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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뫼여울 Feb 19. 2023

갑사

남매탑 이야기를 따라 거닐어보는 갑사 가는 길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명산 중 하나로 손꼽히는 계룡산. 계룡산은 통일신라 때엔 오악 중 서악(西嶽)으로, 고려시대에는 묘향산[上嶽], 지리산[下嶽]과 함께 삼악으로 일컬었다. 주봉인 천황봉에서 연천봉, 삼불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마치 닭 볏을 쓴 용을 닮았다 하여 계룡산(鷄龍山)으로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새로운 도읍으로 손꼽히기도 했고 『정감록』에는 피난지의 하나로 적혀 있는데 이를 믿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수많은 신흥종교, 또는 유사종교의 성지가 되기도 했던 사연 많은 산이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를 통해 갑사를 처음 만났다. <갑사로 가는 길>이라는 이성보의 수필(隨筆)에 남매탑 이야기가 나온다. 대학 1학년 때 친구들과 배낭을 짊어지고 떠났던 계룡산 산행길에서 처음 남매탑을 만났었다. 첫인상은 무거운 엄숙(嚴肅)함과 결연한 냉정함이었다. 5층과 7층 높이로 우람하게 솟아있는 탑은 남매의 굳은 의지를 드러내는 듯 보였다.  

남매탑 이야기는 대략 이러하다. 목에 걸려있던 뼈를 뽑아준 덕분에 목숨을 구한 호랑이 한 마리가 계룡산에서 수도하던 상원 스님에게 보답으로 상주에 있는 처녀를 물어다 주었다. 눈이 많이 와서 봄까지 처녀를 보호했던 스님이 처녀를 집에 데려다 주려고 하자 처녀는 스님께 결혼해 줄 것을 청했다. 결국 둘은 남매의 인연을 맺기로 하고 함께 정진하여 열반(涅槃)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인간의 타고난 욕망을 뛰어넘어 절대적인 깨달음의 경지(境地)에 오른 두 스님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 남매탑인 것이다.

 “눈은 그칠 줄 모르고, 탑에 얽힌 남매의 지순(至純)한 사랑도 끝이 없어, 탑신에 손을 얹으니 천 년 뒤에 오히려 뜨거운 열기가 스며드는구나! 얼음장같이 차야만 했던 대덕의 부동심과, 백설인 양 순결한 처자의 발원력, … 지나는 등산객의 심금을 붙잡으니, 나도 여기 며칠 동안이라도 머무르고 싶다.”
 
피 끓는 청춘의 속된 마음으로는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었던 지순(至純)한 사랑 이야기를 따라 불혹(不惑)의 나이가 되어 계룡산을 다시 찾았다. 이번은 갑사를 찾아가는 여행이다. 실제로 본 갑사는 그간 마음속으로 그려왔던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단풍이 곱게 물든 갑사의 가을이 계룡팔경의 하나로 불릴 만큼 절경(絶景)이라지만 갑사 오르는 길에서 만나는 초여름의 신록(新祿) 또한 동학사 계곡의 그것에 뒤질 것이 없어 보였다.

생각보다는 큰 절이었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계룡산 갑사 현판이 걸린 일주문을 지나면 멋진 풍경들이 반겨준다. 수백 년 넘게 나이를 먹은 고목들이 넉넉한 품으로 하늘을 가려 풍성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군데군데 껍질이 벗겨진 나무를 따라 담쟁이가 짝을 이뤄 하늘로 내달리고 있다. 피곤에 찌든 두 눈이 아주 호강을 하는 느낌이다.

부처님 오신 날을 한참 지났지만 여전히 갑사 구석구석에는 연등이 가득하다. 알록달록한 연등의 다양한 색이 온통 푸른빛으로 가득한 산과 계곡의 모습 속에서 도드라져 보인다. 이 등을 만들고 내 걸고, 또 내리는 일련의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을까를 생각해보게 된다.

기록에 의하면 갑사는 백제 구이신왕 1년(420)에 고구려에서 건너 온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이라 한다. 삼국통일 이후에는 의상대사가 이곳을 화엄도량으로 삼아 신라 화엄십찰의 하나가 되었는데 이후 계룡갑사로 불리던 이름을 갑사로 개칭했지만 여전히 계룡갑사라는 현판이 붙어 있기는 하다.

