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답사 일번지
유홍준 교수는 이십년 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시작하면서 남도답사 일번지로 전남 강진과 해남을 소개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다음 이야기를 통해 전북 부안을 두고 많은 고민을 했음을 고백하고 있지만 내가 직접 가 봤던 느낌으로도 강진과 해남이 그 영광의 주인공이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사실 강진과 해남이라는 땅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주역이었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기로는 조선시대 유배지(流配地) 중 한 곳으로 이름을 남기긴 했지만 수천여년 민족사의 영광스런 중심에 서지 못하고 그저 변방(邊方)에 불과했던 곳이었다. 다른 한편으론 그 덕분에 지금껏 자연 그대로의 멋이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사십 여년을 살아왔던 경상도 땅의 산과 들에서 느껴지는 감흥과 전라도의 그것은 분명 다르다. 확연한 차이를 누구나 초행길에서 생생히 경험할 수 있다. 경상도 내륙 지형이 뭔가 고집스럽고 기개가 느껴지는 대신 우악스러운 느낌도 있는 반면, 남도 땅에서는 어린 시절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편안함과 따뜻함이 느껴져서 좋다.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갈 때마다 그 따뜻한 느낌에 마음을 온통 빼앗기곤 한다. 좀 더 오래 머물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지만 늘 생활이 그 간절한 소망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이 그리움으로 남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 애틋한 그리움을 제대로 풀어 보려면 나이 들어서는 남도 땅의 자연을 벗하며 사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출간된 지 한참이나 지난 책을 펴들고 있으니 복잡미묘한 생각이 든다. 그때 그 시절, 그러니까 학교를 휴학하고 군 입대를 앞두고 있을 그 무렵에 난 무엇을 하고 있었기에 이 좋은 책을 읽어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두려움은 있었겠지만 무작정 광주행 버스를 타고 떠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가 드는 게 사실이다.
그래도 사진을 취미로 하면서 혼자 떠나는 여행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최근에 남도의 여러 곳을 직접 돌아다녔던 기억과 감흥이 아직도 남아서 이 책을 읽는 내내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는 것에 또 위안을 삼기도 한다. 특히나 좋은 느낌으로 남아 있는 백련사나 개심사, 소쇄원 편을 읽을 때면 마치 그때로 되돌아 가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곤 했다.
이 책을 통해서 원림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감사하다. 지금껏 정원이라는 표현에 익숙해 왔었는데 소쇄원 편을 통해 원림과 정원의 미묘한 차이를 알게 됐고, 동산과 숲의 자연 상태를 그대로 조경으로 삼으면서 집칸과 정자를 배치한 우리 조상들의 뛰어나고도 멋진 공간 인식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소쇄원과 명옥헌은 원림의 멋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곳들이 아닌가 싶다.
소개된 모든 곳들이 좋은 곳이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개심사를 다시 꼭 찾고 싶은 곳으로 꼽는다. 유홍준 교수도 청도 운문사, 영주 부석사와 더불어 서산 개심사를 가장 아름다운 절집으로 꼽았지만 나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봄 큰 기대 없이 개심사를 찾았던 날의 그 감동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비록 크진 않지만 자연 그대로의, 절다운 절이 바로 개심사가 아닐까.
비록 이십년이나 지나 느지막이 읽어보게 됐지만 더 늦지 않게 볼 수 있게 되었음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려 한다. 앞으로도 시간이 날 때마다 보고 또 보게 될 것 같다. 아쉬움이 있다면 책에 담겨진 이십 여 년 전 남도의 풍경이 이제는 모두 사라져 버린 게 아닐까 하는 안타까움, 바로 그것이다. 그 어떤 것도 무심한 세월보다 야속한 건 없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