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대신 헤베꽃 - 5
<Be coloured>
흩뿌려진 빛깔들이
물들어 짙어지기까지.
음악을 시작하고 가장 크게 배운 것이 있다. 세상엔 서로 다른 많은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부터 타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 그리고 겸손. 아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일 이것들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배웠는지 궁금하다. 나는 음악을 통해 배웠다. 특히 음악을 하는 사람들로 인해, 대학 생활 5년동안 말이다. 실은 아직까지도 배우고 있다.
부끄럽고 아주 솔직한 이야기이지만, 첫 대학에 입학한 1학년 시절, 나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의 음악이라고 들려주는 것들을 살짝 무시하곤 했다. 물론 성격상 겉으로 티내진 않았다. 속으로 '칫, 나도 저 정도 곡은 쓸 수 있어.' 생각하면서 겉으론 너무 좋다고 호들갑떨며 박수를 쳐주었다. 공강 시간에 연습실에서 다같이 피아노치고 노래하며 즐겁게 놀 때도 속으론 누가 피아노를 잘 치네, 나보다 어떻네 평가도 했었다.
각자의 음악을 들려주며 작은 공연을 펼치는 그 시간동안, 나는 주로 듣기만 했다. 내 음악은 잘 들려주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뭐 얼마나 대단한 음악이라고, 그들의 자신감이 같잖아 보였던 걸까? 내가 그들을 평가하는 것처럼 나도 속으로 평가받을까 두려웠던 걸까? 끔찍하게 악한 나의 본성이 드러나는게 싫어서 차마 내 마음을 끝까지 들춰낸 적은 없다.
결정적으로 당시 내가 다니던 학교는 나에겐 약간 아쉬운 학교였다. 나 여기보다 좋은 학교 갈 수 있었는데, 내 동기들 너무 좋지만 음악만큼은 더 잘할 수 있는데, 내 꿈을 펼치기에 여긴 무대가 작은데, 따위의 생각들을 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었다. 학교에선 재밌게 지내면서도 집에 돌아와서는 혼자 열등감을 느껴 꽈배기처럼 배배 꼬인 생각들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첫 학기가 끝나고, 반수를 하기엔 나이가 많으니 편입을 준비해야겠다 마음먹었다. 그럴려면 2학년 까지는 열심히 다녀야 했다. 지역아동센터에 음악 봉사도 나가고, 재능기부로 해외봉사도 다녀오고, 음악교육 프로그램 보조강사와 행정일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면서도 딱 한 번이지만, 차석을 했다. 1학년 2학기 때였다. 장학금을 받고 더욱 우쭐해졌다. 나, 조금 더 좋은 학교에 갈 자격이 있지 않을까?
내가 스카이에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서울에 태어나 서울에서만 살았으니 서울에 있는 학교만 한 번 다녀보고 싶은 거였다. 편입 준비를 하며 그룹 레슨을 하기 시작했다. '세 시간 안에 30마디 내외의 곡을 작곡하시오'. 입시곡 문제의 대표적인 표본이다. 우린 세 시간 후 각자의 곡을 서로 듣고 피드백하기로 했다. 세시간이 지나면, 어쩔 수 없이 내 곡을 그들에게 들려주어야 했다.
그 때 나는, 여태껏 나의 음악도 누군가에게 편안하게 들려주지 못하면서 남의 곡을 평가할 줄만 알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자신감이 부족했다. 눈치보기 바빴다. 세 시간동안 오선지에 써내려간 내 음악을 선생님이 피아노로 연주해주시는 동안, 그룹 레슨 친구들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온갖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내 음악을 그들이 좋다 별로다 즉 칭찬과 무시 둘중에 하나로 평가할 것만 같았다.
나는 원래 꽤나 고지식해 융통성이 부족하고 어딘가 꽉 막힌 성격을 가지고 있다. 어쩌면 예술가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다. 또한 외골수적인 성격은 음악에 대한 고집스러운 열정으로 긍정적 작용도 했지만, 때로는 부족한 창의력을 증명하기도 했다. 편입을 준비한 이래로 조금씩 인지한 것들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이전 학교에 자퇴원서를 내며, 그 학교와 친구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또 자신감도 없으면서 속으로 평가하기 바빴던 나를 스스로 되돌아보며 반성하기도 했다.
편입학 후 3학년 1학기 첫 위클리(연주) 시간에 이전 학교에서 썼던 나의 가곡을 발표했다. 여전히 걱정이 가득했고 창피했다. 같이 연주한 다른 동기들 곡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만 이러는 걸까? 다들 평가받는걸텐데 나만 창피한가? 집에 오자마자 악보와 음원을 영구 삭제했다. 그러나 몇 주 뒤, 조금 친해진 17학번 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언니, 위클리 때 언니 곡 진짜 좋았어."
