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적형 단어 중독사회

목적에 갇혀 존재를 잊다

by 강하단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 “학생은 학생다워야 한다”, “기후변화는 과학이다”에는 공통점이 있다. 달콤한 제안으로 들리지만 실체가 없는 표현이라는 점이다. 어디에도 실체적 존재가 드러나지는 않는다. 목적이란 단어의 어원에는 제안하다는 뜻이 있는데, 위의 세 문장에는 실체없는 헛된 제안으로 유혹하는 표현만 있다. 국민, 학생, 기후변화 모두 또 다른 숨겨진 목적을 위한 모호한 개념의 목적일 뿐 실제 존재는 드러나지 않는다.


나무를 사용해 목적과 존재를 구별해 보자. 나무란 단어만 언급하면 묘목을 심겠다는 것인지 또는 나무를 장작삼아 불을 피울 것인지 모호하다. 나무란 단어에는 무수한 목적이 숨겨져 있어 나무의 목적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으면 알아채기 어렵다. 나무 대신 묘목 또는 장작이라 말해야 비로소 목적 뒤에 숨어 있던 존재가 드러난다. 나무와 마찬가지로 국민, 학생, 기후변화를 언급하면 대개 이해한다고 믿지만 실상은 이해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을 위한 정치, 학생다움, 기후변화 과학 모두 그럴듯 하고 자주 듣는 말들이라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여기에 함정이 있다. 국민, 학생, 기후변화는 모호한 개념일 뿐 제안할 수 있는 수많은 목적이 단어 속에 숨겨져 있다. 국민은 노동자, 여성, 노인, 취학 전 아동, 장애인, 비장애인,스포츠 국가대표, 성소수자 등 대상을 구체적으로 제안할 수 있는 수많은 존재를 포괄하는 단어라서 모호하다.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그래서 공허하다. 학생도 마찬가지다. 초등학생, 고등학생, 폐교를 앞둔 어촌마을 한 중학교 학생, 특목고 학생, 특성화고 학생, 일반고 학생, 학폭 피해자 등 많은 목적을 감춘다. 기후변화도 해수면 상승, 식량위기, 기온상승, 멸종 위기종 등으로 다룰 수 있는 수많은 존재형 목적을 보자기 속에 깊이 감추고 있다.


장작에 불이 붙으면 모호한 목적 대신 구체적인 나무의 존재가 드러난다. 세금을 거둘 대상으로서의 국민인지, 복지지원 대상 국민인지 정해져야 모호한 목적 대신 국민이란 존재가 드러난다. 공부 열심히 해야하는지, 젊은 청춘을 만끽하며 행복을 누려야 하는지 정해져야 모호한 목적 대신 학생으로서의 존재가 드러난다. 탄소중립과 탄소세 징수인지 기후난민의 고통인지 정해져야 비로소 기후변화란 모호한 목적 대신 존재의 실체가 드러난다.


