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의 라따뚜이와 나의 어떤 노래들
_ 작년 12월, 2023년이 가기 전 연말에 쓴 글입니다. 2023년을 마무리하며.
* 영화 <라따뚜이>(Ratatouille, 2007)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뭔가에 꽂히면 한동안 계속 반복한다.
어떤 노래에 꽂히면 그 노래만 반복해서 듣고, 비슷한 분위기의 노래들을 찾아 플레이리스트를 만든다. 그리고 그걸 계속 듣는다. 그러다 나와 주변의 분위기가 바뀌면 또 다른 노래를 고르고, 또 다른 분위기에 꽂혀서 그걸 반복한다.
영화도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가 아주 마음에 들었을 때도 반복해서 보고, 그 영화의 사운드트랙을 반복해서 듣고, 한동안 그 영화에서 살다가 어느 순간 쓱 빠져나온다.
이렇게 뭔가를 반복하면 나쁜 점은, 내가 만약 (노래든 영화든 뭐든 간에) 그 뭔가를 그리 좋지 않았던 시기에 반복했다면, 그것들을 나중에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을 때 더 이상 예전처럼 즐기기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내가 우울했거나 슬펐던 그때가 자연스럽게 다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좋아하는 마음에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들이, 이제는 그때의 좋지 않았던 기억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무언가가 되었다는 걸 느끼게 될 때는, 내가 왜 그걸 그렇게까지 계속 들었지? 좀 적당히 들을걸, 하며 후회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뭔가를 반복하면 좋은 점 또한,
나중에 내가 그 뭔가를 반복하곤 했던 그때를 추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며칠 전에 나는 내가 요즘 듣는 노래들 말고 예전에 들었던 국내의 겨울 노래를 오랜만에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좋아했던 그 앨범에서도 특히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를 듣자마자, 그 노래를 듣고 또 들었던 고등학생 때의 어느 겨울날로 바뀌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눈이 약간 쌓여있던 어느 날의 저녁 시간, 잠깐 교실을 나와 친구들과 함께 찬 공기를 맡던 겨울날의 장면이 떠올랐다. 그때 그곳, 그 과거의 내가 이 노래를 듣고 있었던 건 아니지만, 그 겨울에 많이 들었던 노래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장면이 머릿속에서 노래와 함께 재생된 것 같다. 홈 비디오 같은 걸 보는 느낌으로, 그때의 추억 속으로 잠깐 들어간 느낌으로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 며칠 전에 혼자 감동해서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생각했다.
이 노래는 여전히 좋네, 그렇게 들었던 이유가 있어.
그 노래는 그때의 또 다른 노래로, 그다음에 또 다른 노래들로 이어졌고, 나는 그렇게 그때의 그 겨울에 잠깐 동안 머물러 있다가 나올 수 있었다.
*
영화 <라따뚜이>에도 비슷한 경험을 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음식 평론가 ‘이고’.
냄새를 아주 잘 맡고 요리에도 특별한 능력이 있는 생쥐 ‘레미’가, 어쩌다가 유명한 식당인 ‘구스토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게 된 청년 ‘링귀니’를 대신해 요리를 하게 되고, 그 비밀을 지켜가던 그들에게 위기가 오던 중이었다. 레스토랑의 총주방장인 ‘스키너’가 링귀니를 내쫓을 궁리를 하고, 레미는 레미의 존재를 들키지 않으려는 링귀니의 말과 행동에 서운함을 느끼기도 하고, 자신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쥐인데 사람인 척, 요리사인 척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괴감을 느끼기도 하며 아슬아슬하게 꼬여가는 위기 말이다.
그러던 중, 혹평을 써서 그 레스토랑을 문 닫게 만들기로 악명 높은 음식 평론가 이고가 레스토랑을 찾아와서 링귀니의 메뉴를 주문한다. 어디 한번 보자,라는 그의 평소 같은 표정으로.
뭐든 자신 있는 요리를 내놔 보라고 해요. 링귀니가 제일 잘 만드는 요리!
이들의 위기는 다 잘 풀린다. 따뜻하고, 자신감 있고, 즐겁게.
레미는 더 이상 다른 존재인 척하고 있다는 생각을 벗어던지고 당당히 요리사가 되었고, 역시나 짐을 벗어던진 링귀니는 레미와 함께 새로운 시작을 한다. 구스토 레스토랑은 문을 닫지만, 대신 라따뚜이 레스토랑이 문을 연다.
이들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행복한 순간을 맞이할 수 있었을까?
여러 이유들이 있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레미가 만든 라따뚜이 한 입이 어둡고 딱딱했던 이고를 (아마도) 어머니가 만들어주시던 따뜻한 라따뚜이를 먹던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으로 데려다주었기 때문이다.
