를 발견한다. 분노에 찬 소년은 그 초상화를 향해 미친 듯이 총을 쏜다. 영화는 총성이 울릴 때마다 기이한 몽타주로 시간을 거꾸로 되감는다. 히틀러의 집권기, 청년 시절, 그리고 마침내 어머니의 무릎에 안겨 있는 어린 시절의 히틀러 사진에 도달한다.
▲ 챗지피티 삽화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플료라는 방아쇠를 당기지 못한다. 아무리 거대한 악의 화신이라 할지라도, 그 뿌리에 놓인 ‘어린아이’의 모습 앞에서는 차마 총구를 겨눌 수 없었던 것이다. 이는 광기의 전쟁이 앗아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전쟁은 악을 처단한다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결국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플료라’들의 인간성을 파괴하고, 동시에 아무 죄 없는 ‘아이들’의 미래를 소멸시킨다. 플료라가 멈춘 손가락은, 어떠한 대의명분도 어린 생명의 가치를 앞설 수 없다는 최후의 인간성이다.
이토록 참혹한 묵시록적 현실이 지구 반대편에서 펼쳐지고 있음에도, 우리의 언론 지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냉랭한 기사뿐이다. 전쟁으로 인해 ‘유류비’가 얼마나 올랐는지,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어떻게 심화했는지, 그리고 ‘주식 계좌의 숫자’가 어떻게 떨어졌는지만이 지면을 장식한다.
어린아이 180여 명의 죽음이라는 인류사적 비극은 어느새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건조한 경제 용어로 환원된다. 언론은 피 흘리는 아이들의 눈물 대신 요동치는 그래프를 보여주고, 파괴된 마을의 절규 대신 금리와 원자재 가격의 추이를 분석한다. 생명의 무게가 자본의 논리에 압사당하는 이 서글픈 광경이야말로, 우리가 직면한 또 다른 형태의 묵시록이다. 타인의 고통을 경제적 손실로만 계산하는 우리 사회의 무감각함은, 전장의 포탄 못지않게 차갑고 잔인하다.
손무(孫武)는 『손자병법』 「모공편(謀攻篇)」에서 전쟁의 본질을 꿰뚫는 일침을 준엄하게 새겨두었다.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 최선 중의 최선이 아니요, 싸우지 않고 남의 군사를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 중의 최선이다(百戰百勝 非善之善者也,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라고. 전쟁에서 이기고도 그 나라가 위태로워지는 까닭은, 승리의 대가로 치른 파멸의 무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글┃간호윤(객원편집위원, 인하대학교 프런티어창의대학 초빙교수, 고전독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