임진왜란 때는 서산대사 휴정의 제자로 갑사에서 주석하고 있던 영규대사가 승려 칠백 명을 엄선해 청주지역의 승려들을 합세해 고경명의 관군, 조헌의 의병과 함께 금산에서 왜적과 맞서 싸우다 끝내 전사했다. 이때 최후의 일인까지 싸운 덕분에 왜군의 호남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갑사에 표충원을 세워 휴정, 유정, 영규대사의 영정(影幀)을 모셔놓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승병을 일으킨 것은 영규대사가 최초였고 이후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승병이 호국 대열에 합류했다고 한다.

갑사에는 국보가 하나, 보물이 다섯 점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가 여덟 점에 이를 정도로 다양한 불교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국보 제298호인 삼신불 괘불탱화는 길이 12.47미터 폭 9.48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괘불화로 17세기를 대표할 만한 수작(秀作)으로 손꼽힌다.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철 당간지주, 『월인석보』를 새겨 책으로 찍어내던 월인석보 판목, 부도와 동종 등 갑사의 보물들도 놓치지 말고 마음에 담아보는 것이 좋겠다.

대웅전 넓은 마당을 가득 채우고 있는 연등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대웅전을 지나 삼성각으로 가는 길에서 만난 풍경이 화사하다. 경계를 삼은 담장을 따라 심어놓은 붉은 연산홍이 만개해 마치 붉은색 물감을 흘려놓은 듯하다.

갑사의 중심 전각인 대웅전은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짜리 맞배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세 칸은 양 끝의 두 칸보다 공간을 넓게 잡아 공포를 두 개씩 넣은 것이 특징이다. 대웅전이 놓인 자리는 돌로 축대를 쌓아 올려 아래에서 바라보면 사뭇 위엄이 느껴진다. 좌측과 우측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계단을 냈다. 정유재란 때 불탔던 것을 선조 37년(1604)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스님들의 수행공간으로 들어가는 곳에 돌을 쌓아올려 만든 문의 모습이 독특하다. 담쟁이들이 하루가 다르게 세력을 넓혀가면서 여름이 한층 깊어갈 것이요 저 무수한 담쟁이들이 다시 그 잎을 떨어뜨리고 다시 땅으로 돌아갈 즈음이면 겨울이 찾아올 것이다.

담장을 찍고 있는 사이 우연히 스님의 뒷모습이 카메라에 잡혔다. 이런 수행 공간에서는 작은 카메라 셔터 소리마저 조심스럽다. 불경(不敬)스런 일을 저지른 것이나 한 것처럼 심장이 유난스럽게 요동친다.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는 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마음으로 합장(合掌)을 올려 본다.

대웅전을 지나 작은 개울을 지나면 대적전을 만나게 된다. 원래 이 대적전은 화엄고찰의 하나로 명성을 떨치던 갑사의 중심전각이었는데 지금은 본당에서 한참 떨어진 자리에 작은 규모로 복원해 놓았다.

대웅전에서 몇 걸음 떨어져 있지도 않은데 이곳까지 찾아오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덕분에 오롯이 내 것인 양 한가로이 거닐 수 있어 좋다. 무슨 일로 왔는지 물어보는 이도 없고, 얼른 가자며 재촉하는 이도 없다. 그 이름처럼 고요하고 적막(寂寞)하기 이를 데 없다. 고독한 구도(求道)의 공간으로 제격이다. 대적전 마당에 심은 배롱나무가 붉은 꽃을 활짝 피울 때면 대적전의 분위기도 좀 화사해지지 않을까. 한여름 날의 이곳 풍경을 혼자 상상해 보니 외로움이 조금 가시는 느낌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약사여래입상에 간절한 기도를 드리고 갑사를 내려왔다. 중생들을 모든 병고(病苦)에서 구해주고, 무명의 고질(痼疾)까지도 치유하여 깨달음으로 인도해준다는 약사여래 부처님. 그저 바라고 기도한다고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니 현세(現世)에서 더욱 선(善)하게 살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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