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에 띄어진 한 척의 돛단배
역시 여름을 빛내주는 것은 배롱나무꽃이다. 밋밋한 여름 풍경 속에서 배롱나무꽃의 붉디붉은 빛은 확연히 도드라져 보인다. 화려한 봄꽃의 향연과 울긋불긋 타오르는 만엽홍산(萬葉紅山) 가을 단풍을 이어주는 고마운 꽃이다. 하루 이틀 남몰래 피었다 지는 것도 아니고 목백일홍이란 이름처럼 무려 백일 동안이나 피어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주니 얼마나 대견한가.
배롱나무꽃을 보러 굳이 멀리 갈 필요는 없다. 명옥헌 원림 같은 이름난 명소는 아닐지라도 가까이에도 좋은 곳들이 많기 때문이다. 낙동강을 따라 난 좁다란 흙길로 병산서원을 찾아가는 길은 언제나 묘한 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불편하긴 하지만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는 길이다. 마주 오는 차를 만나면 잠시 멈춰 비켜 주어야 한다. 뽀얗게 피어오르는 먼지가 마땅찮을 때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옛 모습 그대로의 길이 소중하게 느껴진다.
처음 병산서원을 찾았을 때 생각이 난다. 해마다 수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인 병산서원 가는 길이 고작 이 정도라니.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이 맞나 의구심이 들었다. 차 두 대가 겨우 비켜갈 정도였고 바닥은 울퉁불퉁했다. 차는 내내 덜컹거렸고, 동행했던 지인들은 내내 미심쩍은 눈빛이었다. 좁고 제대로 포장도 하지 않은 이 길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땐 하루빨리 손을 좀 보라고 건의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었는데 몇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옛 모습 그대로 있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눈 아래 시원스레 펼쳐져 있는 낙동강 물줄기를 옆에 거느리고 수백 년 전으로 되돌아가는 듯 착각마저 드는 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가면 유서 깊은 병산서원과 마주하게 된다. 붉게 피어난 배롱나무꽃이 병산서원 구석구석을 환히 비쳐주는 느낌이다. 모든 것이 여전하다. 만대루는 병산을 병풍으로 삼아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고,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만대루를 대신해 입교당 마루가 사람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병산서원의 원래 이름은 풍악서당이었다. 고려 말 풍산 유씨 가문의 사학이었는데 풍산현에 있던 것을 조선 선조 5년에 서애 유성룡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이후 광해군 때 지방의 유림들이 유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위패를 모셨고, 철종 14년에는 ‘병산(屛山)’이라는 편액(扁額)을 하사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유림을 배출했으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서원 중 한 곳이다. 덕분에 2019년 7월에는 병산서원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영주 소수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 등과 함께 아홉 곳의 서원(書院)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世界文化遺産)으로 등재되었다.
규모가 그리 크지는 않다. 천천히 거닐며 둘러보는 데 몇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그러나 병산서원이 지닌 그 멋스러움을 제대로 즐기려면 여유롭게 몇 시간 이상 머물러 보기를 권한다. 잘 정돈된 구석구석마다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는 보물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계절의 순환 속에 각기 다른 모습을 보여주지만, 그 깊은 속내는 변함이 없다.
병산서원의 보물들을 제대로 살펴보려면 먼저 서원의 기본적인 구조와 공간 구성 형태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통상 서원은 배움을 갈고 닦는 강학(講學)공간과 뛰어난 유학자를 기리는 제향(祭享)영역으로 공간을 양분한다. 학자에 따라서는 선비들이 자연을 벗하며 머리를 식히거나 호연지기를 키우던 정원이나 누대를 유식(遊息)공간이라 하여 별도로 구분하기도 한다. 도학에 뛰어난 학자를 추모하고 그 가르침이 지역에 널리 확산되도록 했던 조선 초기 유학자들의 바람이 서원 건축을 통해 구현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서원은 우리나라 유교 문화의 중심이자 학문을 대하는 선비들의 마음가짐을 되새겨 볼 수 있는 공간이다. 선현을 모시고 그들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을 인재를 키우는 교육기관이기도 하다. 선현을 향한 흠모의 정은 사당을 짓고 제향하는 행위를 통해 발현(發現)되었고, 선현의 학문을 따라 배우려는 정신은 강당과 재에서 구현되었다. 웅장한 규모와 화려한 장식을 자랑하는 궁궐 건축과 달리 서원은 소박하고 검소하며 고졸(古拙)한 것이 특징이다.
