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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가든 Feb 09. 2024

취향이란 그런 것이니까

미치도록 읽히지 않는 책

_ 작년 12월에 쓴, 연말의 글입니다.



몇 번을 시도해도 미치도록 읽히지 않는 책이나 단 한 번도 끝내지 못한 영화가 있는가?

 

*


연말이 되면 올해를 돌아보곤 한다.

누군가는 1월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훑어볼 테고 누군가는 아주 잠깐 빠르게 훑어볼 것이다. 자연스럽게 이 시기가 오면 각자 이렇게, 올해는 뭘 했고 뭘 하지 못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일단 나는 올해에 '해냈다'고 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딱히 없다. 어쩌면 이번에도 해내지 못한 그 무언가가 너무 존재감이 커서, 그래도 작게나마 해낸 것들을 보이지 않게 묻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평이한 해였다.

나는 이런 적이 많아서, 뭘 했고 뭘 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생각을 좀 더 소소한 쪽으로 옮겨보는 것에 익숙하다. 이 소소한 쪽이란, 내가 올해 어떤 영화를 몇 편을 봤고 어떤 책을 몇 권을 읽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새해가 오기 직전, 일 년 동안 다이어리에 기록해 놓은 것들을 처음부터 천천히 읽어 보면서 시작한다. 몇 편의 영화를 봤고 몇 권의 책을 읽었는지, 좋았거나 별로였던 작품들이 각각 어땠는지.

그리고 제목을 보고도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 이 작품들은 아마도 감흥이 없어서였겠지,라는 생각도 하며 기록을 보다 보면, 이런 것들이 아마도 여기저기 크게 비어있던 나의 올해를 조각조각 채워주었다는 걸 느낀다. 뭔가를 해내진 못했어도.

 

*


보통은 이렇게 정해진 날에 다이어리를 넘겨보며 생각을 하곤 하는데, 이제는 정말 완전한 연말인 지금 이 시점에서 몇 주 전인 어느 날 (11월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내가 올해에도 읽는 것에 실패한 책이 별안간 머릿속에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그날로부터 며칠 전 어느 날이, 예전에 보다가 실패했던 영화를 보는 것에 성공한 날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읽지 못한 그 책이 생각났던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이다. 아니면, 또 그 시기가 찾아왔을 수도 있다.

왠지 내가 그 책을 읽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시기.


일단 '그 영화'는, 예전에 몇 번 시도했지만 단 한 번도 끝내지 못하다가 그 몇 주 전에 다시 시도해서 끝까지 졸지 않고 보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그 책'은, 올해 초 이후로는 다시 시도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시도하는 걸 외면해오기까지 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몇 번이고' 시도했지만 결국 읽지 못했다는 것이다. 상도 받았고,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많은 사람들에게 평이 좋은 작품이고, 무엇보다도 나는 이 책을 정말 미치도록 읽고 싶은데 왜 미치도록 읽히지 않는 걸까.

 

이미 한 다섯 번 정도는 시도해 봤다. 맨 처음에는 큰 기대를 안고 읽어 나갔기 때문에 내가 그 책을 당연히 끝까지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나마 이 첫 시도에서 가장 많이 읽었다.) 하지만 이 첫 시도에서 한 번 책을 엎어놓은 후로는 다시 펼치지 못한 채 덮어 버렸고, 그다음 시도를 할 때마다 어째 의욕이 점점 더 떨어짐을 느끼며 몇 장을 읽다가 덮고 또 덮어 버렸다.


그 책은 결국 중고 서점으로 갔다. 내 언젠가는 너를 읽으리, 하며 팔긴 했지만 사실 그게 언제일지는 모르겠다. 큰마음을 먹고 시작해야 할 책이라는 걸 이제 아주 잘 알기 때문에, 정말 말 그대로 큰마음을 먹어야만 읽을 수 있는 책이 되어 버린 것 같다. '도전'의 수준까지 갔달까?

 

*

 

남들은 다 잘 읽는 것 같은데 나는 아닌 것에는 이유가 있겠지, 하며 생각해 낸, 내가 이상하리만치 읽히지 않는 그 책을 읽는 것에 계속 실패하는 이유는, 안타깝지만 그냥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허무하지만 당연한 이유. 그 책은 내 취향이 아니었고, 그래서 내가 그 책을 읽는 것을 시도할 때마다 내 안에 있는 어떤 취향 감별사 같은 게 그 책을 단호하게 밀어냈던 것뿐이다. 내가 문제인 것도, 당연히 그 책도 문제인 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나는 왜, 그 읽히지 않는 책을 몇 번씩이나 시도했던 걸까?

