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세상엿보기 25.

추상화가 길박(박현길)의 전시 “감정적 층위의 연대기”

by 강화석

대중적 미디어와 마티에르를 통해 지칭(指稱)하는 예술의 표상 또는 Perspective(전망展望)


지난2월 마지막 주말에 인사동 「갤러리 이즈」에서 추상화가 「길박(박현길」의 전시(‘26.2/24~3/3)를 보았다. “감정적 층위의 연대기(A Chronicle of the emotional level)”라는 주제의 전시인데, “나는 감정의 해소를 그리지 않는다. 해소되지 않은 상태로 다음으로 나아가는 인간의 구조를 기록한다.”라고 쓴 작가노트의 첫머리에서 작가의 작업에 대한 기본 설명과 작품들의 방향성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런 주제와 작가가 설명하는 뜻을 언뜻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일단 전시작품들은 마치 새 봄에 어울릴 만치 자유분방하면서, 밝고 화려한 인상을 주는 것에 눈길이 끌렸다. 물론 전시된 모든 작품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대체로 작품들에서 그런 느낌과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지만, 다른 일부의 작품들에서는 새로운 시도를 보이려는 뜻이 엿보일 만치, 표현방식이나 기교가 확연히 다른 화풍을 보여 주고 있었기에 이번 전시에는 변화와 전환의 시도가 내포된 일련의 작업과정을 기록하려는 작가 나름의 기획적 구성이 담긴 전시라 할 만 하였다. 작가는 기존의 팝 아티스트(pop artist)들이 그랬던 것처럼 응용미술분야를 전공했을 뿐 아니라, 광고나 마케팅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사회경력이 풍부한 이론가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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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작품들은 크게 두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이것은 표현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에 따른 것이었는데, 작가에게 물으니 실제로 제작 시기의 차이로 구분되는 셈이었다. 전체 전시 작품의 반 이상(13작품)을 차지하고 있는 한 영역에서는 작품에 특정의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Abstract 2025 #1」라는 식으로 일련번호처럼 부여하고 있었으며, 초현실주의 방식이라 할 꼴라쥬(Collage)와 자동기법(automatism)으로 제작하면서, 제 각각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표현한 추상작품들이었지만 한눈에도 시리즈 작품이라는 것이 분명해 보일 정도로 분위기와 화풍이 유사해 보였다. 그러나 또 다른 영역의 작품들(11작품)은 이와는 구분이 확연하게, 마치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 할 만하게 차이가 있게 그려졌는데, 제작기법이나 추구하는 주제의식조차 이질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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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 작품들을 “감정적 층위의 연대기”라는 주제를 내걸고 전시하고 있다. 익숙한 듯 낯선 단어로 설명하고 있는 주제의 의미를 작가노트에 적혀있는 글의 일부를 적용해서 재정리해 본다면, “무언가에 대한 인식이후 발생하는 감정들이 해소되지 않거나 사라지지 않은 채, 합쳐질 수 없는 이질적인 각각의 감정들이 층위(層位)를 만들어가는 것을 시간순서대로 지켜보며 기록한 것“이라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일련의 작업과정을 통하여 작가가 자기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반응, 즉 감정을 스스로 제3자가 관찰하듯 객관화하여 시각화하겠다는 의미로 유추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감정이란 인간의 감각기능에 따라 대상을 지각하거나 그 반응에 의해 뒤따르는 상태라고 할 수 있지만, 기본 개념으로 본다면 “인간의 감정은 에너지의 발생과 그러한 신체의 변화”일 뿐이다. 따라서 대상에 대한 의식이나 행동을 유발하는 상태를 형성하는 에너지 발생이나 그런 과정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므로, 감정이란 것은 특정의 의미를 내포하기 전의 상태에서는 어느 것도 아닌 무색(無色), 무념(無念)의 과정과 같은 것일 뿐인데 이런 감정을 그대로 쌓아서, 그야말로 층위(層位, level or layer)를 만들고 그대로 기록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해석하려 한다면 다소 난감해 지기도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를 “감정 탐구에 대한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해 보기도 한다. 작가가 자기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신체적인 반응, 또는 에너지의 발생을 시각화한다는 시도가 가능한지에 대한 여부와 함께, 관람자의 입장에서는 이에 대해 어떻게 지각하고, 또 어떤 반응에 대한 감정을 떠올려야 하는 것인가 라는 생각을 포함하여, 작가와 관람자가 지각하고 반응하는 감정의 원천을 탐구하려는 내면의 의지나 방향을 설정하고자 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이런 의도에서인지 박 작가는 전시를 아우르는 대체적인 주제를 내세우면서도, 전시에 내건 각 작품들마다 작가의 제작개념이나 주제를 매우 성의 있게 정리하여 안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관람자들에게도 이런 방향에서 함께 공감하거나 그런 분위기에 젖어볼 수 있기를 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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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관람자들은 전시공간에서 각각의 작품에 관련한 다양한 정보들을 종합하면서 작품을 대하고, 또 몰입하며 이해하기에는 현실적으로 여의치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제작과정에 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작품을 감상하거나 이해하기 바라는 기대는 어긋나기 마련이다. 