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다른 태국> 권력의 방향

논타부리 | 2

by 강라마
1.jpg 수코타이 탐마티랏 개방대학교 라마7세 동상 | 2025.12 | Thailand_Nonthaburi | Copyright © llama.foto

왕관은 보통 욕망의 상징으로 이야기된다.
그러나 태국의 근대사는, 왕관을 쓰는 것보다 내려놓는 일이 더 어려웠던 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의 이름은 라마 7세.
태국 역사상, 스스로 왕위를 내려놓은 유일한 군주다. 라마 7세는 애초에 왕의 궤도에 있던 인물이 아니었다.

라마 5세의 76번째 자녀, 왕비의 막내아들. 형들이 줄지어 존재했고, 왕위 계승과는 가장 먼 위치에 있었다.

그의 삶의 계획은 명확했다.

영국 울위치 사관학교에서 포병 장교로 훈련받고, 군인으로서 조용하고 규칙적인 삶을 사는 것.
그는 스스로를 “왕의 재목이 아니다”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체구도 약했고, 성격도 내성적이었다. 하지만 왕조는 개인의 바람을 배려하지 않았다.

형 라마 6세에게 아들이 없었고, 다른 왕위 계승자들마저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결국, 가장 원하지 않았던 왕관이 가장 준비되지 않았던 막내 왕자의 머리 위에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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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7세 | 출처: 위키피디아

1925년, 라마 7세가 즉위했을 때 태국은 이미 흔들리고 있었다.

라마 6세 시기의 막대한 재정 적자

국제 곡물 시장의 붕괴로 인한 쌀값 폭락

곧이어 밀려온 세계 대공황의 충격

왕이 된 첫 결정은 확장이 아니라 삭감이었다.
그는 자신의 왕실 예산부터 줄였다. 사치와 상징 대신, 숫자와 보고서를 들여다봐야 했던 군주였다.

병약한 몸으로 무너져가는 국가 재정을 혼자 떠받치고 서 있던 시기.

그에게 왕위는 특권이 아니라 부담이었다.


권력을 가진 자가, 권력을 나누려 했을 때 아이러니하게도, 절대권력을 가진 군주였던 그는 가장 먼저 권력을 나누는 제도를 고민한 사람이었다.

입헌군주제, 헌법, 의회.
그는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왕권 이후의 국가를 위해 그것들을 논의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왕실 내부, 관료 집단, 외국인 고문들까지 하나같이 말렸다.

“백성들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개혁을 원했던 왕과, 변화를 두려워한 구조 사이의 간극은 점점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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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7세 | 출처: 위키피디아

1932년, 군과 관료 그룹에 의한 쿠데타.
‘시암 혁명’이라 불리는 사건은 절대왕정을 종식시키고 입헌군주제를 선언했다.

라마 7세는 무력으로 맞서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스스로 왕관을 내려놓는다.

퇴위 성명에 남긴 문장은 지금도 회자된다.


“나는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줄 의향이 있다.

그러나 특정 집단이 독재적으로 행사하도록 넘기지는 않겠다.”


이 문장은 변명이 아니었다. 패자의 탄식도 아니었다.

왕이 권력을 놓으면서 그 방향을 ‘국민’으로 명시한 마지막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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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코타이 탐마티랏 개방대학교 라마7세 동상 | 2025.12 | Thailand_Nonthaburi | Copyright © llama.f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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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코타이 탐마티랏 개방대학교 라마7세 동상 2025.12 | Thailand_Nonthaburi | Copyright © llama.foto

퇴위 후, 그는 정치의 중심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태국을 떠나 영국에서 조용히 살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논타부리에 있는 수코타이 탐마티랏 개방대학교에 세워진 그의 동상은 그래서 조금 다르게 보인다.

위엄 있는 군주라기보다, 가장 원치 않았던 자리에서 끝까지 책임을 놓지 않으려 했던 사람의 모습.

라마 7세는 혁명의 영웅도 아니고, 체제를 완성한 인물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하나다.
시민의 시대는, 그가 왕관을 내려놓은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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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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