전국의 여러 서원들을 다니다 보니 차이점이 눈에 띄기도 한다. 안동의 병산서원과 도산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대구 달성의 도동서원 등 대체로 경상도 지역의 서원들이 계단식 배치로 엄정한 위계질서를 드러낸 것에 비해 장성 필암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의 돈암서원과 같이 전라도나 충청도의 서원은 평지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경우가 많아서 평면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 또한 각각의 건물들이 놓일 입지의 특성을 고려한 것일 뿐 영주 소수서원이나 경주 옥산서원이 놓인 자리 또한 평탄한 것을 보면 단순히 지역을 구분지어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있다.
배롱나무를 양 옆으로 거느리고 복례문을 들어서면 본격적인 병산서원의 영역이다. 서원에는 외부와의 경계를 짓는 정문인 외삼문과, 선현을 모셔 놓은 사당에 삿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도록 내삼문을 두었다. 서원의 정문이 삼문(三門)인 것에 비해 병산서원의 복례문은 가운데 칸만 판문(板門)이고, 좌우로는 담장과 구분되게 벽채를 한 칸씩 두어 이채롭다. ‘복례(復禮)’라는 이름은 논어의 ‘극기복례위인(克己復禮爲仁)’이란 경구에서 유래하였는데 ‘자기를 낮추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곧 인(仁)이다’는 유학의 자기절제의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원래는 만대루 동편에 있던 것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놓은 것인데 서원 앞에 병풍처럼 펼쳐져 있는 병산의 험한 형세를 피하고자 했던 풍수(風水) 원리가 담겨있다고 한다.
만대루 아래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강학 공간인 입교당과 동재, 서재가 정연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입교당(立敎堂)은 서원의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강당이다. 원래의 명칭은 숭교당(崇敎堂)이었고, 명륜당이라고도 했다.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의미로 서원의 한 가운데에 있다. 강학당을 중심으로 동쪽의 명성재(明誠齋)와 서쪽의 경의재(敬義齋)로 나뉜다. 양쪽 방에는 온돌을 놓았고 강학당은 세 칸의 대청으로 터놓았다. 툇마루를 둔 명성재에는 원장이 기거했으며, 경의재는 서원의 업무를 보는 곳이었다. 입교당과 만대루 사이의 마당을 가운데로 하고 동재와 서재가 대칭 형태로 마주보고 있다. 유생들의 기숙사였던 두 건물은 좌고우저(左高右低)의 원리에 따라 동재에는 상급생들이, 서재에는 하급생들이 기거하였다.
강당인 입교당 뒤에는 장판각이 왼쪽으로 비켜서 있다. 책을 인쇄(印刷)할 때 쓰이는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던 곳인데, 습기를 피하기 위해 정면에 모두 판문을 달았다. 화재에 대비하기 위해 다른 건물과 거리를 두어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였다. 서원의 명성을 좌우하는 주요 기준 가운데 하나가 판본(板本)의 소장량이라 여겨졌으니 서원의 소중한 재산이었다.
서원의 가장 높은 자리는 역시 사당의 몫이다. 병산서원의 사당인 존덕사(尊德祠)는 서애 류성룡을 주향(主享)하고, 서애의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을 배향(配享)하고 있다. 사당에 올릴 제물을 준비하는 역할을 하는 전사청을 부속 건물로 해 한 울타리 안에 두는 것이 보통인데 이곳 병산서원은 각각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하여 사당 오른편에 따로 배치하였다. 서원들을 둘러볼 때 비교해서 눈여겨볼 만한 대목이다.
만대루와 복례문 사이에 물길을 끌어들여 만든 광영지(光影池)는 병산서원의 숨겨진 보물이라 할 만 하다. 지금은 흙으로 메워져 형태만 남아 옛 모양을 짐작케 한다. 여느 조선시대 정원과 마찬가지로 ‘천원지방(天圓地方)’ 형태의 연못으로 조성했다. 우리나라 전통 연못의 조성 원리로 조상들의 우주관(宇宙觀)이 상징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땅을 의미하는 네모진 연못 가운데, 하늘을 상징하는 둥근 섬을 두었다.