단지 관람자들은 시각적으로 드러난, 즉 시각언어로 이뤄진 그림을 직관적으로, 개인의 감각능력이나 내재한 인식체계를 통해 지각하게 되므로, 작가가 제시한 제작의도와 상관없이 관람자의 감각 반응과 그에 따른 감정유발을 통해 발생하는 자연스런 소통을 즐길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때 발생한 그 감정은 대상에 대한 반응에 따른 특정한 ‘무엇’이 될 것이며, 단순한 에너지의 변화 상태를 통과한 이후 만들어진 ‘특정의 감정’이 되어 버리는 것이 된다. 즉 신체내부의 화학적 변화나 에너지 또는 기운의 발생에 그치는 것이 아닌, 어떤 ‘대상’이 자극한 것에 반응한 “특정한” 상태로의 변화인 것이다. 어느 예술작품이라도 이런 식의 자극과 반응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생산되고 소비된다는 것은 자연스런 연관 작용인 것이다. 따라서 화가들이 시각적으로 인식이 가능한 다양한 소재와 미디어를 통해 자기의 내적 심상을 표상하려는 것은 이런 소통의 과정에 대한 자연스런 작용과 반작용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미국의 예술철학자 넬슨 굿맨(N. Goodman)은, “예술작품이 무엇인가를 표상한다는 것은 예술작품이 과학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인식적 기능을 담당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예술작품은 예술적인 언어를 통해서 그가 대상으로 하는 사물현상에 대하여 어떤 정보를 제공한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곧 작품 속에서 표상한 것은 단지 예술적인 언어를 이용했을 뿐 작품 속에서 무언가를 전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굿맨’의 이런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이 전시의 작품들을 대하며 작가가 추구하고 있는, 또는 작가의 내적인 주제의식을 드러내기 위해 신중(愼重)해(?) 하고 있는 그 의도는 무엇인지가 궁금하였다. 일반적으로 추상화가들이 추구하는 작품세계나 작품의 주제는 자기 내면의 심상을 어느 정도 무의식적인 행태인 오토마티즘automatism으로 표상하려는 것이라면, 또는 의식세계를 초월하여 스스로에게도 미지의 세계라 할 내적 영역에서 건져 올리려는 대상에 대한 명확한 정의나 재현이 불가한 것이 일반적인 것이라면, 그런 미지의 세계로의 여정에 나선 모험과 탐구를 즐기듯 “아웃풋(output)”을 생산하면 될 터인데, 작가는 매우 의지있게 자기의 작업에 대하여 세심할 정도로 언어적인 서술에 매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따라서 필자는 작가의 작품에 대해 섣불리 작가가 언급한 언어적 의미와 시각적으로 재현된 작품에 대한 인상을 연관하여 이해하기가 어려웠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그러면서 작품을 제작한 작가의 의도와 작품을 대하는 독자가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별개이며, 철저히 작품은 작품을 보는 관람자(또는 독자)의 이해에 달려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필자에게는 한편으론 마뜩찮은 가이드라인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으며, 솔직히 작품 감상에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위에 언급한 「굿맨(N. Goodman)」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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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의 의미는 예술가의 의도일 수 없는 것이다. 즉, 애초부터 일상적 콘텍스트(context) 밖에서 사용된 언어로서의 예술작품의 의미는 그것을 만든 예술가의 사적인 생각이나 의도가 될 수 없고, 오로지 예술작품을 형성하고 있는 바로 그 작품의 언어적, 다시 말해서 공적 의미일 수밖에 없음을 쉽게 납득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에 관한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이자면, 프랑스의 시인「폴 발레리」는 자기의 시「해변의 묘지」에 대하여 평자(評者)들 조차 다양한 해석으로 갈피를 잡지 못하면서 시인에게 시의 의미에 대하여 묻자, 그는 “그 시의 의미는 독자가 해석하는 의미들”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이것은 「피카소」의 유명한 추상화「게르니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평자들은“파시즘 대두에 대한 위험성”을 피카소가 경고한 것이라는 해석을 하였지만, 피카소는 그저 “붉은 황소의 머리”를 그린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평자들의 해석을 부정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런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의 의도와 예술작품의 의미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피카소의 의도가 “붉은 황소의 머리”를 그린 것이라 해도 독자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작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파시즘 대두의 위험”을 뜻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 보면서 필자는 작가가 의도하는 바는 상기한 맥락에서의 의도와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가 스스로 세상을 바라보거나 자기의 예술을 펼치려는 여정에서의 진지한 자세를 가다듬으려는 의도로 비쳐지게 되었다. 