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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지수 Oct 20. 2021

[라일락 대신 헤베꽃] 공감

라일락 대신 헤베꽃 - 3


공감 :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사람은 제각기 자라온 환경에 의해

개인의 성향과 인격이 형성된다.


"어쩌면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어쩌면 우리들 중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 "




2018년 10월, 3학년의 가을이었다. 중간과제곡을 막 제출하고 해방감을 느낄 때였다. '드디어 끝났다!'를 외쳤지만 중간곡의 퀄리티가 조금 아쉬웠다. 이미 지나가버린 마감에 미련을 버리고 다음 과제곡엔 후회없이 힘을 쏟고 싶었다. 하지만 기말곡 주제를 무엇으로 할지는 안중에도 없고, 아직 남은 중간고사가 성가시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음번엔 더 잘하겠다는 다짐은 다짐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기말곡마감 날짜가 다가오면 억지로 머리를 싸맬게 뻔했다. 어떤 하나의 대상에 영감이 떠올라 멋지게 곡을 쓰는 편은 아니기 때문이다. 작곡과의 학교생활을 생각했을 때의 이상과 현실은 달랐다. 영감이라는게 대체 뭔지 나도 경험해보고 싶었다. 나는 작곡과 입시를 남들보다 급히 준비했기 때문에 창의적이기 보다는 기계적인 곡쓰기에 익숙했다.


그러던 찰나였다. SNS를 통해 최근에 일어난 하나의 사건에 관한 글을 읽게됐다. 아마 지금까지도 꽤나 충격적으로 회자될만한 사건일 것이다. 서울시 강서구에 있는 한 PC방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다. 18년 10월 14일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내가 본 것은 그로부터 5일 후, 사망한 피해자를 담당했던 남궁인 의사가 쓴 글이었다. 글을 읽은 직후 나는 곧바로 이번 곡을 이 주제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곡의 주제를 그렇게 순간적으로 결정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사건의 정황은 그다지 복잡하지 않았다. PC방 손님이었던 가해자가 자리에 있던 쓰레기를 치워달라고 요구했다가 아르바이트생이었던 피해자와 말싸움이 붙은 것이다. 경찰이 왔다간 뒤 중재된 듯 보였지만 가해자는 자택에서 등산용 칼을 가져왔고 이후 피해자를 80차례 찔러 살해했다. 여기까지는 뉴스를 통해 이미 봤던 내용이었다. 분명 끔찍한 살인사건임에 분명했지만 온갖 상식적이지 못한 사건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내 뇌리에 크게 박혀 영향이 될만한 일까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남궁인 의사의 글을 보고 난 후엔 달랐다. 뉴스에서 다뤄질 수 없는 내용이 담겨있던 그 글에 따르면 구급대원에 의해 옮겨진 피해자를 발견한 의료진은 전부 자리에서 뛰쳐나갔다고 한다. 모든 상처는 몸이 아닌 얼굴과 목, 칼을 막기 위한 손이었다고. 적나라하게 글에 표현된 상처의 정도는 내가 다시 글로 적어내기 힘들만큼 상상 이상으로 끔찍하게 느껴졌다. 인간이 인간에게 그렇게 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든 상처는 형태를 파괴할 정도로 깊었다고 쓰여 있었다.