서원에 이렇듯 연못을 조성한 사례는 많지 않지만 함양에 있는 남계서원에는 동재와 서재 앞마당에 두 개의 연못을 두어 해마다 여름이면 수련(垂蓮)이 예쁘게 피어난다. 더러운 진흙 속에서 연꽃이 고결함을 뽐내며 소담스레 피어나듯 우리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맑고 향기로운 본성이 발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서원을 거닐며 우리가 보아야 할 것은 건축물과 풍경 너머에 숨은 넓고 깊은 사색(思索)의 세계가 아닐까.
광영지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자연과 벗하며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한 유식공간(遊息空間)이자 ‘서원 속의 정원’이다. 한참을 앉아 바라보고 있노라면 연못에 떨어진 배롱나무 꽃송이들이 천체의 운행을 따라 둥글게 소용돌이친다. 병산서원을 찾을 때면 언제나 이 연못 앞에서 한참을 머물게 된다. 흙으로 메워지기 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지 각자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며, 그 오래 전 선비의 마음이 되어 걸어보는 것도 좋겠다.
달팽이 뒷간도 빼놓지 말아야 할 볼거리다. 재미난 이름을 가진 이 건물은 서원 담장 밖에 있는 화장실인데 담장이 시작되는 부분이 끝 부분에 가리도록 둥글게 감아 세워 놓은 모양이 달팽이를 닮았다 해서 그리 불린다. 따로 출입문을 달아 놓지 않아도 안의 사람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배려한 구조이다. 가까이 다가가 체험해 보고픈 마음이 생기게끔 흥미로운 스토리를 만들어 본다면 병산서원 관람의 묘미가 또 하나 생기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여러 볼거리를 곳곳에 숨겨 놓은 병산서원이라지만, 역시 그 중에 제일은 만대루라 하겠다. 만대루에 올라 굽이쳐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보는 느낌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직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만대루에 오르면 눈앞에 펼쳐진 낙동강이 손에 닿을 듯 더욱 가까워진다. 그 순간 만대루는 낙동강에 띄워진 한 척의 돛단배에 다름 아니다. 마치 시간이 멈춰 서 있는 듯한 느낌. 복잡다단하게 흘러가는 세상일엔 전혀 무관심한 듯 자연의 일부가 되는 듯한 기분은 병산서원이 주는 선물이기도 하다.
만대루는 복례문과 입교당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우리나라 서원의 누각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한다. 동서 간 길이가 20m이며 1층은 기둥만 세우고 2층 누각은 창호와 벽이 없이 완전하게 개방된 형태이다. 만대(晩對)라는 이름은 당나라 두보의 시 백제성루의 ‘푸른 절벽은 오후 늦게 대할만 하니’라는 취병의만대(翠屛宜晩對)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시구(詩句)처럼 늦은 오후의 따사로운 빛이 비치는 만대루가 역시 제격이다.
만대루에는 여전히 출입금지 안내판이 올려져 있다. 넓은 누마루에 앉아 낙동강의 도도한 흐름 속에 시간을 낚았던 옛 사람의 호사를 더는 누릴 수 없음이 안타깝다. 이제는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만대루를 바라보며 소중한 무언가를 빼앗겨 버린 상실감에 잠긴다.
만대루에 올라 번잡한 세상을 잊고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는 없게 되었지만 당분간은 멀찍이서 만대루 자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목조 건물에는 사람의 온기가 더해져야만 그 생명이 오래가는 법이라고 하는데 언제부터 만대루는 그저 눈으로만 감상해야 하는 박물관 속 유물처럼 변해버린 느낌이다. 언제쯤 만대루에 다시 오를 수 있을지 매번 조바심이 난다.
세월은 무심하게 흐르고, 그 세월을 따라 사람들은 변하겠지만 언제든 이곳은 예전처럼 우리를 반겨줄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사람들이 불편을 마다않고 흙먼지 날리는 시골길을 달려서까지 병산서원을 찾는 이유는 늘 변함없는 편안함으로 우리를 맞이해 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에, 꿋꿋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소나무 같은 존재가 하나쯤 있어줘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