즉 추상화가로서 선택한 마띠에르나 표현기법에 있어서, 그리고 자기의 예술을 표상하거나 내적인 주제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대상이나 사물현상을 대하는 전망(perspective)을 펼침에 있어서 내적인 긴장감이나 다그침을 스스로에게 펼치려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작업에 임하는 태도이면서 정신적 자세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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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작가의 작품들 중 한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는 “abstract(추상) 시리즈”는 작가의 작업노트에서 밝히고 있는 진지하고 아카데미칼academical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매우 자유분방하고 편안한 내적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시각적 재현은 거침없고 무의식적인 혼란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으면서도, 철저하게 의식을 배제하지는 않으면서 균형과 질서를 의식하고 있다는 느낌을 감지하게 한다. 즉 화폭에 사용되는 다양한 기호적 상징이나 선과 면을 적절하게 배치하면서 이미 사용된 미디어이면서 콘텐츠인 재료(matiere)를 재배치하여 절묘하게 무의식 상태를 의식적으로 조합하면서 완성해 나갔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전체 작품들 중 반 이상에 이르는 이 시리즈 작품들이 개별적으로 모두 다른 분위기와 구성을 보이면서도 일정한 틀 안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하는 이유이면서, 작가 자신이 하고 있는 절제있고 의도적인 추상작업들에 특정한 의미를 내포하려 한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각 작품들은 그저 어떤 대상이나, 스스로 벌인 행위에 의해 발생하는 반응으로서의 감정에 해당하는 것인데, 이를 그저 하나의 넓은 범주 안에 속하는 “감정”이라 지칭하는 것에는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혹은 이것이 아니라면 ‘어떤 감정’이라도 각각 같지 않은 다른 감정이므로 그것들이 그대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도록 유지하려는 가운데, 각각 그대로 박제(剝製)하듯 기록하려는 것이며, 이것이 시간의 순서대로 쌓여간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작가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동의를 얻어내면서 공유하거나 공감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는 다소 무리가 있는 발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반드시 독자의 반응을 요구하거나 기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이러한 노력에 대한 스스로의 단속이거나 진지한 성찰적 자세를 강조하려는 것에 해당할 것이란 추측을 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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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박 작가의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생동감과 밝고 경쾌한 느낌은, 이것이 그저 직관적인 반응에 불과할 지라도 관람자들의 시선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인 판단을 유발하는 근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치 천진하게, 그리고 아기자기 하게 장난을 하듯 다루고 있는 재료와 소재들은 실제로는 사회적 현상과 관련이 있는 상징과 은유를 담고 있는 미디어로서의 성질을 갖고 있으며, 무의식적 구성이나 배치를 하고 있는듯하면서도 은근히 의식하면서 어느 위치를 선택하여 의미있는 시선을 이끌어 내고자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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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화폭에 담은 개별화된 재료와 소재의 선택이 자유롭고 가벼운 심적 상태에서 이루어지면서도 특별할 것은 없어 보이는 것처럼 특정 부분을 두드러지게 하지 않은 것은 그것에 의한 자극과 반응이 특정하길 원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하면서, 자극과 반응에 따른 감정이 어느 순간에 발생하고 머무르기 보다는 연속적이거나 그런 감정 상태가 지속하고 반복되길 바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되니 오토마티즘automatism을 작동하면서도 무언가에는 함몰되지 않으려는 절제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또한 이런 이유 때문에 작품들에 대한 인상에서 감성에 치우치거나 몰입하게 하기 보다는 건조한(dry) tone & manner의 분위기에서 현대적이며(modern), 세련된(?) 느낌을 감지하게 한다.

