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대의 계단은 아름답다.

강현욱 산문집.

by 시골서재 강현욱


하아... 휴...

거칠고 둔탁하고, 원초적인 숨소리만이 들려온다. 비는 그쳤고, 세상은 빛났다. 빛에 이끌린듯, 영험하다는 돌부처를 향해 돌계단을 오른다. 멀리서 초록은 불타오르고, 뺨은 감빛으로 익어 터질 것만 같다. 수분의 밀도가 팽팽한 여름이면 조금만 계단을 올라도 땀인지, 물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는 것들이 솟아 오른다. 내 안에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숨어 살았던가. 살갗과 셔츠가 내피와 외피처럼 하나가 되어 엉겨붙는다. 기분 나쁜 눅진함과 예상치 못한 피곤함이 밀려온다. 발목과 무릎, 그리고 허벅지 근육의 무게가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그렇지만, 본능처럼 한발한발 떼어낸다.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았다. 올라가다 앉아서 좀 쉬고, 또 좀 올라가다 다시 쉬고. 옆 벤치에 앉아서 쉬는 남녀의 대화를 엿듣는다.

다시 일어나 나는, 나만의 계단을 오른다. 무엇에 도달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 여길 언제 다 올라가...

- 가다보면 올라가져.


며칠 전, 아이의 학원 앞에 주차하고 차에 기대어 녀석을 기다렸다. 언제나 싱긋 웃으며 종종 걸음으로 다가오는 아이. 그런 녀석을 볼 때면 참을 수가 없어 볼에 손을 대고 달래듯 어루만진다. 차에 오르자마자 가방에서 흰색 종이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1학기 내신 성적표라며 나에게 건네준다. 무엇이 있길래 저리도 무감한 표정일까. 종이를 받아들고 유심히 내려다 봤다. 모든 과목 옆에 일등급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놀라움과 환희에 눈동자는 팽창하다, 이내 고마움이 되어 나의 눈매는 길어졌다.


- 딸. 아빠가 많이 고마워.

- 응? 뭐가... 고마워?

- 너가 잘 해줘서 고마워.

- 그게 왜 고마워. 당연한 거지.

- 세상에 당연한 건 어디에도 없어. 그래서 고마운 건. 고마운 거야. 아주 많이 고마워.


나를 빤히 바라보던 녀석의 안구가 투명하게 굴절되어 갔다. 아이를 또 울렸다며 질책할 전 아내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도는 것만 같았다. 집까지 가며, 여느 때처럼 녀석의 강의를 주의깊게 들었다. 때론 국어가, 때론 역사가, 때론 물리 수업이 되기도 하는 녀석의 이야기는 십칠 년 전, 내가 시작했으나, 이젠 아이가 쓰고 있고, 언젠가는 녀석이 스스로 끝맺어야 할 것이다. 계단을 오르는 아이의 뒷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나의 시선은 움직일 수 없었다. 가슴이 무지근했다. 녀석이 오르는 계단의 끝에는 갓 지은 쌀밥과 된장찌개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기도 할 것이고, 때아닌 폭우가 쏟아지기도 할 것이다. 비록 녀석의 계단을 내가 대신 오를 수는 없겠지만, 언제까지나 자그마한 등을 지켜보기 위해 나는 나의 계단을 필사적으로 오를 것이다.

산능선을 따라 투명한 바람이 불어온다. 나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돌부처의 미소를 보며 생각한다. 계단을 오르는 일은 목적성과 의지가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압도적인 중력을 거슬러야 하는 일이니까. 때로는 고되고, 슬프기도 하겠지만, 올라야만 하는 일이니까. 사무실을 향해 오르는 계단, 누군가를 만나거나, 보내기 위해 오르는 계단, 사랑하는 이를 축복하거나 애도하기 위해 오르는 계단, 광활한 세계와 자유를 바라보기 위해 오르는 계단. 이 모든 계단이 시작된 곳은 어렴풋하지만, 모든 층계의 하나하나에는 한 시절의 땀과 눈물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오늘도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올라야 한다. 이건 내가 시작한 이야기니까. 늘 그랬다. 힘겹게 올라도 결과는 알 수 없는 게 인생이라는 계단이었으니까. 릴케의 말처럼, 계단을 오르며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은 그 얼마일까. 하지만 우리가 오르고 내리던 흔적들이 우리의 한 시절을 건널 수 있게 했음을 또한 잘 안다. 한 가지만큼은 확실하다. 계단을 오르는 고단한 눈빛에도 따뜻한 햇살은 언제나 머물렀다는 걸.

당신의 계단은 당신만이 오를 수 있다. 그래서 특별하고 아름답다. 그러니 가슴펴고 당당하게 올라라.


덧. 매일 계단을 오르다 불현듯 내가 뭘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아 쓰게 되었습니다. 좋든, 싫든 각자의 계단에 환한 빛이 쪼여주길 바라봅니다. 더 이상 비 피해가 없길 바라며,

작가님들, 그리고 독자님들. 항상 강건하시길 바랍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새장 속에 갇힌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