이고는 그렇게 라따뚜이를 먹고 난 후 레미와 링귀니의 진실도 듣고 돌아온다. 그리고 이리저리 고민하며 정성스레 이런 평론을 쓴다.
혹평 기사는 쓰기도, 읽기도 재미있다.
허나 우린 한 가질 잊고 있다.
비평가들이 흔히 무시하는 소박하고 하찮은 일상의 기쁨이 실은 가장 소중한 거라는 걸.
(…)
누구나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순 없다.
하지만 배경이 장애가 될 순 없다.
구스토 식당의 요리사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출신이 소박하다.
허나 비평가로서 장담컨대 그는 프랑스 요리계 최고의 천재다.
난 또 그 식당을 찾을 것이다. 왕성한 식욕을 안고.
생각건대 자신이 잊고 살았던 ‘소박하고 하찮은 일상의 기쁨’을 오랜만에 느낀 그는 아마도, 그 후로 혹평만 쓰는 것을 그만하고 일상의 기쁨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다시 되찾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나쁜 점만 보던 걸 그만두고 일상 속 기쁨도 즐기며 사는 태도로, 시종일관 누구 하나를 어떻게 하겠다는 그 어둡게 찡그린 표정에서 레스토랑 안의 즐거운 여느 사람들과 같은 웃음기 있는 표정으로 바뀐 일상을 살게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너무나 좋아했던 무언가에는 그런 힘이 있고, 우리는 그걸 종종 느끼곤 한다.
그 무언가는 그렇게 때때로는 좋지 않았던 기억을 소환해 내어 우리를 순식간에 그때의 불안과 우울과 슬픔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기도 하고, 그 힘으로 좋았던 기억을 소환해 내 우리를 순식간에 그때의 설렘과 다정함과 행복 속으로 들어가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그 흔한 힘, 단번에 과거의 어느 순간으로 우리를 끌어당겨 놓는 그 힘은 생각보다 더 크다. 그래서 꽂히면 질릴 때까지 반복하는 걸 잘하는 나는 그 노래 좀 적당히 들을걸, 이라며 나중에 후회하기도 하고, 그렇게 그 반복했던 뭔가에 그때의 나의 상태와 주변의 분위기가 스며들어 있는 걸 나중에 깨닫곤 하는 것이다.
대신 그렇기 때문에, 마주치면 기분 좋은 추억 여행을 하게 되는 뭔가를 나도 모르게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고에게는 라따뚜이 같은 것, 나에게는 며칠 전 오랜만에 듣던 그 노래들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러니까, 추억이 깃들어 만들어질 이런 무언가는 앞으로도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생길 것이다. 그리고 그게 조금은 힘든 것이든, 행복한 것이든, 좋아했던 것이었을 테니 그걸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어떤 기억의 농도를 더 진해지게 해주기도 하고, 어떤 기억을 옅어지게 해주기도 하니까, 우리는 그 좋아했던 것들을 다양한 감정으로 또 마주하면 된다. 한껏 반갑게 맞이하며 잠깐 그 추억 속으로 들어갔다 나오거나, 그게 안된다면 아직은 아니야, 하며 괜찮아질 때까지 다시 넣어 놓으면 되는 것이다.
그저 라따뚜이고 어떤 노래이지만 이것들을 통해 행복했던 순간으로 잠깐 갔다 오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 신나는 일이고, 그저 라따뚜이고 어떤 노래일 뿐이니 힘든 추억이 깃들어 있어도 다시 집어넣으면 아무렴 괜찮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고에게 레미의 라따뚜이가 그를 좋은 추억 속으로 데려다주는 그 무언가여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
어쩌면 요즘의 일상 속 어떤 보통의 순간들도 나중에 무언가에 깃들어 즐겁게 추억하게 되는 순간들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며, 마지막으로 며칠 전에 나를 고등학교 때의 눈 오던 겨울날로 단번에 데려다준 그 노래를 소개한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어느 겨울의 추억이 깃들어 있을 것 같은 앨범에 실린 곡이다. 영화 라따뚜이와 이 노래는 레미와 링귀니와 이고가 할 수 있었던 새로운 시작의 따뜻하고 희망찬 느낌과, 서로의 존재가 있다면 힘을 내어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에 있어서 닮아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마도 ‘이렇게 또 한 해가 저무는’ 이맘때쯤 듣기에 너무나 좋은 노래여서, 그 몇 년 전 이맘때쯤의 나도 그렇게나 반복해서 들었나 보다. 이 노래 같은 따뜻함과 설렘이 함께하는 새로운 시작을 바라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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