 

나는 사실 잘 읽히지 않는 책은 미련 없이 덮고, 보는데 집중할 수 없는 영화나 드라마는 미련 없이 끄는 편이다. 도서관에서 괜찮겠다 싶어서 빌려와 놓고도 막상 펼쳐보니 확실히 내 취향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는 물론이고, 어느 정도 진도를 나간 시점에서도 이걸 내가 계속 읽어야 하나 또는 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내내 머릿속 어딘가에 달려 있다면, 그 생각을 그냥 떼어내는 걸 택한다.

이 생각을 떼어내는 방법은 그냥 덮고, 끄고, 다른 이야기를 찾는 것이다. 이 세상에 이야기는 많고, 그러니 내가 지금 더 마음에 들어 할 이야기는 분명히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하지만 이런 내가 몇 번이고 그 책을 시도했던 이유는, 혹시 그 사이에 내 취향이 조금 바뀌어있을 수도 있다는 쪽에 희망을 걸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내 취향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앨범이 어느 날 갑자기 좋아지고, 전에 봤을 때는 딱히 감흥이 없었던 영화를 다시 봤을 때 전보다 훨씬 와닿는 걸 느낄 때가 꽤 많다. 그래서 이번에도 이런 순간이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또는 이 책이 이번에는 내 취향이 되어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예전에 몇 장 읽다가 에이, 하며 덮어버리는 걸 경험했음에도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면 또 시도하고, 또 시도했던 것이다.

 

한편, 위에서 언급했던 ‘단 한 번도 끝내지 못하다가 최근에 끝까지 졸지 않고 보는 것에 성공한 그 영화’는, 맑은 정신으로 모든 장면들을 놓치지 않으며 본 것뿐만 아니라 인상 깊은 장면을 다시 돌려보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그 영화가 완전한 내 취향까지는 아니었지만, 내가 왜 이 영화를 그렇게 끝까지 보기 힘들어했을까,라는 생각은 했다.

 

그러면서 나는 또 그 책 생각을 했다. 몇 번을 내 손에 들려 펼쳐졌지만, 계속해서 초반의 몇 장만이 읽힌 그 책. 다시 시도해 볼까?라는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어 그 책을 쳐다봤지만 (아직 중고서점으로 가기 전 내 책꽂이에 있을 때였다) 그만뒀다. 아무래도 저 책은 운명이 아닌 것 같아, 하면서.

 

이럴 때만 운명론자가 되는 법이다.

 


*


여기까지 쓰면서 그 책이 뭔지 밝혀야 하나 잠깐 고민했는데, 언젠가 내가 그 책을 읽는 것에 성공한다면 누군가에게 밝혀도 그때 밝혀야 할 것 같다. 추운 계절이 오니, 왠지 그 책을 읽는 것에 성공할 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할 만한 책일 것 같다는 그 오만한 생각이 또 스멀스멀 드는 게, 어떻게든 적어도 내년 안으로는 다시 그 책을 찾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때는 정말 끝까지 읽어보리라는 다짐을 하며, 그리고 그때도 몇 장 읽고 덮게 된다면 정말 미련을 한동안 버려두리라는 다짐도 하며, 이 글도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야겠다. 별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누가 알겠는가? 별 이야기는 아니었던 이 글이 누군가의 취향에 맞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취향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리고 만약 나처럼 몇 번을 시도했지만 미치도록 읽히지 않는 책이나 단 한 번도 끝내지 못한 영화가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면, 또 누가 알겠는가?

올해가 정말 가기 전에 그 책이나 영화를 보는 것에 성공할 수도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을 하고 싶다.

 

물론 또다시 중간에 끄거나 덮어버릴 수도 있으며, 그러면 우리는 다른 작품을, 우리의 취향을 찾아 나서면 된다는 말도 하고 싶다. 아니면 내년과 그다음 해와 몇 년 후까지도 기약해 보거나.

그 책을 계속해서 집어 들었던 그때의 나처럼, 그냥 왠지 끝까지 보고 싶거나, 정말 내 취향일 것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면 말이다.


*


나에게 올해는, 이번에도 해내지 못했던 걸 생각하면서 후회 속으로 파고들려면 얼마든지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별것 없었던, 그런 보통의 해였다. 올해를 시작하기 직전의 내가 그랬다. 적당한 후회의 선을 기어이 넘으며, 후회할 것 하나를 생각하면 하나를 또 생각하며, 내년에도 후회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으로 작년을 마무리하고 올해를 시작했다.

 

비슷한 상황이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말아 봐야겠다. 그 대신, 내년에는 그 산더미의 크기를 조금 가볍게 만들어보리라는 다짐을 해봐야겠다. 몇 번을 시도해도 되지 않았던 것, 단 한 번도 완성하지 못했던 것, 그리고 내가 올해도 해내지 못했던 게 금방 어딜 가버리진 않을 테니.

 

나와 비슷한 생각들로 연말을 보내는 누군가도, 적어도 어디 한 칸 정도는 온전한 나의 취향으로 채워진 한 해를 보냈길 바라며.

 



아트인사이트 원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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