어느 부분이 왜 좋았는지 설명해주는 그 동생을 통해 나는 또한번 배웠다. 모든 예술, 그리고 음악에서는 어쩌면 누가 더 잘하고 못하냐보다 누가 어떤 색깔을 나타내고 표현해내는가가 더 중요했다. 음악 중에서도 작곡에서 특히 그랬다. 그 동생과의 대화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나에겐 커다란 배움이었다. 여태껏 타인의 예술성에 함부로 들이밀곤 했던 나의 잣대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조금씩 내 음악과 생각을 타인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편안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선배지만 동생인 14학번 남자애가 나의 감성적인 곡 제목을 보고 오글거린다 놀려도, 니 곡 제목도 만만치 않다며 받아칠 수 있게 됐다. 이전 같았으면 '오글거린다'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느껴 내 결과물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이상 그 친구의 말이 무시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타인의 개성이, 본인과는 다르다는 것에 대한 어떠한 인정과 존중을 장난스럽게 표현한 것으로 느껴졌다. 꼬여있던 마음이 풀려가는 과정이었다.
내가 거쳐간 학교들의 분위기가 다 좋았던 덕분도 있었을 것이다. 정말 감사한 일이다. 편입하고 나서 적응하지 못할까봐 걱정했는데, 자신감이 아닌 요상한 자존심을 내려놓고 중간곡, 기말곡, 점점 타인들의 도움을 통해 음악들을 하나하나 완성해 갔다. 컴퓨터음악을 새롭게 배우며 전자음악실을 왔다갔다 할 때도 말이다.
하루는 "언니 전음실에서 뭐하게?" 라는 동기 동생의 물음에, "플룻 곡 쓰려고 녹음하게, 근데 나 플룻 잘 못불어서 망했어." 라고 대답하니 자기가 어렸을 적 플룻을 오래 했다며, 본인 곡을 준비하는 것마냥 여러 주법들을 대신 불어주기도 했다. 믹서 다루는 것을 어려워하니 척척 알려주기도 했다. 전자음악실에서 온종일 나를 도와주던 예고 출신의 그 멋진 동생은 지금까지도 매일 연락하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됐다.
그렇게 4학년도 끝나가고, 졸업연주 시즌이 왔다. 그 친구의 도움을 받아 완성했던 플룻곡의 주법들을 이용해 주제를 달리 해서 오보에 솔로곡을 탄생시켰다. 전자음악이 부전공이었던 나는 커리큘럼상 졸업연주곡에 전자음향을 넣어야 했다. 오보에가 연주되면 실시간으로 컴퓨터에 녹음되어 맥스 패치를 통해 내가 원하는 음향으로 재생되는 음악을 만들었다. 이전처럼 꼬여있는 마음을 가지고는 혼자서 낼 수 없었던 결과였다.
대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배운 많은 것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많은 타인들, 그들에 대한 겸손, 존중. 그것을 플룻보다는 조금 더 부드러운 오보에 소리로 담고 싶었다. 소중한 사람들과 그들에게 받은 영향들, 그 빛깔들이 도화지에 뿌려지고 그것이 내 안에서 점점 짙어지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곡 설명부터 정했다. "흩뿌려진 빛깔들이, 물들어 짙어지기까지."
곡 설명도 오글거리는데, 제목은 더 오글거리게 지어지고 말았다. "Be coloured". 사실 그닥 마음에는 안 드는 제목이지만 별 수 없었다. 설명을 가장 잘 함축할 수 있는 영어가 이것 뿐이라고 생각했다. 역시나 그 14학번 남자애가 '누나 진짜 감성충' 이라며 놀렸다. 그 친구 뿐 아니라 정말 많은 동생들에게 놀림을 받았다. 그 놀림들이 더욱 편안했고 재밌었으며, 고맙게 느껴졌다.
아직까지도 학교 사람들과 옛날 얘기들을 하면, 당시 감성 넘쳤던 곡제목과 설명들에 나는 많은 놀림을 받곤 한다. 이전 학교 동기들도 여전히 자신있게 본인을 뽐내며 각자의 일을 한다. 고맙게도 그때 동기들도 여전히 나에게 연락해준다. 참 소중한 인연이다. 단지 이것들 만으로 내가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은 아니다. 다 표현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음악을 통해, 음악을 하는 내 많은 소중한 친구들 덕분에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한 타인에 대한 이해와 존중을 배웠다. 성결대학교와 추계예술대학교에 깊은 감사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