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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수 Jan 24. 2022

영국에 갑니다

영국으로 출발하기까지 A-Z. 2021.11. 작성.


"영국 유학? 지수 샘, 좀 사나 보다."


같이 일하던 음악학원 주임 선생님이 말했다. 아니 저 금수저 아니고요, 우선 어학연수 먼저 가서 생각할 거고, 거긴 석사가 1년 만에 끝나기도 하고 이게 엄청 사연이 긴데.. 속으로 해명했다. "철이 없어서 그렇죠 뭐"라는 대답으로 얼른 대화를 끝냈다. 그저 일을 그만두기 전 솔직한 이유를 말한 것뿐이었다. 먼저 유학 가있는 남자 친구에게 이야기하니 적응해야 한다고, 너보고 부자라잖아, 그냥 즐겨!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유럽에 가본 적이 있었다. 2009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이다. 그 무렵 추웠던 어느 날 아빠가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 이런저런 일정이 빼곡히 적혀있는 A4용지 몇 장을 바닥에 펼쳐놓고, "여름에 유럽 여행 가자!"라고 했던 게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평소 과묵한 아빠인데, 그때의 아빠는 무척 신나고 설레 보였다. 얼마 전 엄마랑 동생이랑 오랜만에 펼쳐 본 앨범의 사진들 속에서도 아빠의 표정이 제일 밝았다.


유럽이라니! 당시 행복한 마음을 나도 감출 순 없었지만 가족여행이라는게 무언가 아쉬웠다. 중학교 3학년 때 찾아온 사춘기가 아직 말썽이라 부모님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엄마와는 눈만 마주치면 다퉈 틀어져버린 사이를 좋게 풀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래, 이번에 가족들이랑 대충 갔다오고 대학생 되면 그땐 혼자 가야지. 생각하며 뾰로통한 표정으로 비행기에 올랐었다.


9박 10일 동안 6개국을 도는 일정이었다. 영국,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 일정이 빠듯하니만큼 각 나라의 주요 관광지만 돌고 이동해야 했다. "타워브리지 도착했습니다!" 찰칵, 이동, "에펠탑 도착했습니다!" 또 찰칵, 다시 이동. 열일곱이면 어느 정도 큰 나이였음에도 내게 남은 유럽의 인상은 이런 정신없었던 기억뿐이다. 아, 한 가지 또 기억나는 게 있다면 오스트리아에서 같은 패키지로 온 사람들과 맥주를 마시다 처음으로 진탕 취해본 것 정도.


당시엔 엄마 아빠도 해외 경험이 거의 전무했기 때문에 패키지를 선택한 거였지만, 속으로 연신 재미없어! 를 외쳐댔다. 10일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르게 짧게 느껴졌다. 10일이 이렇게 짧다면 훗날 한 달 여행을 한다고 해서 그렇게 길 것 같지 않았다. 그랬기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탑승할 때에는 속으로 다짐했다. 맛보기 여행은 끝났으니 난 유럽에서 꼭 살아보고 말 거라고.


그때부터 꿈꾼 것은 대학생 때 교환학생을 가는 거였다. 영어 말곤 잘하는 과목이 없었던 나는 영어영문학과를 꿈꿨고, 막연히 어딘가로 교환학생을 다녀와야지 생각했었다. 미국도 나쁘지 않고, 유럽으로 가면 그 주변 여행도 좀 더 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말이다. 꿈꾼 만큼 열심히 공부를 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나는 고3이 될 때까지 여전히 영어 말곤 잘하는 과목이 없었다.


수험생 시절에 엄마는 나에게 공부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더 이상 나와 싸우기 싫어서였을까? 나를 포기한 건가 싶어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엄마가 공부하라고만 안 하면 나 공부 잘할 수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쳤었는데, 뭔갈 보여줘서 증명해야 하는데! 잔소리가 줄어들수록 강해지는 의지와는 반대로 수능 날짜 디데이 또한 점점 줄어들었다. 나의 성적 또한 참 한결같이 그대로였다. 덕분에 전처럼 엄마와 눈만 마주치면 다투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관계가 회복되진 못했다.


공부는 의지가 아니라 습관으로 하는 거라던데, 그걸 몰랐던 열아홉의 나는 수능이 끝나고 재수를 결심했다. 그럴듯한 논리적인 이유를 대며 꼭 성공할 거라고 엄마를 설득하니 엄만 날 말리지 못하셨다. 보기 좋게 실패 후, 삼수를 해야겠다고 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딸을 말리는데 실패하는 실수를 엄마는 또 한 번 저지르셨다. 아빠는? 모르겠다. 나 모르게 한숨을 많이 쉬셨겠지. 이게 끝이 아니다. 삼수를 시작한 이후 서너 달간 방황하다 나는 갑자기 대뜸 음악을 하겠다고 말했다.


이 얼마나 한심한 철부지였는가. 친하게 지내던 작곡과 교회 언니의 작업실을 놀러 갔다 와서 갑자기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하는 딸을 엄마 아빠가 다시 한번 끝까지 말리지 못했던 이유는, 이미 딸이 충분히 구제불능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만 그런 딸이 무언갈 하고 싶다 말한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었다. 그렇게 음악을 시작하고 학교를 졸업하기까지 7년, 졸업 후 벌써 2년을 향하고 있다.


