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의 책 2: 몰입 _패티 스미스 (마음산책)
다시 뉴욕 시로 돌아오니 생체 리듬이 다시 적응하기 힘들어했다. 하지만 발작적인 향수병, 내가 갔던 곳에 대한 그리움에 더 많이 앓았다. 카페 드 플로르에서 마시던 모닝커피, 갈리마르 정원에서 보낸 오후들, 달리는 기차 속에서 폭발하던 창조력.
(48쪽, 몰입)
생각해 보니 나는 올해 여름을 패티 스미스와 시작했었다.
여름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른 5월 중순이었지만, 그때부터 시작해서 다른 책들과 함께 그의 책을 읽어 나갔고, 6월의 중순까지 약 한 달을 그의 글과 함께 살았다. 누군가에겐 올여름이 ‘Brat Summer’였다면, 나에겐 ‘Patti Summer’였다. 올여름을 대표할 책을 읽기 위해 여러 책들을 읽었지만 딱히 만족스럽지 않았고, 그러다 그 이유가 아마도 내 올여름의 책이 패티 스미스의 책들이라고, 이미 마음속부터 정해져 있었다는 걸 깨달을 정도였으니, 패티 써머,라고 할 수 있겠지.
그 5월 중순에 파주에서 머물고 있던 나는, 파주의 공공 도서관에서 우리 동네의 도서관 두 곳에는 없던 패티 스미스의 책들을 발견했다. (그 도서관은 규모가 꽤 커서 내가 찾는 거의 모든 책이 있었다.)
나는 패티 스미스의 노래는 물론 글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고, 그러니까 그 유명한 <저스트 키즈>도 읽어보지 않은 상태였다. 이름, 사진들 몇 장 빼고는 별로 아는 게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그의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파주에서 그의 책들이 꽂혀있는 걸 보면서 그 언젠가가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몰입>을 가장 먼저 집어 들었다. 청록색 표지가 청량해서 마음을 잡아끌었고, 한쪽 팔을 쭉 뻗은 자세로 바로 서서 자신의 정면을 응시하는 패티 스미스의 사진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가장 큰 이유로는) 두께가 가장 얇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좋았기 때문에 그다음 도서관에 갔을 때도 그의 책을 빌렸다. <저스트 키즈>(아트북스)를 드디어 읽었고, 그다음으로는 <P.S 데이스>(아트북스), 그다음으로 6월의 첫날 읽기 시작한 <M 트레인>(마음산책)이 마지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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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이 중에서 가장 몰입했던 책은 <저스트 키즈>였다. 이 책은 정말 어제 어디에서 읽어도 술술 읽혔다. 그를 잘 알지도 못하는데,라는 생각이 들면서 신기할 정도였다.
시기가 맞아서였을까?
나는 저스트 키즈를 읽으며 그와 함께 여행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그 시기를 마치 여행하는 것처럼 살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저스트 키즈 속 패티 스미스가 내가 그의 글을 읽기 전에 혼자 예상했던 것보다 더 불안했고, 그렇게 자유롭진 않았다는 걸 알게 되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이 책이 그저 그의 자유로움으로 가득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누군가의 자유로움에 상처받기도 하고, 자유로워지려고 노력하기도 하는, 어쩌면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위한 외로운 여정의 이야기였다. 책 밖으로 그 시기의 그의 외로움이 묻어 나올 것 같을 정도라, 사실 지하철 안에서 살짝 울 뻔한 적도 있다.
그런 그는 그때부터 지금까지도 자유로운 예술가의 상징들 중 한 사람이다. 비로소 그의 글을 읽고 나니 나는 그의 자유로움은 그가 날 때부터 존재하던 게 아니었으며, 그가 바라던 것이자 쟁취한 것이었으며, 가장 중요한 건 그의 자유로움이란 어떻게든 선을 향해 있는 따뜻한 무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스트 키즈를 읽으며 의외였던 부분이 바로 그거였다. 다른 무엇보다도 따뜻한 감성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었다는 것. 내 올여름이 패티 써머가 된 이유도 바로 이 따뜻함이다.
그의 다른 책들에서도 그런 감성이 가장 많이 느껴졌다. 한 해의 매일을 사진과 짤막한 노트로 기록한 <P.S 데이스>는 그가 자신의 주위 사람들과 그가 사랑하는 예술가들, 그리고 그의 일상을 바라보는 시선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어서 좋았고, 나도 그런 식의 기록을 언젠가는 한 번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저스트 키즈가 지금 이 순간을 함께 여행하는 느낌이었다면 <M트레인>은 시간이 더 흐른 뒤의 그가 여전히 따뜻한 자유로움을 안고 삶을 여행하는 것을 바라보는 느낌이었고, 나도 지금부터 앞으로 오래도록 예술이라는 것을 해나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의 모든 글에 공감하고 몰입했던 건 아니었지만, 나의 짧은 여행을 그와 함께 하고 있는 느낌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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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에서도 올여름의 책, 하면 <몰입>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책, 영화뿐만 아니라 그림과 건축까지 예술로 가득했던 나의 올여름과, 이 책에서 패티 스미스가 했던 예술적인 여행이 닮아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장 먼저 읽었던 패티 스미스의 글이기도 하니, 여름을 함께 시작하기도 했고 말이다.
