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의 여름과 영하의 이르쿠츠크

벨제한 비치 호텔에서 열린 가능세계

by 강양


터키에서의 일정은 대략 이스탄불- 괴레메- 욜루데니즈-카쉬- 안탈리아로 정하고 움직였다. 이스탄불에서는 거의 2주를 머물렀고 (다들 이해를 못한다) 괴레메 3박 , 욜루데니즈 3박, 카쉬 5박이었다. 터키에서 한 달을 보내고 돌아온 나는 생각했다. 터키 남부가 찐이구나....... 이스탄불에 2주 있을 게 아니라 남부 도시에서 2주, 아니 한 달을 있어야 했던거구나. 물론 이스탄불도 좋았다. 매일 아침 나를 깨워주는 아잔소리와 탁심 광장에서의 쇼핑, 갈라타 다리의 풍경과 페리를 타고 카디쿄이를 오고 갔던 기억이 너무너무 소중하다. 하지만 터키의 남부는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바르셀로나보다 부르고스가, 파리보다 비아리츠가, 방콕보다 빠이가, 런던보다 브라이튼이 더 좋았던 것처럼 말이다. 여행을 몇 개월 해보니 나하고 맞는 나라가, 도시가 있구나라는걸 느꼈다. 그리고 여행은 그것을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도.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여행이 귀찮고 돈만 낭비한다고 생각할 수 있고 아닌 경우는 무엇보다 값진 여정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계속 여행을 하는 게 아닐까.


괴레메에서 탄 야간버스는 아침이 되서야 페티예에 도착했다. 나는 잠에서 덜 깬 채로 버스에서 내려 주섬주섬 배낭을 챙겼다. 이른 아침이라 날씨는 쌀쌀했고 배낭 가장 위에 올려둔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여기는 노포 터미널 같은 느낌의 버스 정류장이었다. 그래서 시내에 가기 위해선 또 다시 작은 밴이나 버스를 타야 했다. 버스를 어떻게 타야 하는지 아님 택시를 타야 할 지 고민하고 있는데 나와 키가 비슷한 아저씨가 어디에 가냐고 물었다. '욜루데니즈 가요' 라고 하자 휴대폰을 이리저리 보더니 보트투어 가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가. 대부분의 한국인 관광객이 욜루에 가면 많이들 하는 듯 했고 한국어도 조금씩 섞어 쓰기까지 했다. 나도 질 수 없어 n에 들어가 보트투어 가격을 검색해보았다. 아저씨는 내가 검색해 보는 걸 아는지 자꾸 가격을 흥정하려 들었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중요한 건 보트가 아니라 나를 숙소까지 데려줄 차가 필요했다.


-오케이, 벗 아이 니드 어 버스. 아이 햅투 고잉 투 마이 호스텔


딱 봐도 무거운 배낭을 낑낑대며 서있자 내게 저쪽으로 가서 잠시 앉으라고 말했다. 나는 그가 가리키는 의자에 앉아 연신 하품을 해댔다. 커피가 너무 간절했다. 저 아저씨가 커피 한 잔만 줬더라면 100리라, 200리라 상관없이 보트투어를 하겠다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다른 버스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는 동안 내 옆에 어떤 남자가 와서 앉았다. 그는 나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는데 한국인이라고 하자 본인은 파키스탄에서 왔다고 말했다. 파키스탄이라니. 이스탄불에서는 가족들과 여행 온 레바논 소녀를 만났었다. 터키에 있으니 한국에서는 만날 수도 들을 수도 없는 국가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구나. 안경 낀 파키스탄 친구는 여행을 왔다고 했는데 경로가 나와 정반대였다. 나는 이스탄불, 괴레메를 거쳐 왔고, 그는 이제 그곳으로 갈 것이다. 그런데 파키스탄은 위험하지 않을까? 만약 내가 파키스탄 치안이 어때요? 하고 물었다면 그도 남한은 안전하냐고 묻지 않았을까. 그의 나라가 궁금해졌지만 버스시간이 되어서 금세 떠났다. 안전한 여행 되라고 서로 손을 들어 인사했다. 파키스탄 친구가 떠나자 아저씨가 스쿠터를 몰고 왔다. 그는 약속대로 숙소 앞에 나를 데려다 주었다. 사실 아저씨가 나를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진 않을까, 이상한 사람이 아닐까 긴장하면서 스쿠터에 올라 탔지만 내가 생각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아저씨는 마지막까지 친절을 베풀어 주셨다. 물론 내가 보트투어를 예매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일종의 거래였지만 나쁘지 않았다. 만약 엄마가 알았다면 큰일났겠지? 하지만 분명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욜루데니즈까지 가는 언덕길과 내리막길이, 해가 떠오르며 서서히 밝아지는 바다의 색깔이, 차가운 바람을 가르며 달렸던 그 속력을.


이번 숙소는 호스텔이 아닌 리조트 느낌의 호텔이었는데 여행한 지 3개월만의 독방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호스텔을 전전하며 2층 침대에서 지냈던 시간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내가 예약한 방은 슈퍼 싱글 침대가 2개 있는 방이었고 작은 베란다가 딸려 있었다. 그 베란다에는 탁자와 의자가 있었고 너머로 야외 수영장이 보였다. 수영을 하거나 선베드에 누워 책을 읽는 외국인들이 있었는데 눈 앞의 고요한 평화가 믿기지 않아 멍하니 제자리에 서있었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수영장이 보이는 호텔의 외관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접속했다. 하트를 붙여 스토리에 게시한 후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여기에 있을동안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푹 쉴 수 있겠구나, 누군가의 코골이를 듣지 않아도 되고 내가 켜두지 않은 알람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 씻으려고 줄을 서지 않아도 되고 타인의 머리카락이 엉겨붙은 수쳇구멍을 보지 않아도 된다. 씻을 때마다 세면도구를 일일이 들고 다닐 필요도 없다.


'혼자서 지내는 것은 할 수 있는 것이 많은거였구나'


그럼 여기서는 큰 소리로 노래들 들을 수 있고 잠들기 직전까지 통화를 하다 잠들 수도 있고 책을 읽다가 잘 수도 있고 방에서 음식을 먹을 수도 있고 침대 위에서 방방 뛸 수도 있다. 화장실에 가고 싶을 때 바로 갈 수 있고 눈치 보지 않고 샤워를 할 수도 있다.


'아니다 , 돈이 좋은거였구나'


호텔의 깨끗한 이미지와 깔끔하게 정리된 이불과 베개는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호스텔에서 지낼 때도 화이트 톤의 침구였지만 천장이 낮은 철제로 된 이층침대와 푹신한 슈퍼싱글 베드는 많은 차이점이 있지......부들부들한 이불 속에서 혼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다가 밥 먹을 때가 한참 지났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