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다른 태국> 명령된 전통

방콕 | 15

by 강라마

태국을 여행하다 보면 묘하게 “잘 정돈된 순간”들과 마주친다.
인사말은 거의 한 가지로 모이고, 도시는 특정한 기억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사람들의 일상 동작까지 어디선가 배운 듯 닮아 있다.

처음엔 오래된 전통처럼 보인다.
그런데 한 겹만 들추면, 그 ‘자연스러움’이 사실은 국가가 정해놓은 연습에 가까웠던 시기가 있다.

그 시대의 중심에 선 인물.
일상을 “정책으로” 다루려 했던 군인 정치가이자 군사 독재자 플랙 피분송크람(Phibun Songkhra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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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랙 피분 송크람 | 출처: 위키피티아

피분이 정치 전면에 등장한 1930~40년대 태국은 형식적으로는 독립국이었지만, 실제로는 위태로웠다.

영국령 버마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사이에 낀 지정학적 압박, 1932년 입헌혁명 이후 왕실·군부·관료 엘리트 간의 불안정한 균형, 그리고 세계대공황 이후의 경제 위기.

피분은 이 상황을 “토론으로 버틸 수 있는 시기”라고 보지 않았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느렸고, 합의는 위기 앞에서 무력해 보였다.

그가 선택한 길은 명확했다. 강한 국가, 빠른 결정, 그리고 통제.

Thai_Cultural_Mandate_Dress_Code_c1940_Phibunsongkhram.png 피분 정부가 내놓은 문화 규범 포스터 | 출처: 위키피티아

피분 통치의 핵심은 헌법이나 내각 개편이 아니었다.

그는 더 아래로 내려갔다.
사람의 습관과 일상으로.

이 시기 등장한 것이 ‘รัฐนิยม(라트타니욤)’이라 불리는 국가 주도의 문화·생활 규범 정책이다.

공공장소에서의 행동

복장과 예절

언어 사용

하루의 리듬

국가는 더 이상 멀리 있지 않았다.
아침에 어떻게 서고, 어떻게 인사하는지까지 관여했다.

오늘날 여행자들이 가장 강하게 체감하는 장면 중 하나, 아침 8시와 저녁 6시 국가 연주가 울리면 모두가 국기를 향해 멈춰 서는 풍경 역시 이 시기에 제도화된 ‘국가의 시간 감각’이다.

이건 신앙이 아니라, 훈련에 가깝다. 피분은 국가가 사람의 몸에 새겨질 수 있다고 믿었다.

333.jpg 태국 인삿법

태국에 와서 가장 먼저 배운 말이 당연히 오래된 전통 인사일 거라 생각했다.
“싸왓디.”

태국어가 만들어지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쓰였고, 수백 년간 이어져 내려온 말일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사실 태국에는 원래도 인사는 있었다.
“밥 먹었어?”
“어디 가?”
“잘 지내?”
같은 안부 인사들.
다만 그것들은 관계와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말들이었지, 국가를 대표하는 정식 인삿말은 아니었다.

1930년대, 태국이 근대 국가의 틀을 고민하던 시기, 지배층과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제는 나라를 대표할 공식 인삿말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등장한다.
외교와 교육, 행정에서 쓸 수 있는 통일된 언어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때 출라롱콘대학교의 언어학자 프라야 우파킷 실라파산이 산스크리트어 ‘스바스티(Svasti)’, 즉 ‘안녕’과 ‘길상’을 뜻하는 단어에서 ‘싸왓디’라는 표현을 정리해 제안한다.

그리고 이 말이 지금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게 쓰는 인삿말이 된 데에는 피분 송크람의 선택이 결정적이었다.

피분은 ‘싸왓디’를 국가가 쓰는 공식 인사로 채택했고, 학교와 관공서, 군대와 언론을 통해 이 말을 반복해서 사용하도록 만들었다.

그 순간부터 인사는 관계의 표현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의 몸에 새기는 일상의 규범이 된다.