얼굴과 목의 출혈만으로 젊은 피해자가 죽어간 과정은 말도 안되게 참담했다. 하지만 남궁인 선생님의 글에서 중요한 내용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그는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응급의학과 의사이다. 사건의 피해자를 처음 접한 것도, 그로 인한 죽음을 처음 경험한 것도 결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글에서 '순간 세상이 두려웠다'고 표현한다. '악한 본성에 대항할 수 없는 무기력'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사건에 관심이 생기면서 뉴스를 찾아보고 또 찾아보았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도 해보고 사건에 대한 누리꾼들의 반응도 찾아보았다. 가해자가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과, 훤칠하고 잘생겼던 피해자에 비해 가해자는 그렇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런 이유로 자격지심이 있어 얼굴에만 상처를 입혔을 거라는 추측이 많았다. 일리있는 분석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가해자가 어떤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가 어떻든 범행 과정은 경악스러웠고 그 어떤 것으로도 죄질이 가볍게 여겨질 수 없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그로부터 1년 반쯤 전에 나는 <본성>이라는 주제로 곡마감을 한 적이 있었다. 인간의 이타심과 이기심에 관해 깊게 고찰해보려 애썼었다. 그런 주제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이 소재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살리고 싶었다. 가해자는 범행을 하는 순간 처벌에 대한 어떠한 두려움이나, 그 어떤 미래 따위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식에서 굉장히 벗어난 그런 범행 이전에, 상식에서 벗어난 그러한 마음을 품은 뒤 앞뒤 가리지 않고 행하는 범행을 누구도 막을 수는 없었다. 또한 가해자가 처벌을 받은 이후에도 이러한 일이 세상에 절대 일어나지 않는 사회는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일에 무력하다. 다시 말해, 삶 안에서의 모든 상황에 우린 무력하다. 지금 이 순간도 앞으로도 세계에 무력한 일들은 일어난다. 강서구 pc방 사건의 가해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 수 없다. 사건에 관심을 가질수록 나또한 세상이 더 무서워졌고 무력함을 느꼈다. 남궁인 선생님의 글에 느껴지는 무력감과 공포가 나에게도 고스란히 와닿았다. 이런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원인을 꼬리에 꼬리를 물어 찾아올라가기 시작했다. 곡의 주제는 정해졌고 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 주의 레슨날, 교수님께 내가 쓰고싶은 곡의 주제를 말씀드린 뒤 사건과 주제에 관해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의 가해자를 끊임없이 탓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피해자의 명복을 비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 이상의 생각을 곡에 표현하고 싶었다. 떠오르는 것은 많았지만 내가 하는 생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기 힘들었다. 피아노와 큰 타악기의 큰 음향을 통해 이 암담한 분위기를 곡의 시작점에 나타내고 싶었다. 이것이 영감이라면 영감이려나 생각하며 고민을 이어갔다. 


크고 무거운 음향을 나타낼 피아노와 다양한 음색을 낼 수 있는 타악기 몇가지를 정한 뒤, 곡의 나머지 악기 편성을 정해야 했다. 마침 과제곡이 금관악기와 인성을 포함해야 하는 편성이었다. 표현하고 싶은 가사를 읊조릴 수 있는 인성은 소프라노를 택했다. 한 시간 넘는 대화 끝에 교수님은 내가 사건과 모든 상황에 공감하려 애쓰고 있는것 같아 보인다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곡의 제목은 '공감'이 되었다. 중구난방이었던 생각도 점차 모아질 수 있었다. 


세상에 일어나는 대부분의 상황들은 사람이 만들어가고, 지구에 존재하는, 혹은 존재했던 사람은 각기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만들어낸 상황들이 세상을 만들었다. 생각의 끝은 이러했다. 모든 사람은 각자의 환경에 따라 성향이 생겨난다. 어쩌면 누구의 잘못도 아닐 것이다. 곧 소프라노를 위한 가사도 만들어졌다. 

"어쩌면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그들 중 누구도, 어쩌면 우리들 중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


기말곡마감을 끝내고 2019년 봄에 교내 정기연주를 통해 곡을 연주할 수 있었다. 당시 연주자들과는 차마 곡의 탄생 배경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지휘자까지 총 6명인 그들에게 나의 의도를 얘기하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기 때문이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환경을 운운하며 가해자의 범행을 미화하고 싶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사건으로부터 생각이 시작됐고 그 생각은 나의 곡이 되었지만,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용은 가해자의 입장에서 끔찍한 범행의 합리화라기 보다는, 그로부터 느낄 수 있는 세상을 향한 시각이었다. 단지 그 사건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연주자들에게 이러한 내 마음이 전달될지 확신이 없었다. 범죄자를 공감한다고 오해해 연주하는데 거부감을 느껴하진 않을까 걱정도 했다. 하지만 연주 이후 많은 사람들과 이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뒤, 이제는 이렇게 글로 풀어내보고 싶어졌다. 어떤 크고 작은 일들도, 시작의 배경이 어땠는지 생각해보면 상황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애써야 한다고 강요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상황을 헤아리기 위해, 때로는 좀 더 나은 판단을 하기 위해 공감은 꼭 필요한 요건일 것이다. 그것을 큰 그림으로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우리 모두가 좀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 말이다.



1.

https://m.blog.naver.com/xinsiders/221380743713


2. 2019년 5월 교내 정기연주회 영상 <공감: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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