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8월 초의 금요일 밤이었다.
눈을 뜨자 창밖으로 네온사인이 번져 들어왔다.
아직 꿈과 현실의 경계가 흐릿했다.
왼쪽 손목을 들어 시계를 봤다.
메탈 시계의 빛이 어두운 방 안에서 반짝거렸다.
9시 40분.
이 시간에 깨어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내 몸속에는 보이지 않는 알람 같은 게 있는 모양이다. 잠은 깊게 잘 수 있지만,
한 번 깨면 다시 잠들기 어렵다.
몸의 감각이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끝없이 생각이 밀려와.
뚜렷해질수록 머릿속을
태우는듯한 고통이 점점 심해져 간다.
잊고자 생각하면 고무줄 반동처럼 더욱 괴로워졌다. 이럴 땐 인위적으로 생각을 비워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급히 냉장고를 열어
술을 꺼내 마시고 테이블 위에
약을 입안에 통과시켰다.
오랫동안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을 조금씩 새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죽을 정신력조차 없는 것이 너무나도 한스러웠다.
정신이 조금 안정되기 시작한 무렵.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후드티와
헐렁한 운동복 바지를 입고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없었자.
그저 거리를 방황하며 무언가를 찾아 나섰다.
신선한 바람이 위로하듯 얼굴을 스쳐 지나간다.
거리에는 나와 똑같은 걸음걸이에도
의미가 담겨 있는 사람들이 잔뜩 있었다.
회사에서 퇴근하는 사람과,
친구들과 사이좋게 장난치며 돌아가는 학생,
사랑하는 이를 만나 뛰어가는 연인의 모습을 보아하니,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단스럽게 스스로가 초라해질수록
마음이 가벼워졌고
무엇에도 기대하지 않게 되는 것에 안정감이 느껴졌다. 저 사람들 중 한 명이라도
내게 말을 걸어준다면
내 인생은 조금이라도 달라 질까?
하지만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애석하게도.
걷다 보니 어느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홍대역 2번 출구.
어째서인지 항상 걷다 보면 이곳에 도착하게 된다.
시티즌 시계의 시간은 10시 3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걸어서 25분 안에 도착할 거리를 1시간을 걸어왔다.
무엇이 내 발걸음을 그렇게 무겁게 만들었을까.
생각을 돌이켜보지만
약 기운에 머리가 아프기 시작해 그만두기로 했다.
잠시 쉬기 위해 역의 간판을 등지고
사람들을 관찰했다.
혹여나 있을까 기대하며
그녀를 찾아보았지만
어디를 찾아봐도 나타나지 않았다.
내 눈을 피해 가는 좋은 여자.
우연 같은 건 이제 기다릴 수 없게 되었다.
역의 개찰구 사이로 사람들은 교차하며 움직였고,
나는 멈춰있었다.
그 모습을 보다 보니 무언가 의문이 풀리는 듯했다.
그들과 나의 발걸음이 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움직였고,
나는 태엽 풀린 시계처럼 조금씩 움직이고 멈췄다.
사람들이 삶의 원동력을 얻어 움직일 때,
나는 과거에서
그녀가 언제까지나 가지 말라며 붙잡아 두고 있었다. 떠난 후에도 넌 날 괴롭히는구나.
이제 그만 날 놔줘.
널 두고 난 나아갈 거야.
그들과 똑같이 무언가를 희망하며 살 거야.
너 탓에 늦춰진 시차를 맞추고야 말 거야.
그러니 부디 내 안에서 떠나줘.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급히 주머니 속에 있는 약 봉투를 꺼냈다.
물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주변에 마트나 편의점에 들러 사 올까 고민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릿속을 후벼 파는 고통의 존재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고통을 견뎌낼 수 없었던 나는
거침 호흡을 내뿜으며 알약을 입안에 쑤셔 넣었다.
꺼져. 내 머릿속에서 나가.
알약이 목에 걸려 호흡이 쉬어지지 않았다.
생존 본능에 코로 숨을 내쉬며
조금씩 목에 침을 넘겼다. 목을 적실 때마다 온전히 알약의 모양이 느껴져 목을 쑤시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산소의 공급이 부족해
약기운이 더욱 강해지기 시작했다.
섭취한 술과 약들이
조금씩 역류하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흐느적거리며 역의 골목에서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날 이후론 꼴사나운 짓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의 내 모습은 누구보다 추하고 꼴사나웠다.
누군가가 죽어가는 것도 모른 체
사람들은 골목을 지나쳐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고통이 점점 옅어지고
의식이 꿈처럼 흐릿해졌다.
몽환적인 느낌에 의외의 안정감이 느껴졌다.
이대로 조용히 죽어 간다면 그건 그것대로 괜찮겠지. 생각하지 않아도, 존재하지 않아도 돼.
너를 완전히 떠날 수 있어.
전혀 고통스럽지 않아.
최고의 찬스잖아.
나는 운명을 받아들이듯이
숨을 참아 호흡을 멈추곤
골목의 벽에 내려앉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