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0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한국에서는 기껏해야 한 두번 하는 바다 수영을 10월에, 그것도 해가 짱짱한 지중해에서 해수욕을 하고 있을 지 감히 상상이나 했을까? 여러 도시를 거쳐왔고 수많은 더위를 지나왔지만 수영하기에 제격인 곳은 터키만한 곳이 없을 것 같다. (물론, 내가 못 가본 나라들이 너무 많지만) 게다가 지중해라니.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태어나 가본 바다라고는 동해와 해운대, 제주도 바다가 다였던 나에게 지중해는 막연한 꿈 같았다. 너무 막연해서 어떻게 불러야 할 지 잘 모르겠는. 아니다, 터키는 마치 우연의 신 같은 존재였다. 여행 5개월 차에 접어들 무렵 유럽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장기 여행에 심신이 지쳐갔다. 코로나 시국이 열린 지금으로서는 배부른 생각이었지만 어디서 밥을 먹을지, 어디서 잠을 잘지, 어디를 가야 할 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너무 귀찮고 피곤한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물가가 저렴하고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어디 있을까 고민하다 터키를 떠올리게 된 것이었다. 유럽에서 조금 벗어나면서 그렇다고 한국와 아주 가까워지지 않는 곳. 그때 구글 지도 속의 터키를 보면서 여행을 떠난 첫날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런던-이스탄불 항공권을 결제한 후 어쩌면 마지막일수도 있는 유럽에서의 날들은 평소와 다를바 없었다. 하루에 한 끼는 꼭 중국 식당을 찾았고 여유가 있는 날은 한식당에 갔다. 물보다 저렴한 맥주를 마시고 숙소 근처를 산책하고 커피가 맛있는 곳을 찾아 다녔다.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어느새 이스탄불로 가는 당일이 되었다. 유럽에서는 매번 기차나 버스를 타고 이동했기 때문에 (비행기도 한 번 탔지만) 비행기를 타려니 약간 믿기지 않았는데, 막상 공항에 도착하자 느슨했던 마음이 팽팽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일찍 와버려서 탑승 시간까지 시간이 남아 돌았다. 휴대폰을 뒤적거리다 날씨 앱을 열었다. 런던은 8도였는데 터키는 29도였다. 무려 21도나 차이가 났다. 21도라......배낭 어디 구석에 있는 반팔을 꺼내 입거나 현지 시장에나 가야겠다.
영국에서 터키까지는 4시간 정도가 소요됐다. 나는 창가에 기대 잠을 잤다가, 팟캐스트를 들었다가 메모장을 켰다가 어떤 생각에 빠지다가를 반복했다. 터키는 어떤 모습일까, 앞으로 오래 여행하려면 하루에 얼마를 써야 할까, 터키에 진짜 고양이가 많을까, 한국 사람이 있을까, 케밥은 꼭 먹어야지, 첫 끼는 뭐가 좋을까........
잠깐 잠들었는지 비행기가 곧 착륙한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얕은 잠에서 깬 나는 비행기 창문을 열어 바깥을 살펴봤다. 구름말고는 보이는 게 하나도 없었다. 기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쿠오앙- 하고 착륙했고 곧이어 안전표시등이 꺼지자 사람들이 하나 둘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팔을 뻗어 짐을 찾는 사람, 우는 아이를 달래는 사람, 알아들을 수 없는 어떤 언어로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런데.... 몇몇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가방에 넣는 모습이 보였다.9월 말의 런던을 여행한 나는 경량 패딩과 후드티, 맨투맨이 전부였는데 그날도 나는 네이비 색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아유 고잉 투 탁심?
턱수염을 기른 버스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는 생각보다 크고 쾌적했다. 유럽에서 많이 탔던 플릭스 버스와 맞먹는 수준이었다. 좌석에는 휴대폰 충전용 어댑터도 있었다. 좌석 뒤에 영화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화면도 탑재되어 있었는데 어떻게 쓰는건지, 작동을 하기는 하는건지 몰라 멀뚱히 보기만 했다. 아무도 쓰지 않는걸로 봐서 어쩌면 고장난 것일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지도를 켰지만 유심이 없어 인터넷은 안되었고 와이파이는 당연히 잡히지 않았다. 구글 지도를 켰다. 어디가 어딘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30분 쯤 달렸을까 시내로 보이는 높은 건물들이 보이고 주거 단지 같은 아파트들이 보였다. 기사 아저씨가 '딱심 딱심' 하면서 외치자 사람들이 우르르 내릴 준비를 했다. 나도 배낭을 메고 내렸다. 생각보다 날씨는 덥지 않았는데 숙소를 찾기 시작하면서 땀이 주르륵 나기 시작했다. 다행히 근처에 숙소가 있어서 오르막길 몇 번을 오르고 골목을 몇 개 지나자 내가 예약한 탁심 호스텔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