그러나 작가가 제시하려는 “감정적 층위(emotional level)”라는 개념은 언어로 표현은 가능할 지라도 의미를 공감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감정의 층위(層位)”라는 것, “감정들이 순서대로 형성된다.”는 것의 의미를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의 의미를 해석함에 있어서 반드시 유의미성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언어에 대한 무의미를 주장하는 미학적 관점도 있고, 이를 시각적 감성으로 이해하거나 전이하여 ‘무의미의 의미’, 또는 ‘의미의 무의미’ 등을 시도하려는 예술이론을 감안한다면 얼마든지 설정이 가능한 언어적 표현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는 감각으로 느끼거나 연상(聯想)할 수 있는 것이기에 반드시 과학적 논거나 구조에 의해 의미와 무의미를 판별하려는 것은 적절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감정적 층위”와 관련해서는 “감정”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나 개념으로 가두기보다는, 자유롭게 전개되거나 펼쳐지는, 또한 그 감정들을 이해하고 판단하기 보다는 그 상태 그대로를 시각화해 보려는 시도에 맞추어 생각을 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런 가운데 기존의 발상으로 감정을 이해하고 고착화시키기 보다는 감정의 발상을 자연스럽게 유지하면서 작가 나름의 “개념”을 제안하거나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시각화의 의미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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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작가의 비교적 최근에 완성한 작품이면서 동일한 주제의식을 따르려한 작품들을 살펴보자면, 이전의 작품들과는 제작 방식이나 표현 기법에서 차이가 있는 셈이다. 또한 작품마다 개별적으로 작품이름을 부여하였고, 작품의 표현이나 담고 있는 메시지 역시 각각 다르다. 아마 그 이전 작업에 비하여 변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작품에 담겨있는 내면의 주제역시 차이가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 중에 붉은색 painting으로 칠을 한 바탕위에 4열 5행으로 일정한 간격을 구분한 후 그 위치에 붉은 색의 덩어리를 부착(접착)하였다. 얼핏 보면 이 덩어리들은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물론 튜브에 든 붉은 색 물감을 짜내거나, 진흙덩이를 작게 대충 뭉뚱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편 사람의 배설물 느낌도 갖게 한다. 이런 시도는 회화작품에서 자연스럽게 볼 수 있을 만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반응이나 감정유발은 매우 묘하게 다양할 수 있다. 이런 자극적인 시각작업은 파란(Blue)색으로 바탕을 칠한 화판에 작은 크기의 사각입방체를 역시 일정하게 정렬하여 부착한 작품에서도, 작품 안에 담겨있거나 의도하는 메시지에 대하여 의미를 이해하거나 해석하도록 자극한다. 마찬가지로 태극기에서 사용하는 4괘 중 “리(離, ☲)”를 흰색으로 조형화하여 이를 90도로 뉘여 분홍색(pink)바탕의 화판에 그린 작품이나, 숫자와 알파벳, 그리고 연산부호 중 일부를 일러스트로 정리하기라도 한 듯 5열 5행으로 반듯하게 배열한 작품, 현대어로 풀어 쓴 훈민정음 언해본의 문장들을 작은 화판 12개에 각각 세로로 쓴 후, 그 문장사이의 간격에는 물결무늬를 세워 배열한 것들을 하나의 화판에 결합하여 완성하기도 한 작품이나, 또한 두꺼운 느낌의 천인 듯, 가죽 조각인 듯 한 소재에 짙은 금빛 칼라를 칠하고 이를 흰색의 석고를 칠한 화판위에 부착한 후 “과격한 포장”이라 제목을 붙인 작품 등, 이 모든 작품들을 일정한 주제의식으로 묶기에는 공통점을 찾기가 수월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재료와 표현 방식을 실험하듯 적용하여, 단순한 붓칠의 방식이 아닌 어느 정도는 설치(設置)와 같은 조형작업을 통하여 작가의 내면에서 스스로 소통하고 있다. 이러한 작가의 작업과정은 어느 정도 이해할 만하게 파악이 되면서도 작가의 의도나 표상하려는 의미에 대해서는 쉽게 단정하기에는 어려움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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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작가의 전시 주제를 단서로 연관 지어 본다면 이런 다양한 작업의도와 방식을 통하여 관람자에게 보여 지는 미학적 자극에 대한 반응과 작가 스스로 내면에서 지각하고 느끼는 감정의 유발과정을 모티베이션motivation 하려는 시도일 것으로 판단하게 한다.

이것은 이미 앞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예술의 기능은 본질적으로 표상적이라는 것이며, 이는 과학의 기능과 다를 바 없으며, 과학의 목적이 진리는 밝히려는 것처럼, 예술의 목적도 진리를 밝히는 데 있기 때문에, 예술작품을 아는 것, 즉 예술작품을 해석하는 작업은 그것이 지칭한다고 전제되는 대상으로서의 사물현상을 찾아내는 일이 될 것이다.”라는 넬슨 굿맨(N. Goodman)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데, 박 작가는 그간의 작업과정을 통해 나름으로 예술하는 의미를 추구하면서 그리고 스스로 터득해 가는 가운데, 다양한 방식들을 선택하고 적용하면서 예술의 기본 기능이라 할 작가의 예술세계, 또는 작가의 내면적 주제를 표상하기 위하여 마치 탐구하듯 자기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중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이런 노력과 함께 삶의 현장에서 발견하는 여러 사물현상을 통해서, 그리고 꾸준히 스스로를 지켜보거나 그 결과를 기록하고자 하는 방식으로 나타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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