<몰입>은 일단, 내가 혼자 생각했던 패티 스미스의 글 같은 글이었다. 감성적이고, 여유로우면서도 예민하고, 작가주의적으로 느껴졌다. 종교적이고, 책의 제목처럼 몰입과 헌신이 느껴졌다. 그는 알베르 카뮈, 시몬 베유 등 그의 예술가들의 장소를 우연히 방문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의 흔적이 느낌으로든 사물로든 여전히 남아있는 그곳에서, 글쓰기를 향한 영적인 힘이 ‘터져 나옴’을 느낀다.
그리 영적인 감성도 별로 없고 정말 종교도 없는 내가 그가 느꼈던 것과 비슷한 영적인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순간이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내가 가끔 ‘어쩌다 보니 운명처럼 정말 운이 좋았어’라고 느꼈던 순간이 사실, 그런 영적인 순간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있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감성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런 나를 생각해 보면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지금의 나일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꼭 종교적인 것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는 것 같다. 패티 스미스가 느꼈던 것이란 유일신을 향한 그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예술가들을 향한 것이며, 글을 향한 것이다. 나 또한 사랑하는 예술가들이 있으며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그의 몰입과 헌신에 공감했다.
첩첩이 쌓인 공책들이 무위로 돌아간 수년의 노력을, 김이 빠져버린 황홀을, 끝없이 무대 위를 서성인 발자취를 말해준다. 우리는 글을 써야만 한다. 고집 센 송아지를 길들이듯 헤아릴 수 없는 투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우리는 글을 써야만 한다. 부단한 노력과 정량의 희생 없이는 안 된다. 펄떡이는 심장으로 살아 있는 독자라는 종족을 위하여 미래를 끌어오고 유년기를 다시 찾아가고 날뛰는 상상력의 어리석음과 공포에 고삐를 늦춰선 안 된다.
(121쪽, 몰입)
그런 여행을 하는 게 내 목표들 중 하나다.
예를 들면-언제가 될 진 모르겠지만- 아녜스 바르다와 자크 드미의 묘비에 감자를 놓고 오는 것. (그래도 되는지, 그들의 묘비 앞에는 정말 다른 이들이 놓고 간 감자들이 있다.) 아녜스 바르다와 그의 예술을 앞으로도 계속 생각할 내가, 나의 예술가를 향한 존경과 사랑을 표현하는 것. 그리고 패티 스미스가 그랬듯, 어쩌면 나도 내가 할 예술에 대한 몰입과 헌신의 무언가를 경험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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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아직도 패티스미스의 노래들을 제대로 들어보지 않았다. 몇 주 전에 다큐멘터리 영화 속에서 노래하는 그의 모습을 잠깐 본 것 빼고는. 왠지 그는 계속 나에게 뮤지션보다는 작가로서 남아있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다. 그를 직접 만나보지도 않았을뿐더러 노래는 들어보지 않았고 오로지 그의 책들로 그를 이제야 경험해 본 나는, 그 자신이 되어보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그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좋은 작가로, 그리고 올여름에 그랬듯 그를 좋은 여행자로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낯선 지역에서 여행처럼 머물던 그 경험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후로도 벌써 두 달이 지난 지금, 그리고 어느덧 여름이 점점 끝나가고 있는 지금, 나는 예기치 못하게 시작했던 올여름의 여행을 우연하게도 패티 스미스와 함께 했음을 생각한다.
실제로도 아주 살짝 외롭다가도 사람들과 공간들과 예술작품들 덕분에 너무나 따뜻했던 여행이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패티 스미스의 글들이 내 여행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덕분에 나중에도 2024년의 여름을 패티 스미스와 함께했던 여행으로 기억하게 되겠지.
지금까지 출간된 그의 책들 중 <달에서의 하룻밤>(마음산책)만을 남겨놓고 있다. 언제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 또한 어느 시기를 함께하는 여행자 같은 책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제목처럼 꿈결 같은 여행이려나?
아직 무슨 책들을 가지고 갈까 마음을 정하지 못했는데 택시가 너무 빨리 도착해버린다. 책 없이 비행기를 탄다는 생각만 해도 파도처럼 공황이 덮쳐온다. 딱 맞는 책은 해설사 역할을 해주고 여행의 톤을 결정하며 심지어 궤적까지도 바꿔버린다.
(20쪽, 몰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