대학생이 되고, 집안 기둥을 몇 개 뽑은 과거를 만회하겠다고 나름 쓰리잡을 하며 용돈을 벌었다. 어느새 10년 전 교환학생의 꿈은 잊혀갔지만, 음악을 시작하니 교환학생보단 유학을 가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지냈다. 더 이상 부모님의 큰돈을 쓸 수는 없었기에 생각 그 이상으로 입에 담지는 않았다. 그저 매일 쓰는 다이어리에 유럽의 국기들을 그려 색칠하기도 하고, 가끔 열리는 유학박람회에 남몰래 다녀오곤 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영어를 잊어버리지 않으려 꾸준히 애썼다. 쓰리잡 중 하나였던 공연장 아르바이트를 오랫동안 하며 해외의 더 큰 공연장에서 일해보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대학생활이 끝날 무렵, 졸업연주 후에 가족들과 밥을 먹던 어느 날, 여전히 과묵한 아빠가 대뜸 말을 걸었다. 졸업하고 뭐할 거냐, 생각하며 살곤 있냐, 오랜만에 고리타분한 잔소리로 시작됐다. 그러곤 말하셨다. 독일은 학비가 거의 없다던데 클래식은 독일이 유명하지 않니. 어차피 음악 하곤 할 것도 없을 텐데 독일로 유학 가면 석사까진 어떻게든.. 네가 생활비만 아껴 쓰면.. 아빠는 말끝을 흐렸다. 금전적으론 부담이지만 오로지 나를 위한 말씀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음대에 와서 흔히 말하는 금수저를 참 많이 봤지만, 이 정도면 나도 중산층의 집안에서 좋은 부모님을 만나 부족함 없이 자랐다는 것을 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진짜 금수저가 되는 것만 같았다. 우리 집은 정말 그 정도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부담스러웠고, 사무치게 죄송했다. 그래서, "유학은 무슨 유학, 어떻게든 취업할 거야. 잘 준비하고 있어!"


말씀만이라도 감사했지만 차마 아빠에게 표현하지 못하고 곧 유아음악교육 회사에 취직했다. 뭔갈 엄청 열심히 준비해서 가게 된 회사는 아니었다. 그랬기에 아빠의 말이 내내 맴돌았다. 그때 그냥 유학 간다고 할걸. 한번 해보겠다고, 열심히 해보겠다고 할걸. 사실은 뛸 듯이 기뻤으면서. 하지만 더 이상 불효녀가 될 자신이 없었다. 그냥 평범하게 벌고 효도하자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일했다.


퇴사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한 달 반. 자리에서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던 어느 날 오전, 더 늦기 전에 퇴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시간 동안 고민한 후 결국 팀장님께 "저 유학 가게 됐어요!"라고 말씀드리고 그날로 짐 싸서 나왔다. 이럴 때 보면 난 참 충동적이다. 아빠와 다시 잘 이야기해 일사천리로 독일 유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클래식 작곡가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2020년 내내 곡을 쓰고 석사 준비를 위해 공모전에도 내봤다.


그러나 떨어지고, 또 떨어지고, 어느 콩쿨에는 아예 마감날까지 곡을 완성하지도 못했다. 다시 방황의 시작이었다. 학교 다닐 때와 다르게 혼자서 곡을 쓰려니 너무나도 외롭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곡을 쓰며 수도 없는 ‘현타’를 느낀 후 내가 독일 유학을 위해 현대음악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방황 중에 코로나가 터진 게 다행이었을까, 해외 공연장에서 일해보고 싶어 했던 내가 다시 떠올랐다. 관객들이 꽉 차있는 대공연장에서 공연 진행을 보조하며 희열을 느꼈던 것도 생각났다. 내가 직접 작곡하는 것보다 누군가의 작품을 선보이는 일에 보탬이 되는 것이 더 보람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공연 공부를 위한 예술경영으로 유학에 가려면, 독일보단 더 상업적인 영국으로 가는 편이 훨씬 좋았다. 그러나 영국은 모두가 알다시피 학비가 비싸다. 영국으로 가려면 또다시 불효녀가 되어야만 했다.


6개월 정도 지났을까. 어느덧 2021년이 됐다. 진로에 대한 걱정과 불안, 죄책감으로 잠시 공황장애와 우울증이 찾아오기도 했다. 부모님과 대화도 많이 하고, 엄마와 그간의 모든 갈등을 회복하기도 하며 차츰 나아질 무렵, 나는 우선 영국에 영어부터 공부하러 가게 됐다. 가서 대학원 진학에 필요한 영어시험 점수를 만들고, 진로 고민도 좀 더 하며 대학원 방향을 결정하기로 말이다. 또 진로가 바뀔지 모르니 너무 조급하게 생각하지도 말기로 했다. 6개월간 어학연수를 하면서 영국 대학원 진학이 간절해지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겠지.


이 모든 것을 그 주임 선생님에게 해명하고 싶었다. 이런 사정이 있었다고. 꼭 금수저여서 영국에 유학 가는 것은 아니라고. 내가 이걸 사람들에게 구구절절 해명하고 싶은 이유를 찾는 것은 아마 또 나를 우울 속으로 빠지게 하는 일일 것이다. 불효를 정당화하기 위한. 단지 12년 전 유럽 여행에서 돌아오며 결심했던 것, 그때부터 꿈꿔온 집념이 낳은 결과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싶다.


출국이 3주 남짓 남은 지금, 아빠는 큰딸 가는 영국에 엄마와 동생과 함께 여행할 계획을 짜고 계신다. 요즘은 내가 출국하기 전에 같이 여행 많이 다니자며 거의 한 달에 한 번씩 국내여행도 가고 있다. 아무래도 저축을 포기하신 게 분명하다. 가족들의 1월 영국행 비행기를 예매하며 아빠의 표정이 오랜만에 설레 보였다. 나중에 펼쳐 볼 영국 사진 앨범에서도 아빠의 표정이 아주 밝았으면,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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