2222.jpg 팟타이

팟타이는 ‘전통 음식’이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정책과 경제 상황이 만든 결과물에 가깝다.

1930~40년대 당시 태국은 대홍수와 전쟁으로 쌀이 귀했다. 정부는 온전한 쌀알 대신 부서진 쌀로 만든 국수 소비를 장려했다.

피분 송크람의 관저 주방을 책임지던 요리사는 당시 많은 태국 가정이 그랬듯 중국 화교였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피분의 식탁에 올리던 볶음 국수는 그가 즐겨 먹던 메뉴였다. 하지만 민족주의를 내세우던 피분에게 ‘중국식 국수’를 그대로 국민에게 장려하는 건 모순이었다.

피분은 주방의 레시피를 수정하도록 지시한다. "중국 냄새를 지워라."

짠맛을 내던 중국 간장을 빼고 태국의 어장(남쁠라)과 타마린드를 넣었다.

중국인이 좋아하는 돼지고기 대신, 태국 강에서 흔히 잡히는 새우와 말린 새우를 넣게 했다.

그렇게 가정부의 손끝에서 시작된 국수는 지도자의 '편집'을 거쳐 ‘팟타이(Pad Thai)’라는 이름을 얻었고, 곧바로 "태국의 국수"라는 슬로건과 함께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이 음식이 오늘날 전 세계가 사랑하는 태국의 맛이 된 것은, 어쩌면 가장 성공한 프로파간다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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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승 기념관 | 2026.01 | Thailand_Bangkok | Copyright © llama.foto

방콕의 전승기념탑은 그저 전쟁 희생자를 추모하는 구조물이 아니다.

이 탑은 1941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의 전쟁을 ‘국가적 승리’로 고정하기 위해 세워졌다.

중요한 건 누가 만들었는가다.

이 기념물의 조형을 맡은 인물은 이탈리아 출신 조각가 실파 비라시(Silpa Bhirasri),
현대 태국 미술의 아버지이자 실파꼰대학교의 창립자다.

즉, 이 탑은 군부의 정치적 기억을 근대 미술 언어로 포장한 국가 프로젝트였다.

당시엔 강력한 상징이었다. “군부가 나라를 지켰다”는 메시지를 도시 한복판에 영구적으로 새긴 셈이니까.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의미는 변했다.
오늘날 전승기념탑은 교통의 중심이자 약속 장소에 가깝다.
많은 태국인에게 이곳은 불편한 역사이지만, 지우지 않고 남겨둔 장소다.

좋지 않은 역사도 역사라는 인식.

그것 역시 이 탑이 살아남은 이유다.

555.jpg 반 마낭카실라 | 출처: 구글 맵

전승기념탑이 ‘보여주기 위한 기억’이라면, 반 마낭카실라는 권력이 실제로 회의하고 결정되던 공간이다.

이 집은 라마 6세 시기에 조성된 이후, 피분 집권기에는 정부 접견과 정치적 협의가 이루어지던 핵심 장소가 된다.

1950년대 중반, 피분은 이곳을 자신의 관저 및 정당 본부로도 사용했다.

중요한 역할을 한 이 곳이 1957년 태국에서 더러운 선거라 불리는 부정선거의 기획지이기도 하다


피분 송크람은 태국을 분명히 바꿨다.

언어, 음식, 시간 감각, 국가의 이름, 그리고 도시의 기억까지.

그러나 그의 방식은 강했고, 빠르며, 동시에 위험했다.

1957년, 부정선거가 발각되고 반대파의 시위와 피분의 부하 사령관이었던 사릿 타나랏의 쿠데타로 그는 실각했고 결국 일본으로 망명해 1964년 조용히 생을 마쳤다.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만든 ‘국가의 틀’은 여전히 작동하지만, 그 자신은 그 나라의 중심에서 사라졌다.

우리가 전통이라 믿는 것들 중 일부는 사실 누군가의 설계된 선택이었다.

그 사실을 알고 태국을 걷게 되면, 이 나라는 전혀 다른 얼굴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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