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없는 빚을 변제하고 사죄없이 배상하는 그들만의 합리

합리와 폭력

by 강하단

합리로 포장된 폭력은 합법적인 경우가 많은데 분명 폭행이다. 합리의 배경이 되는 논리도 반박하기 어려운데 합법으로 한 꺼풀 더 싸여있다. 논리로 무장한 폭력이 권력, 특히, 국가일 때 희생자는 속수무책이다. 이제야 알겠다. 그토록 합리란 이름의 틀을 망치로 깨려했던 니체의 마음을.


사죄없는 배상과, 돈없이 변제하는 것이 가능한 세계다. 마음없는 행동이 가능한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를 살고 있으니 이번에도 그냥 그렇게 받아들여야 할까.


“배상”은 죄를 저지른 사람이 사죄를 하고 그 사죄의 뜻이 혹시라도 모자랄까 염려되어 피해자의 마음을 확인하고는 돈으로 추가 사죄를 전하는 행위이다. 누가 이렇게 정의하는가? 누구도 정의할 필요없는 상식이다. “변제”란 계약과 같은 약속을 통해 지불하기로 한 돈을 주지않아 생긴 빚이 있는 경우에 늦게라도 이를 갚는 것이다.


배상과 변제는 하늘만큼 땅만큼 다르다. 배상을 변제로 해결한다는 것은 배고픈 사람에게 플라스틱 햄버거를 주는 것과 같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마음의 상처를 하나 더 입힌다. 변제라고 말하는 순간 줘야할 돈이 있는 것이고 계약을 염두에 둔다. 강제징용, 위안부 피해 할머니 희생자분들이 과거 일제에 의해 강제로 끌려간 것이 아니라 마치 계약관계에 의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것을 암시하고 있으며 그때 미처 지불하지 못한, 밀린 임금같은 것, 즉, 빚을 지금 갚겠다는 뜻을 가진다. 이는 위안부할머니를 두번 죽이는 몇년전 하버드대학 램지어 논문의 논리를 꼭 닮았다.


배상을 변제하는 것도 난센스이고 변제의 조건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자명하다. 여기에 최악의 화룡정점이 하나 있다. 그나마 그 말도 안되는 변제라는 단어 앞에 떡하니 제3자란 수식어가 있다. 빚을 갚아야 할 사람이 갚지 않고 빚을 진 행위와 무관한 제3자가 빚을 대신 갚는단다. 제3자도 희생자 측 기업과 사람 또는 재산과 돈을 염두에 두고 있는듯 하다. 제3자가 갚는 돈이 희생자 측 재산인데 말이다. 어쩌면 제3자의 돈은 희생자의 피눈물인지도 모를 일이다. 희생자가 원치않는 배상, 변제로 오염되어서는 안되는 배상, 그것도 빚진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변제하는 이 무슨 웃기지도 않는 희극이란 말인가. 그리고, 웃어 주지 않으면 아주 화낼 기세다. 합리가 합법으로 무장하고 폭력을 휘두는 형국이다.


하나 하나 따져보면, 준비된 과정들은 모두 합법적일 것이다. 법하는 분들이니 오죽 하겠는가. 과거사를 정리하고 양국의 미래관계를 위해 나아갈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폭력으로 맨 살이 갈라지는 순간에는 피도 눈물도 나지 않는다는 것을 당해본 사람은 안다. 제대로 치료하지도 않고 임시봉합된 상처를, 그것도 가족이라고 믿었던 자가 헤집으면 그 때는 피눈물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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