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현욱 산문집.
장마라 하기에는 어색했다. 습의 흔적 하나 없는 무자비한 금빛 열기만이 태연히 일렁였다. 타오르는 태양은 세상을 증발시킬 것만 같았다. 메마른 땅은 실핏줄처럼 갈라지고, 여름꽃들은 누렇게 변한 모가지를 떨구고야 말았다. 떨궈진 꽃잎들은 가루가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번 칠월의 온도는 나무와 꽃들에게는 가히 잔인한 시련이라 적어야 할는지도. 일터에도 건조한 바람이 몰려왔다. 나의 삶에서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회사의 일들이지만, 열기와 함께 혹독한 시간이 지나가는 중이었다. 사나운 불확실성에 눈을 감았다. 맹렬한 태양빛은 나의 눈꺼풀마저도 꿰뚫었다.
나는, 나를 지켜낼 수 있을까. 무엇을 버려야만 할까.
살아가면서 마주해 달려오는 시련들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리 도망쳐도 부지불식간에 목덜미를 휘어잡고서 가차없이 나의 뺨을 후려치던 순간들. 그리고 그것들에 필사적으로 저항하던 심지처럼 작은 의지들이 수없이 실뜨기를 해왔다. 시련이 있었기에 비록 예쁘지는 않지만, 감빛 스웨터같은 지금의 나로 존재할 수 있었다고 믿는다. 시련은 새장처럼 나를 가두어 자유를 억압했다. 공포, 두려움, 고독, 비참함. 이런 것들이 나의 주변에 벽을 세웠다. 새장 안에서 굴복하든지, 그곳에서 벗어나든지. 그건 내가 가진 조금의 의지와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시련은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질문 같은 것이다.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삶을 완성시키는 불가결한 질료라는, 이 끔찍한 진실을 되뇌인다.
이십칠 년 전, 미친 짐승처럼 울부짖던 계절을 기억한다. 겨울이 캄캄한 입을 벌려 뱉어낸 싸늘한 선언과도 같던 경제부총리의 담화를 떠올린다. 나를 막아서던 들어보지도 못한 국가부도 사태. 달아나지 못하고 붙잡혀 새장 속에 갇혔던 그날의 굴욕을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아버지의 부도로 도망치듯 거처를 옮겨야만 했다. 육중한 셔터를 힘겹게 들어 올려야만 했던 단칸방이었다. 그래. 그곳은 새장이었다. 숨막히는 공간에서 입을 틀어막고 살아야만 했던 치욕의 감각이 다시 살아나 꿈틀거리는 것만 같았다. 감정의 배설물이 충격과 공포를 지나, 증오의 형체를 갖추기까지, 그리 오랜 기다림이 필요치는 않았다.
어느 날 캄캄한 방구석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던 어머니는 고개를 깊이 수그리고, 초점 없는 검은 눈동자로 황톳빛 장판을 내려다보며 말씀하셨다. 술이 섞인 쉰목소리는 갈라지며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고, 흰자위는 붉게 금이 가 있었다.
'미술학원은 이제 못 다닐 것 같아. 너무 미안해. 엄마가.'
미술을 포기하고 어떻게든 대학이라는 곳에 가기 위해, 해본 적도 없는 학업에 매달려야만 했다. 필사적으로 나를 타이르며, 분노를 억누르면서. 결국 등록금이 저렴한 국립대학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그날, 참 많이도 우셨다.
가끔 어머니는 그 시절이 있었기에 내가 책이라는 걸 읽고, 글이라는 걸 쓰게 되었다고 다행이라 말씀하시곤 한다. 사실 난, 다행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선택의 결과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거니까. 전부 결과론적인 평가들일 뿐인 거니까. 하지만 새장 안에서 나오기 위해 나를 바꿔야만 했고, 선택해야만 했던 건 분명했다. 그리고 무언가를 바꾸기 위해 나는 소중한 꿈이라는 걸 박제시켜야만 했다.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인간은, 결국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는 거니까.
지금도 삶의 창살 아래 그저 체념한 표정을 지으며 새장 속에 갇혀 살아가고 싶지는 않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누군가를 만나고,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나를 죽이지 못한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말을 가슴에 품고 달린다. 수많은 시련들이 다녀갔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고, 그것들은 나를 죽이지 못했다. 잔인하리만큼 뜨거운 칠월이지만, 열기 속에 나는 달궈지고, 그만큼 더 단단해 질 것이다. 나는 태어났고, 단 한 번밖에는 살아볼 수 없으며, 그래서 삶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는 거니까.
시련에게 빼앗긴 자유를 되찾기 위해 조금의 의지와 또 조금의 슬픔을 품고서, 우리는 그렇게 발버둥치는 것이다.
덧. 온도계가 빨갛게 달아오르고, 업무가 쏟아지니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틈틈히 글을 읽고 쓰던 시간이 박탈된 듯해 조금 속상하기도 하지만,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니었어. 라고 말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