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다른 태국] 시민의 탄생

방콕 | 14

by 강라마

태국 혁명의 그림자

탐마삿대학교의 돔은 늘 같은 자리에 서 있다.
강바람이 불어와도, 계절이 바뀌어도, 그 형태는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돔이 지켜본 사람들의 삶은—끝내 같은 자리에 머물지 못했다.

태국 민주주의의 시작으로 불리는 1932년 시암 혁명.
그날 이후, 국가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지만 혁명을 만들었던 사람들의 삶은 하나같이 멀리 흩어졌다.

이 이야기는 그 시작과, 그리고 조용히 흩어져 간 끝에 대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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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당이 장악한 아난다 사만콤 궁전(좌), 시암혁명 성공에 기뻐하는 시민들(우) | 출처: 위키피디아

라마 7세: 떠난 왕

라마 7세는 준비된 개혁가라기보다 어쩌면 가장 곤란한 시기에 왕이 된 사람에 가까웠다.

그는 라마 6세 시기의 과도한 재정 지출과 세계 대공황의 여파가 겹친 위태로운 국가를 물려받았다.

절대왕정의 구조는 이미 흔들리고 있었고,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변화의 속도와 방향은 왕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고 있었다.

1932년, 입헌군주제가 선포된 뒤 라마 7세는 왕으로 남았지만 정치는 점점 왕실의 손을 떠났다.

결국 그는 "권력을 특정 집단이 아닌, 모든 국민에게 주겠다"는 말을 남기고 1935년 퇴위를 선택했다.

그는 영국으로 떠나, 누구의 조문도 받지 말라는 쓸쓸한 유언을 남긴 채 생을 마감한다.

혁명은 성공했지만, 왕은 나라에 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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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7세 | 출처: 위키피디아

파혼: 혁명을 ‘운영’한 사람

프라야 파혼은 1932년 이후의 혼란을 정리한 실무자였다.

그는 뜨거운 이념보다 차가운 안정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혁명을 제도로 굳히는 데 필요한 현실적인 판단을 반복해 내렸다.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에서 파혼이 없었다면 혁명은 내전으로 번져 훨씬 더 빠르게 무너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권력의 정점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총리직을 내려놓은 뒤, 혁명의 초반을 책임졌던 이 인물은 정계와 거리를 둔 채 조용히 세상을 떠난다.

망명은 하지 않았으되, 잊혀짐이라는 또 다른 유배를 당한 셈이다.

국가는 굴러가기 시작했지만, 그를 기억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다.

2025-11-15-001-01.jpg 프라야 파혼 | 출처: pridi.or.th

프리디: 헌법을 꿈꾼 사람

프리디 파놈용은 1932년 혁명의 사상적 중심에 있던 인물이었다.

헌법, 시민, 교육. 그가 바라본 민주주의는 권력을 쥐는 문제가 아니라 사람을 키우는 문제에 가까웠다.

탐마삿대학교는 그 생각이 가장 또렷하게 남아 있는 공간이다.

배움이 곧 시민이 되는 길이라는 믿음, 그 믿음 위에 세워진 대학.

하지만 프리디의 길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정치적 모략과 국왕 시해 사건(라마 8세)의 배후라는 억울한 누명 속에서 그는 점점 고립되었고, 결국 태국을 떠나 중국을 거쳐 프랑스로 향한다.

그 긴 망명의 시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파리에서 생을 마감한다.

헌법을 설계한 사람은 그 헌법 아래에서 끝까지 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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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디 파놈용 |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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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마삿 대학교 | 2025.12 | Thailand_Bangkok | Copyright © llama.foto

피분: 강한 국가의 얼굴

피분 송크람은 혁명 이후의 태국을 가장 ‘눈에 보이게’ 바꾼 인물이다.

국가주의, 근대화, 그리고 ‘태국(Thailand)’이라는 새로운 국호.

그의 시대에 태국은 하나의 강력한 국가로 정렬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질서는 점점 군사적이고 배타적인 독재의 방향으로 흘렀고, 전쟁과 정치의 격랑 속에서 그 역시 부하의 쿠데타로 자리를 잃는다.

말년의 피분은 자신이 그토록 근대화를 꿈꿨던 조국이 아닌, 일본에서 생을 마감한다.

‘강한 태국’을 외쳤던 인물의 마지막은 아이러니하게도 타국의 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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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랙 피분송크람 | 출처: 위키피디아

푸어이: 남겨진 질문

푸어이 웅팍껀은 1932년을 직접 만든 세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 혁명이 남긴 질문을 가장 성실하게, 그리고 양심적으로 떠안은 사람이었다.

그는 대일 항전의 투사였고, 청렴한 경제학자였으며, 무엇보다 탐마삿대학교의 총장이었다.

권력보다 윤리를 중시했던 그는 부패한 정권의 눈엣가시였다.

1976년 10월 6일, 탐마삿에서 벌어진 참혹한 학살 이후 그는 더 이상 이 나라에 머물 수 없었다.

영국으로 떠난 푸어이는 망명 생활 중에도 1987년 이후 몇 차례 잠시 고국을 방문했다.

그토록 사랑했던 탐마삿의 돔 아래서 제자들과 눈물의 재회를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짧은 방문이었을 뿐, 끝내 영구 귀국은 허락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눈을 감는다. 그의 삶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지 모른다.

나라를 바꾸려 했지만 떠나야 했고, 잠시 돌아왔으나, 끝내 머물 수는 없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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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어이 웅파껀 | 출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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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명 중 잠시 태국에 들어와 탐마삿 대학교에 온 푸어이 웅파껀 | 출처: 위키피디아

혁명 이후에 남은 것

1932년은 분명 전환점이었다.
왕의 시대에서 헌법의 시대로 넘어간 순간.

하지만 그 혁명을 만들었던 사람들 가운데 마지막까지 이 땅에 남아 생을 마친 이는 거의 없다.

이른 죽음, 기나긴 망명, 침묵 속의 퇴장.

탐마삿의 돔이 지금도 상징으로 남아 있는 이유는 어쩌면 그 때문이다.

혁명은 제도를 남겼지만, 사람들의 삶은 끝내 안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승리의 기록이라기보다 질문의 역사에 가깝다.

민주주의는 시작되었는가. 아니면, 아직도 길 위에 있는가.

탐마삿의 돔은 오늘도 그 질문을 조용히 견디고 있다.

32257730_2055317201176200_8744262443506597888_n.jpg 망명 중 영국에서 만난 푸어이(좌)와 프리디(우) |출처: pridi.o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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