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사람이 아니라 기능이 되는 순간
사람이 사라지는 일은
갑작스럽게 일어나지 않는다.
대개는 아주 그럴듯한 이유로 시작된다.
누군가는 책임감이 강했고,
누군가는 눈치가 빨랐고,
누군가는 관계를 정리하는 데 익숙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사람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먼저 연락하고, 먼저 조율하고, 먼저 감당했다.
처음에는 선택처럼 느껴진다.
지금은 내가 조금 더 할 수 있고,
이 정도는 내가 하면 되니까,
굳이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러나 선택은 반복되는 순간
성격이 아니라 자리가 된다.
그 자리는 누군가를 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편안함은 곧 기준이 된다.
“원래 네가 하던 거잖아.”
“네가 하면 제일 깔끔하잖아.”
“이건 네가 하는 게 맞지.”
이 말들이 등장하는 순간,
사람은 더 이상 한 개인이 아니다.
관계 안에서 하나의 기능이 된다.
조율하는 기능, 감당하는 기능, 버티는 기능.
이 기능은 대체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미 그 자리에 맞게
관계가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기능이 잘 작동할수록
사람은 더 보이지 않게 된다는 점이다.
힘들다는 말은 유난히 되고,
어렵다는 표현은 핑계가 된다.
이 시점부터 사람은 설명을 시작한다.
왜 지금은 힘든지,
왜 예전과 같은 속도가 아닌지,
왜 이번에는 어렵다는지.
하지만 설명이 늘어날수록
관계는 나아지지 않는다.
이 관계는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필요한 것은 기능의 지속이다.
그래서 이 구조 안에서는 잘해도 문제가 되고,
덜 해도 문제가 된다.
잘하면 “역시 네가 해야 돼”가 되고,
덜 하면 “왜 변했어”가 된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자신을 돌아본다.
내가 예민한가,
내가 이기적인가,
내가 너무 못 견디는 건가.
그러나 질문은 그 방향이 아니다.
이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신의 성격이 아니라 이미 고정된 자리다.
사람은 사라지기로 결심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필요해 보이는 선택을 조금씩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자기 자리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차릴 뿐이다.
이 책은 그 지점을 처음부터
다시 살펴보는 기록이다.
“이 자리는 언제부터
‘선택’이 아니라 ‘당연함’이 되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