존재가 드러나기 전에는 모호한 목적을 숨긴 단어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목적형 단어들에 “반응”해서도 안된다. 목적형 단어의 예를 들면, 기후변화, 세계평화, 복지, 녹색, 정의, 평등, 균형, 동반자, 협력, 경제발전, 성장, 공동체, 국민행복, 자유, 이데올로기, 좌파, 민주주의 등 무수히 많다. 이런 모호한 개념어인 경우도 있지만 다소 구체성을 띤 단어들도 꽤 된다. 예를 들면 물, 질소와 같은 물질 단어들이다. 물은 식수도 되지만 빗물, 하수, 바닷물로 다르게 존재하기에 여러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질소하면 구체적인 물질 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모호한데 그것이 비료의 재료로 또는 하천을 오염시키는 오염물로 전혀 다르게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좋아한다면 좋아한다는 말 표현 대신 실제로 좋아해야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좋아하는 것을 말로만 한다면, 좋아하는 대상 뿐만 아니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자신의 좋아함이 어떤 목적인지 알지 못할 수 있다. 모호함으로 좋아하고 모호함으로 그 좋아함을 받는다면 좋아한다는 말만 무성한 관계일 뿐이다. 지금의 기후재앙에 대처하는 세계의 노력이 딱 이렇다. 모두들 온통 탄소중립을 얘기하지만 개인으로 돌아와 일상 속에서 탄소중립이란 목적형 단어가 실제로 존재하는 순간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모호한 목적을 얘기하고는 드러나지 않는 다른 목적을 실제로는 목표 삼는 경우도 많다. 기후변화 극복 탄소중립의 실천이 실은 경제 선진국인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면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연결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모호한 목적형 단어의 실체를 감추는 강력한 장치가 하나 있다. 기후위기는 곧 기회, 행복한 국민, 경제성장과 같은 모호하지만 달콤한 목적형 단어와 표현들이 과학적 이론으로 포장된 지표와 합쳐지는 경우다. 탄소감축 50% 달성, 행복지수 국가 순위, 경제성장률 등의 과학적으로 포장된 통계 숫자 목표와 합쳐지면 목적형 단어의 실체를 의심하기 더욱 힘들어져 버린다. 중앙집중 권력형 기관이나 정부가 흔히 사용하는 전략이다. 이런 지표, 통계숫자는 많은 경우, 앞의 여러 예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또 다른 모호한 목적일 뿐 실체를 가진 존재인 경우는 드물다.


은닉하는 목적의 극단은 뭐니뭐니해도 돈이다. 돈이 많다는 표현보다 모호한 표현이 또 있을까 싶다. 은행금고에 있는 돈은 목적일 뿐 결코 존재하지 못한다. 돈으로 아파트 투기하고 명품을 탐닉할지 열심히 기업활동을 할지 또는 환경정책에 쓰일지 모호하다. 돈은 어디든 쓰일 수 있어 무수한 옵션을 가진 목적으로만 존재하는듯 하다. 돈은 구체적으로 쓰이기 전에는 실체적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다. 돈으로 이것 저것 하겠다고 하는 것은 목적을 말하는 것 뿐이다. 정부가 저출산 해결을 위해 예산지원을 하겠다고 한다면 이것은 목적을 드러냈을 뿐 예산의 존재가 무엇인지 전혀 알기 힘들다. 출산장려금을 목적으로 정말 계획에 없던 출산을 하는 부부가 실제 있을 것 같지 않고, 출산장려란 용어를 아무리 정부라 하더라도 사용해도 되는지 의심스럽고 국민도 이런 종류의 목적형 단어를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믿지만 출산장려가 정책이 되는 순간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출산장려는 현실적이지도 않고 정치목적으로도 받아들이기 힘든 불편함을 담고 있지만 일단 정책으로 변하면 그 이후는 의심하면서 반대하기 어려워진다. 모호하여 여러 다른 가능성을 내포하기에 역설적으로 엄청난 힘을 가진다. 실제로도 출산장려 방향으로 지원금이 작동하고 있는지 의심스럽지만 그 이름으로 집행된 정책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중앙집중 권력의 구조는 이렇게 목적형 단어에 중독되어 기능하는 정책들로 유지된다. 출산장려, 기후재앙 위기극복, 경제성장 등의 목적형 단어들이 생명과 힘을 얻어 전혀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기 일쑤다.


타인 그리고 중앙집중 권력형 정부, 국제기구의 목적형 단어 중심의 행동과 정책 패턴을 읽어냈으면 그들을 탓하기 이전에 그와 유사한 행동을 하는 자신을 최우선 관찰해야 한다. 대충해서는 안되며 정밀하게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어줍잖게 변화를 도모하지 않아도 된다. 해결하려는 움직임은 이미 세상으로부터 현실 세계로 몰려오고 있다. 자신을 “정밀”하게 관찰하고 둘러보면 그 물결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주위에 무엇이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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